‘꼰대’가 아닌 ‘리더’의 신묘한 용의 능력
重天 乾(중천건)
乾, 元, 亨, 利, 貞.
건은 만물을 시작하게 하는 근원이고, 만물을 성장시켜 형통하게 하고, 만물을 촉진시켜 이롭게 하고, 만물을 완성시켜 바르게 한다.
初九, 潛龍勿用.
초구효, 물에 잠긴 용이니 쓰지 말라.
九二, 見龍在田, 利見大人.
구이효, 용이 나타나 밭에 있으니 대인을 만나는 것이 이롭다.
九三, 君子終日乾乾, 夕惕若, 厲,无咎.
구삼효, 군자가 종일토록 그침 없이 힘쓰며 저녁이 되어도 두려운 듯이 위태로우나 허물이 없다.
九四, 或躍在淵, 无咎.
구사효, 혹 뛰어 오르거나 연못에 있으면 허물이 없다.
九五, 飛龍在天, 利見大人.
구오효, 날아오른 용이 하늘에 있으니 대인을 만나는 것이 이롭다.
上九, 亢龍有悔.
상구효, 너무 높이 올라간 용이니 후회가 있다.
用九, 見羣龍, 无首, 吉.
용구효, 여러 용을 보되 우두머리가 되지 않으면 길하다.
내 나이 육십갑자 한 바퀴를 훌쩍 넘었다. 인생 한 바퀴를 다 살아봤으니 뭔가 원숙한 지혜가 터득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게 아니다. 어렸을 땐 나이 육십이 넘으면 세상일에 통달할 줄 알았다. 그런데 통달은커녕 나이 들수록 지혜와는 동떨어진 꼰대가 되어가기 십상이라는 걸 알았다. 부모님만 보아도 살아오는 동안 겪었던 당신들의 고생이나 경험도 자기만의 깔때기로 수렴되어 더욱 견고한 아집이 된다는 걸 익히 보아왔던 터다. 매사의 기준이 자신의 경험인지라 툭하면 ‘나 때는~’하면서 자신의 경험을 내세워 평가하고 훈계하려 든다. 나이는 시간이 흐르면 노력하지 않아도 절로 주어지고 가진 거라곤 일천한 경험뿐이니 어쩌면 당연하다. 나이가 들면 들어서 그렇다지만 젊다고 꼰대스러움에서 자유로운 건 아니다. 얼마 전 진즉에 ‘꼰대라떼!’라는 노래에 실제 커피메뉴까지 등장했다는 걸 알고 웃었다. ‘나 때(라떼)는 말이야~’가 만들어낸 신조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답답한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 공부하는 장에서도 자칫 꼰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곳 연구실에 발을 들여놓은 지 거의 10년이 다 되어간다. 연구실에서 공부 년차가 늘어간다는 건 단순히 지식을 쌓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 그만큼 배운 걸 내놓아야 한다. 세미나로 강의로 글로. 그럼으로써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배운 것을 나눌 수 있는 능력 또한 기르게 된다. 또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스스로 공부의 비전을 가진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실 리더라는 말처럼 나와 거리가 먼 단어도 없다. 리더는커녕 사람들 눈에 띄는 것조차 싫어하고 부담스럽기 짝이 없는 축이었다. 그쪽으론 마음도 쓰지 않았을 뿐더러 어색하고 때론 거부반응까지 일어난다. 명리를 공부하며 이런 나를 많이 이해하게 되었다. 사주팔자에 조직이나 관계의 자리는 아예 내게 없고 자아가 비대하다는 걸 알았을 때 사람은 참 팔자대로 사는구나 싶었다. 겸손해서도 소심해서도 아닌 협소한 자아의 틀을 깨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협소한 자아의 틀이란 보통 우리네 말들로 하면 타고 자라난 성격이자 습관이자 업장이고, 주역의 언어로는 소인의 사특함이라 할 수 있다. 마침 ‘내 인생의 주역’ 글을 건(乾)괘로 쓰게 되었다. 건괘는 말 그대로 리더 중의 리더인 성인군자의 괘다. 오로지 순수한 양(陽)으로만 이루어진 이상적인 덕목의 괘. 그 모범으로 삼는 요·순임금이 갖춘 덕목은 이상적인 리더십의 전형 아니던가. 주역을 공부하다보면 자신이 영락없는 소인임을 절감하게 되고, 그런 소인으로서 군자의 덕성을 배우고자 공부하고 있으니 우선 건괘에서 말하고자 하는 리더십의 덕성이 무엇인지 보자.
건괘는 용의 모습으로 효들을 설명한다. “용은 신묘하게 변화하여 예측할 수가 없기 때문에 용으로 건도가 변화하는 모습, 양의 기운이 소멸하고 자라나는 모습, 성인이 나아가고 물러나는 모습을 상징했다.”(정이천, 『주역』, 글항아리, 54쪽) 용이 신묘하게 변화하는 능력이 그만큼 출중하기 때문에 건도를 상징한다고 한다. 하늘의 도인 건도가 바로 그만큼 변화무쌍하고 예측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건도는 ‘강건하여 쉼이 없는 것’(같은 책, 52쪽)을 말한다. 말하자면 온갖 예측할 수 없는 변화무쌍함 가운데 변함없이 한결같은 강건함을 유지하는 게 하늘의 도가 아닌가. 하늘의 이치인 ‘건도는 자연의 이치다.’(같은 책, 87쪽) 해가 뜨고 지고 사시가 운행되는 우주자연의 변함없는 법칙은 강건하고 한결같지만, 또한 매일 매 순간 너무나 많은 예측할 수 없는 변화를 통과하고 있다. 변화와 더불어 변함없는 항상성을 견지하는 것. 때에 맞춰 소멸하고 자라나고 나아가고 물러날 수 있는 능력이 바로 용이 가진 자질이자 성인의 자질이다. 이 자질이 리더십으로 드러나는 건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 구체적인 삶의 현장, 공부의 현장이다. 그때그때 조건에 따라 닥친 변화나 사건 속에서 가장 적절하게 변화하고 대응할 수 있는 리더십, 그러면서 전체적인 큰 그림에서 가야할 방향을 알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 항상성과 강건함을 지닌 리더십. 이것이 용의 신묘한 리더십이다.
그렇다고 용이라고 해서 아무 거리낄 것 없이 마음대로 자유자재한 게 아니다. 자신이 처한 자리와 때에 맞추어 처신해야 하는 건 주역의 여느 괘와 다를 바가 없다. 성인군자도 인간세상에서 마음껏 제 능력을 펼치기 위해선 밟아야 할 스텝과 때가 있다. 때가 아닐 때는 조용히 내면을 다지며 기다려야 하고(潛龍),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자신의 덕성을 알아보고 더 함양해줄 대인을 만나 배워야 하고(見龍), 종일토록 경계하며 자신을 닦아야 언제 닥칠지 모르는 위태한 상황에서도 허물이 없다(君子終日乾乾). 그래야 기회가 왔을 때 존재의 도약을 신중히 꾀할 수 있고(躍龍), 마침내 날아올라 용의 제 거처인 하늘의 지위에서 세상 속 현자들과 함께 세상을 편안하고 이롭게 할 수 있다(飛龍). 이는 곧 공부의 스텝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잠룡과 현룡이 가지고 있는 용의 덕도 자만하지도 방심하지도 않고 쉼 없는 강건함으로 수행하는 자세를 견지할 때 질적인 도약을 이룬다는 걸 말한다. 용의 신묘한 능력은 신출귀몰한 신비한 능력이 아니다. 한결같이 강건하게 하늘의 도를 실행하면서도 그때그때 자신의 자리와 때에 맞게 변환할 수 있는 능력이다. 언제 나아가고 물러날지 어떻게 변화해야 할지를 알고 정직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능력이다. 그 능력은 관계 속에서, 삶의 현장에서만이 배울 수 있다. 이는 곧 공부의 현장을 통해 배우려는 능력에 다름 아니다.
상구효인 항룡(亢龍)은 이런 신묘한 용의 능력도 자칫 방심하거나 그 때를 다할 때가 있다는 걸 경고한다. 제 아무리 용이라도 변하지 않는 건 없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적절히 멈춰야 할 때를 놓치거나 미처 상황파악이 안돼 후회할 일을 만든다(有悔). “‘너무 높이 올라갔다(亢)’는 말은 나아갈 줄만 알고 물러설 줄은 모르는 것이고, 보존하는 것만 알고 잃는 것은 모르며, 얻는 것만 알고 잃는 것은 모르는 것이다.”(같은 책, 84쪽) 공부의 연륜이 쌓여 가면 갈수록 절로 리더로서의 덕성, 용의 변신능력도 늘어나고 그만큼 강건하면서도 유연한 리더십이 만들어지는 게 당연할 것 같은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나아가기만 하고 물러설 줄 모르고 보존하는 것만 알고 잃는 걸 모른다는 건, 여전히 ‘자아’의 견고한 틀을 깨부수지 못하고 소인의 사심과 욕심이 우선되기 때문이다. 용의 신묘한 능력은 한결같으면서도 변화무쌍한 하늘의 도를 따랐기 때문이다. 용은 자아가 없다. 자아에 갇힌 용이 어찌 예측 불가능한 변화에 능통하겠는가. 건괘의 마지막 스텝인 상구효는 은퇴자의 자리이고 조직에 있어도 실질적으로 힘이 없는 자리다. 그렇다면 그런 자리에 걸맞게 힘을 빼야 한다. 있지도 않은 권위와 힘을 유지하려는 자아의 모습이 꼰대스러움 아닌가. 아무리 십년 이십년 공부한들(亢龍) 리더의 덕성이 생성되지 않는 한 융통성 없고 어리석은 꼰대의 후회가 남을 뿐이다(有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아의 경계를 부수기 위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강건한 하늘의 운행을 본받아(天行健) 스스로 강건하기를 그치지 않을 뿐이다(自彊不息). 내게는 공부의 현장이 곧 자강불식을 훈련하는 현장이다. 가족에게서도 일에서도 물러나 은퇴한 지금, 나는 공부하는 삶의 현장에서 건의 덕, 리더로서의 신묘한 용의 능력을 배우고 싶다. 쉼이 없어 강건하고 어떤 변화에도 유연하게 변신할 수 있는! 그것이 곧 나에게도 세상에도 이로운 존재로서 나의 본성을 찾는 길이기 때문이다. 다시금 육십갑자는 반복되지만 새로운 육십갑자를 맞이하고 싶다.
글_안혜숙(감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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