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행복할 수 있다는 상상력
風雷益(풍뢰익) ䷩
益, 利有攸往, 利涉大川.
익괘는 나아갈 바를 두는 것이 이롭고, 큰 강을 건너는 것이 이롭다.
初九, 利用爲大作, 元吉无咎.
큰일을 일으키는 것이 이로우니, 크게 좋고 길해야 허물이 없다.
六二, 或益之, 十朋之龜弗克違, 永貞吉, 王用享于帝, 吉.
혹 보탤 일이 있으면 열 명의 벗이 도와주는 것이다. 거북점일지라도 이를 어길 수 없으나, 오래도록 올바름을 굳게 지키면 길하다. 왕이 이런 마음을 써서 상제께 제사를 드리면 길하다.
六三, 益之用凶事, 无咎, 有孚中行, 告公用圭.
보태는 일을 흉한 일에 쓰면 허물이 없으나,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중도로써 행해야 군주에게 고할 때에 규로써 할 수 있다.
六四, 中行告公從, 利用爲依 遷國.
중도로써 행하면 군주에게 고해서 따르게 하리니, 윗사람에 의지하여 나라의 도읍을 옮기는 것이 이롭다.
九五, 有孚惠心, 勿問元吉, 有孚惠我德.
진실한 믿음이 있어 마음으로 세상을 은혜롭게 하니 묻지 않아도 크게 길하고, 백성들이 믿음을 가지고 나의 덕을 은혜롭게 여긴다.
上九, 莫益之, 或擊之, 立心勿恒凶.
보태 주는 사람이 없고, 어떤 사람은 공격한다. 마음먹기를 늘 하던 대로 하지 말아야 하니, 흉하다.
얼마 전 인터뷰 기사를 보게 됐다. 정유정 작가가 자신의 신작을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행복은 덧셈이 아닌 뺄셈으로 완성된다고 생각하는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완전한 행복을 위해 불행의 가능성을 없애가는 이야기에요”라고 그 취지를 간단히 설명했다. 우리는 입버릇처럼 행복에 대해 말한다. 그런데 그 조건이 참 묘하다. 어떤 때는 돈, 집, 자식 등 뭐든 더해지면 행복할 거라고 하는데, 또 어떤 때에는 질병, 고통, 다툼 등 자신을 괴롭게 하는 것이 없어지면 행복할 거라고 하니 말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후자에 속한다. 자신을 괴롭게 하는 요소를 다 빼버리면 행복해질 거라고 믿는 극단적인 사람이다.
그렇게 주인공은 자기를 불행하게 만든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하나씩 제거해나간다. 제거의 대상은 다양하다. (놀라지 마시라. 이 소설의 장르는 스릴러다) 그녀에게 가장 쉬운 제거의 대상은 사람이다. 뜨겁게 사랑했지만 변심한 애인, 자신의 잘못을 끝내 용서하지 않은 아버지, 소중한 딸을 빼앗으려고 하는 전남편… 이렇게 극단적으로 사람을 제거하기도 하지만, 인연을 끊어버리기도 한다. 어릴 때 자기가 받아야 할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했다고 생각하는 언니와는 십 년이 넘도록 만나지 않았다. 재혼한 남편의 아들도 온갖 핑계와 논리를 대서 시어머니에게 맡긴 상태다. 이처럼 자기 행복만이 유일한 삶의 목적인 것처럼 보이는 그녀지만, 딸만은 목숨처럼 사랑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런 딸도 예외는 아니었다. 딸에게서도 빼앗아간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말’이었다. 본 것, 들은 것을 말하면 안 된다. 질문을 해서도 안 된다. 엄마의 명령을 이행하는 것만이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한 아이는 기계처럼 말하고 움직일 뿐이다. 엄마의 명령을 어기면 자신도 ‘빼기’의 대상이 되는 것을 아는 것처럼 말이다. 그녀에게 있어 빼기는 완전한 행복을 위해서 고수해야 할 유일한 태도처럼 느껴진다. 여기까지가 소설 『완전한 행복』의 대강의 줄거리다.
줄거리만 들으면, 마치 ‘남의 일’처럼 느껴진다. 행복을 위해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행위를 한다는 것이! 그렇지만 그녀의 논리가 낯설지만은 않다. 나 역시 나를 힘들게 하는 사건, 갈등관계에 있는 사람과의 관계가 어떻게든 정리되면 편해질 거라고 생각하곤 하니까. 주인공의 빼기는 극단적이어서 심각하고, 나의 빼기는 평범해서 괜찮은 것이 아니다. 불행의 요소가 외부에 있다 여기고 그것을 없애는 것이 인생에 행복을 준다고, 보탬이 된다고 믿는 것에 대해 질문을 던져야 한다. 마침 풍뢰익괘(風雷益)가 이 논리의 허점에 대해 설명해주고 있었다. 익괘는 위를 덜어내어 아래를 증진시키는, 다시 말해 ‘덜어내어 유익해지는’ 괘이다. 덜어내는 것이 극한에 이르면 반드시 덧붙여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치라는 서괘전의 설명도 있지만, 천지비(天地否)괘가 변하여 익괘가 되었다는 부분이 더 설득력 있게 들렸다. 비괘(否卦)의 경우, 위에는 하늘(乾), 아래에는 땅(坤)이 있다. 가벼운 것이 위에 있고, 무거운 것이 아래에 있어서는 순환이 되지 않는다. 꽉 막힌 상황인 것이다. 이때 위의 양(九四)과 아래의 음(初六)이 자리를 바꾸면서 국면을 바꾸어 놓는다. 위의 것을 덜어내 아래의 것에 덧붙여주니 덧붙임이라는 뜻이 있는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유익해진다고 볼 수 있겠다. 이처럼 무언가를 빼고 덜어내는 것, 그것이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설명은 같다. 다만 익괘에서는 무엇을, 어떻게 덜어내야 하는지에 대해서 완전히 다른 논리를 펼치고 있다.
익괘는 덧붙임, 증진, 유익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녀가 추구하는 행복이라는 것도 결국은 자신의 유익함을 증진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말했듯이, 관건은 ‘어떻게’다. 익괘의 효 대부분은 뭔가를 빼고 덜어냄으로써 자신에게든 타인에게든 유익한 일을 도모하고 있다. 분에 넘치는 일을 감수하고(初九), 마음을 비우고(六二), 위험을 무릅쓰면서 과감한 결단을 하고(六三), 고집을 꺾어 도읍을 옮기고(六四), 안위를 버리고 권력을 잡는다(九五). 다섯 효 모두 상황과 처지에 따라 자기의 욕심을 내려놓았다. 자신의 안위나 신념, 자존심, 그리고 애써서 만든 결과물 등을 말이다. 이렇게 덜어낸 것이 곧 모두의 유익함이 되는 것, 이것이 익괘의 덜어냄이다. 그런데 이중 유일하게 상구효만이 헛발질을 하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의 상황을 상구효에 대입해 보았다. ‘보태주는 사람이 없고, 어떤 사람은 공격한다. 마음먹기를 늘 하던 대로 하지 말아야 하니, 흉하다(莫益之, 或擊之, 立心勿恒凶)’고 했는데, 풀이만 대략 봐도 외로워 보이고, 흉하다. 자기의 행복만을 쫓는 행동 때문에 누구도 육효를 돕지 않고, 혹은 공격을 당하기도 하는 상황이다. 익괘의 맨 끝에서 누구보다 강렬하게 행복을 원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어떤 유익함도 누리지 못하는 듯 보인다. 이렇게 헛발질을 하게 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욕심’ 때문이다. 정이천은 이로움이란 여러 사람이 동일하게 욕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제멋대로 자신에게만 유익하려고 한다면, 그 해로움이 크다(정이천, 『주역』, 글항아리, 851쪽)고 했다. 욕심이 강하면, 유익함이나 이로움이라는 키워드가 자기만의 이익으로 바뀌게 된다. 그래서 성현들도 ‘이익’을 구하는 것에 대해 경계했다. 공자는 ‘이익에 따라 행하면 원망이 많다’고 했고, 맹자는 ‘이익을 앞세우게 되면 모든 것을 빼앗지 않고서는 만족하지 않는다’(같은 책, 851쪽)고 했다. 이렇게 자기 이익에 빠져있으면 세상 모든 것이 원망의 대상이 된다. 자신과는 무관한 어떤 외부의 원인 때문에 이익을 얻지 못하고 불행해졌다고 믿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외부의 조건을 어떻게든 없애버리려고 하게 되는데, 위의 주인공처럼 그 원인이 되는 대상을 없애거나, 통제하는 지경까지 갈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욕심의 결과는 예상 가능하다. 그녀에게 보탬을 주려는 사람이 없어지고(莫益之), 타인들도 더 이상 당할 수만은 없어 그녀를 공격하게(或擊之) 된다.
상구효는 이 상황에 대해 다시 한번 경고한다.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고. 누구도 돕지 않고, 공격을 당함에도 불구하고 ‘마음먹기를 늘 하던 대로 하면’(立心勿恒) 흉하다고 말이다. 그녀에게도 마음을 바꿀 기회는 있었다. 사랑하는 애인이 자신을 두려워할 때, 남편이 자기를 의심할 때, 순종하던 딸이 말을 듣지 않을 때… 이처럼 징조는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럴수록 미움과 복수심을 증폭시켰다. 대상전에서도 ‘마음먹기를 늘 하던 대로 하는 것’(立心勿恒)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군자는 우레와 바람의 서로 돕는 모습을 보고는, 착한 것을 보면 옮기고 허물이 있으면 즉시 고쳤다(見善則遷 有過則改)고 한다. 이 개과천선(改過遷善)의 태도만이 악행을 덜어내고 새로운 길을 열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레는 진동하는 것이고, 바람은 공손한 것이다. 진동은 ‘혁명’의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으니, 기존의 생각이나 관습을 흔들어놓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녀는 이 정도 상황이면 알아차려야 했다. 자기에게 불행이라고 생각하는 요소를 뺀다는 것이 곧 타인의 행복을 빼앗는 일이 된다는 것을. 자신의 빼기가 다름 아닌 빼앗기였다는 것을 말이다. 이 개과천선의 기회를 포착해 공손히 따르지 않으면 그 끝은 흉(凶)하게 끝날 수밖에 없다.
나는 그녀가 ‘함께 행복해지는 법’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라고, 어쩌면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익괘가 말하는 행복은 기본적으로 공정하게, 모두가 함께 누리는 행복을 말한다. 그렇기에 오히려 익괘의 상상력에는 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이란 게 없다. 익괘의 기조에서 유일하게 벗어나 있는 상육효가 흉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결국, ‘나’의 행복이라는 협소함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행복을 나누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그래서 익괘는 방(方)이 아니라 천지(天地)로 펼쳐지는 유익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행복은 자기 욕심만 생각하는 한정된 방(方)에서 절대 이루어질 수 없으므로. 그렇다면, 이제 상상해봐야 하지 않을까. 모두가 함께 행복해질 수 있는 길에 대해서.
글_ 성승현(감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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