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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의 걷다보면

[기린의 걷다보면] 해파랑길 24코스를 걷다보면(with 땡볕)

by 북드라망 2023. 9. 20.

해파랑길 24코스를 걷다보면(with 땡볕)

 

7월 30일 토요일 아침, 후포는 햇빛 쨍쨍한 하루가 시작되었다. 낮 최고 기온 32도에 체감 온도는 34도 라고 했다. 후포 한마음 광장에서 시작하는 해파랑길 24코스를 걷기 위해 집을 나섰다. 아침 아홉시, 온 몸으로 쏟아지는 햇빛의 열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십 분쯤 걸어 등기산 공원 초입에서 가지 말까 잠깐 망설였다. 햇빛을 가리기 위해 얼굴 전체를 가린 모자에 팔토시까지 했더니 순식간에 땀범벅이 된데다 발걸음도 무거웠다. 망설임을 떨쳐내기 위해 한 호흡 깊이 들이마시고 공원으로 가는 계단을 올라서서 걷기를 시작했다.
 

내 기억의 바다
해파랑길은 부산 오륙도 해맞이공원에서 강원 고성 통일전망대에 이르는 동해안의 해변길로 총 750㎞에 이르는 길인데 2016년 5월에 정식 개통하였다. 그중 울진 구간인 24코스는 후포항 한마음 광장에서 출발해서 기성터미널까지 18.2km 구간이다. 후포는 내가 태어난 곳이자 지금도 어머님이 고향집에 살고 계시고, 스무 살에 수도권으로 상경한 이후 명절이나 대부분의 여름휴가를 보내는 곳이기도 하다. 2년 전 해파랑길에 대해 알게 된 후 고향에 내려올 때 마다 영덕 구간과 울진 구간을 찾아서 걷곤 했다.

그 중에서 24코스는 내가 어린 시절부터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지도에서는 직선으로 단조롭게 그어진 해안선으로 보이지만, 내 눈 앞에 펼쳐진 바닷가 파도는 거셌고 바다 위로 융기한 삐죽 삐죽한 바위들이 곳곳에 드러나 있었다. 그래서 어린 시절 내 기억의 바다는 위험하고 한 여름에도 깊은 수심 때문에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었다. 유난한 태풍이 지나가고 나면 어느 집 아버지가 바다에서 돌아오지 못했다든가, 해수욕을 하러 갔다가 파도에 휩쓸려갔다는 누구 집 자식의 이야기도 가끔 들려오는 그런 곳이었다.

 

 


변한 것들
내가 고향을 떠난 후 바다의 주변은 점점 변해갔다. 해안을 따라 도로가 개통되고 항구에 배가 안전하게 접안할 수 있도록 바다 가운데 방파제가 건설되었다. 파도가 치면서 실어 나르는 모래들로 예전에는 없었던 모래사장이 형성되기도 했다. 어느 해안가는 해수욕장이 개장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해수욕장과 관련 부대시설이 들어서고 여름 한 철 피서객들이 제법 북적였다. 등대가 있던 등기산이 정비되어 탁 트인 바다를 볼 수 있는 전망대에, 최근에는 바다 한가운데로 걸어가 볼 수 있는 스카이워크도 생겼다. 관광객들을 유치하기 위해 바다 주변을 메우고 깎고 뭔가 짓는 일들이 계속되고 있다.

후포항은 교통이 불편했던 1960년대까지 만선으로 돌아온 어선들이 부근에 팔고 남은 생선들이 많아 누구라도 가져가게 할 정도로 인심이 후했다고 한다. 거기서 후포(厚浦)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지금은 날로 어획량이 줄어 경제 사정이 별로 좋지 않은가 하면, 뱃일을 하겠다는 사람도 계속 줄어서 몇 년 사이 이주 노동자들이 속속 진입하고 있다고 한다. 24코스를 따라 거일-직산-구산-기성으로 이어지는 해안을 따라 옹기종기 형성된 마을에 집들이 많이 낡아 보였다. 빈집도 많았다. 도시 집중화와 맞물려 쇠락해가는 지방의 변화가 점점 더 빨라지는 것 같다.

 

변하지 않은 것들
24코스는 내내 바다를 따라 걸을 수 있다. 바다 옆으로 도로가 나면서 주변의 모습은 달라졌지만 동해의 푸른 빛 바다와 파도 소리, 갈매기들이 드나드는 터전은 그대로였다. 그늘 한 점 들지 않는 길을 걷자니 땀방울이 맺혔지만 주르륵 흘러내리기 전에 말랐다. 햇빛으로 뜨거워진 몸을 동해의 푸른 바람에 말려가며 걷는 맛이었다. 팔토시로 가린 손목을 경계로 해서 손등이 점점 구리빛으로 달구어졌다.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을 한결 같았을 태양과 바다와 내가 합체가 되는 것 같았다. 언젠가는 사라질 나와 달리 늘 뜨겁게 빛나고 늘 푸르게 파도치며 살아가는 존재의 위엄이 흘러 넘쳤다.

월송정은 관동팔경의 하나로 24코스의 삼분의 일 지점 무렵에 위치해 있다. 고려 시대 왜구의 침입을 살피는 망루로 세워진 것을, 조선 중기에 정자로 중건된 곳이라고 한다. 월송정 주변은 푸른 소나무 숲이 울창하고, 정자에 올라 보면 앞으로 흰 모래사장과 푸른 바다로 이어지는 풍광이 시야에 들어왔다. 월송정에서 내려오는데 다정히 손을 잡고 오르는 연인을 지나쳤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월송정은 울진에 있는 남고와 후포고 여학생들의 미팅장소였다. 미팅이 있던 일요일을 보낸 월요일 아침이면, 누구와 누가 사귀게 되었다는 소문이 교실에 퍼지곤 했다. 정자 주변 소나무 숲에서 한 쌍씩 짝을 지어 제법 숙덕거렸겠다. 졸업 때까지 나에게는 한 번도 기회가 없었던 미팅임에도 불구하고, 그 기억이 반짝 떠올랐다.

 

 

 

걷다가 마주친 즐거움
24코스의 삼분의 이 지점을 통과할 즈음에는 바다에서 떨어진 산중턱으로 길이 나 있었다. 산에 가려서 바람도 불지 않는 길을 헉헉거리며 올라가고 있는데, 한 사람이 자전거를 타고 힘겹게 페달을 밟으며 내 옆을 지나쳤다. 내내 쌩쌩 달리는 자동차만 나를 지나쳤는데, 이 땡볕에 마침 지나가는 차도 없는 경사진 도로를 함께 통과하는 순간이었다. 단 한 번 짧은 스침임에도 불구하고, 혼자가 아니라는 기쁨에 하마터면 소리칠 뻔 했다. 반가워요! 그 기분을 살려 저만치 멀어지는 뒤통수를 향해 빙그레 웃음을 날렸다.

해안선을 따라 융기한 암석 주변에서 허리를 숙이고 뭔가를 잡는 사람들도 종종 눈에 띄었다.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누군가 따다가 말리려고 널어놓은 청각도 보였다. 몇 년 사이 동해안에서 거의 사라졌다는 오징어 서너 마리를 바다 바람에 널어놓은 건조대도 지났다. 그 풍경들을 지나가면서 파도와 모래만이 아니라 뭔가 잡을 수 있는 그래서 오랜 동안 우리를 먹여 살린 바다를 만날 수 있었다. 고향집 근처에 바다에서도 여름이면 백합을 캐서 삶고 부치고 구워서 먹곤 했다. 24코스의 종점 기성버스터미널에 도착했을 때 마음은 이미 바다 속에 들어가 조개를 캐고 있었다. 3만보에 다섯 시간 내내 땡볕을 걷고 난 참이었는데도 바다로 들어갈 마음이라니, 바다는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는 것들로 나를 부르는 곳이다. 

 

 

글_기린(문탁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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