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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고전 이야기 ▽/내인생의주역 시즌2

[내인생의주역시즌2] ‘기다림’으로 찾은 항심

by 북드라망 2023. 4. 6.

‘기다림’으로 찾은 항심

 

水天需(수천수) ䷄
需 有孚 光亨 貞吉 利涉大川.
수괘는 내면에 꽉 찬 믿음이 있어서 빛나고 형통하며 올바름을 지키고 있어 길하니, 큰 강을 건너는 것이 이롭다.

初九 需于郊 利用恒 无咎.
초구효, 교외에서 기다리는 것이니 항상됨을 지키는 것이 이롭고 허물이 없다.

九二 需于沙 小有言 終吉.
구이효, 모래사장에서 기다리는 것이니 구설수가 조금 있지만 끝내 길하리라.

九三 需于泥 致寇至.
구삼효, 진흙탕에서 기다리니 도적이 이르도록 자처한다.

六四 需于血 出自穴.
육사효, 피를 흘리며 기다리는 것이니 스스로 안전한 곳에서 나온 것이다.

九五 需于酒食 貞 吉.
구오효, 술과 음식을 먹으며 기다리니 바르고 길하다.

上六 入于穴 有不速之客三人 來 敬之 終吉.
상육효, 편안한 곳으로 들어가는 것이니 부르지 않은 손님 셋이 오지만 그들을 공경하면 끝내 길하리라.

 

 

직장을 그만둔 지 십 년이 넘었다. 오랜 직장생활을 마감하게 만드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인연 조건이 작용했다. 가장 큰 이유는 직장생활에 대한 답답함이었다.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도 그렇지만, 책상 위에 앉아서 기계처럼 일해야 하는 것도 숨 막혔다. 한계치에 도달했다고 생각했을 때, 인문학을 만나게 됐다. 대학졸업에서 직장생활로 이어지는 삶 외에는 상상해본 적 없던 내게 ‘인문학’을 통해서 만나는 삶은 너무도 생소했다. 구로에 있는 수유너머를 다니며 달인 시리즈, 연암 박지원의 삶, 임꺽정의 인물들과 만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다양한 삶을 창안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았다. 나는 ‘일’과 ‘공부’가 공존할 수 있다는 그 가능성을 실천에 옮겨보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자전거 가게를 연 것은 ‘다른 삶’을 실험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이다. 이것은 내 삼십 년 인생에서 ‘혁명’이라고 부를만한 과감한 시도였다.

 

 

그런데, 가게 오픈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예상치 못했던 지점에서 헤매게 되었다. 내 가게를 운영하면 굉장히 능동적인 세계가 펼쳐질 거라고 예상했는데, 이 일에는 다른 차원의 수동성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기다림’이었다. 처음 가게를 열고 손님이 오기를 조마조마하게 기다리던 때가 떠오른다. 그리고, 첫 손님이 들어왔을 때의 기쁨과 설렘도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손님을 기다리는 게 고역으로 다가왔다. 사람에 치여 감정이 상할 때도 있고, 고된 노동으로 몸이 피곤할 때도 있었지만, 가장 힘든 건 오지 않는 손님을 기다리는 일이었다.

기다림을 뜻하는 수천수괘(水天需卦)를 보니, 가게를 시작하면서 가장 큰 숙제였던 기다림을 화두로 두었던 때가 떠올랐다. 수괘(需卦)는 하늘(天) 위에 물(水)이 있는 상인데, 막 자라나는 강건한 양들(乾) 앞에 어려움(坎)이 존재하는 형상이다. 이때 무턱대고 돌진할 것이 아니라, 일단 기다리라고 한다. 오죽하면 ‘기다림에 뜻을 둔다’(정이천, 『주역』, 글항아리, 169쪽)고 했을까. 강건한 마음으로 무언가를 시작했는데 혹은 열정이 넘쳐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브레이크가 걸릴 때가 있다. 앞에 위험이 놓여있을 때다. 나는 오지 않는 손님을 기다리며, 초조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먹고 사는 문제, 개업과 동시에 폐업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 등 걱정이 끊이지 않았다. 마음이 급할 때 무리수를 두게 되지 않는가. 딱 그랬다. 갑자기 매장에 품목을 늘리고, 블로그에 무리하게 포스팅을 하고, 홍보가 덜 돼서 그렇다며 광고를 하고, 쇼핑몰을 만들어 진을 뺐다. 이렇게 하다보니 힘은 힘대로 드는데, 역효과는 역효과대로 났다. 품목이 늘어나니 재고가 늘어나고, 홍보 비용을 늘리다 보니 돈이 줄줄 샜다. 또 안 좋은 점이 있었는데, 남편과 가게에서 나누는 대화의 빈곤함이었다. ‘왜 손님이 안 오지’, ‘다른 매장도 마찬가지인가, 우리만 이런가’ 등 정답도 없는 이야기를 무의미하게 반복하고 있는 것이었다. 걱정은 걱정을 낳았고, 그렇게 풍선처럼 부풀어가기만 했다. 결국, 이러한 노파심으로 가게에 쌓인 것은 대책없이 들여놓은 물건들과 걱정 한아름이었다.

 

수천수괘의 효사들을 보면, 기다림 앞에서 다양한 태도를 보여준다. 위험과 멀찍이 떨어져 기본 윤리부터 설정하는 효가 있고, 위험으로 나아가 구설을 만들기는 하지만 중심을 잡아 끝내 길한 효가 있고, 스스로 위험을 자초하는 효가 있다. 나는 그중에서 초구효의 태도에 주목했다. ‘교외에서 기다리는 것이니 항상됨을 지키는 것이 이롭고 허물이 없다’(需于郊 利用恒 无咎)고 풀이한다. 수괘(需卦)는 이섭대천(利涉大川)을 위해 기다리는 것이다. 문왕이 은나라 주왕을 정벌하려고 하던 그때, 먼 곳(郊外)에서 때를 엿보며 기다리던 배경을 가지고 있다. 문왕의 혁명만큼 거시적인 것이 아닐지라도, 우리는 살면서 크고 작은 혁명을 시도한다. 녹록지 않은 그 길을 어떤 태도로 돌파할 것인지가 중요하지 않겠는가. 이때 초구효의 항심(恒心)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초구효는 교외(郊外)에 있기에 겪게 되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먼저, ‘항상됨을 지키는 것이 이롭다(利用恒)’고 했는데, 어떤 상황이 와도 유지할 수 있는 항상된 도를 마련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정이천은 이에 대해 ‘위험과 어려운 일을 범하면서 나아가지 않고 다시 자신이 자리한 곳에 마음을 편안히 하고 처하여 그 자리에 마땅한 상도를 잃지 않는다면 허물이 없다’(같은 책, 169쪽)고 좀 더 자세히 풀어주었다. 초구의 경우에는 나아가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도를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한데, 이것이 혁명의 출발이라는 뜻으로 보인다. 혁명을 이룬다는 것이 뭘까? 문왕이 은나라를 정벌하는 그 순간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주왕의 횡포를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다고 판단한 때부터, 계획하고, 준비하고, 훈련하며 기다리는 모든 과정을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초효는 혁명을 도모하면서도 지켜내야 하는 일상을 의미한다. 원대한 목표를 위해 일상을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일상을 지켰을 때 혁명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직접적인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정이천은 이를 항상되게 지켜야 할 도라 하여 상도(常道)라고 표현한다.

교외(郊外)에 있는 초구효가 겪게 되는 또 다른 측면을 보자. 구이효만 해도 물가(坎)에 가까이 가서 구설이 생기는 자리다. 구이효부터 점점 위험에 가까이 간다고 보면 된다. 반면 초구효는 물기(坎)가 미치지 않는 자리, 위험으로부터 가장 멀리 있는 자리다. 우리가 평상시에 위험을 자각하지 못할 때 생기는 게 뭘까? 게으름이다. 그래서 초구효는 쉽게 나태해질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이를 자각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일상적으로 지켜야 할 일을 만들어 스스로 고삐를 죄는 게 필요하다. 이것이 곧 항심을 지키는 방법이 되는 것이다.

나는 성급하게 움직이던 마음을 다잡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한 일이 영업 윤리를 세우는 것이었다. 먼저, 품목을 최소화했다. 선택과 집중이라는 전략으로 바꾼 것이다. 전략을 바꾸니 (시간은 좀 걸렸지만) 산만하던 가게는 자연스럽게 정리가 됐고, 오히려 손님이 더 안정적으로 찾아오게 됐다. 그리고, 지켜야 할 일상의 루틴을 만들었다. 사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날이 수두룩하다. 이런 날에는 퇴근할 때 허무함을 느끼기도 한다. 손님 없는 날이 반복되면, 차라리 하루 이틀 쉬어서 피로라도 풀 것이지 가게 문은 왜 열었나 싶을 때도 있다. 이처럼 느슨해지고 게을러지려고 할 때는 일상적으로 해야 할 일을 정하는 것이 좋다. 매일 출근을 해서 자리를 지키는 것도 ‘일’인 것이다. 출근을 해서 매일 청소를 하고, 재고 확인과 주문 리스트를 만들고, 정비 기술 영상을 한 개 이상 보고, 일주일에 3개의 포스팅을 하는 등 매일매일 해야 할 일을 만들었다.

 


그중 가장 주안점을 두었던 부분은 ‘태도’를 결정하는 일이었다. 손님이 오는 것과 매출에 신경을 쓰자, 일과 공부가 공존하는 공간으로 만들겠다는 포부는 어디로 갔는지 사라졌다. 처음에 가졌던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물론, 사업이 유지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다만, 매출에 일희일비하며 노심초사하는 것을 경계해야 했다. 매출이 적으면 적게 소비하며 살아가면 된다고 마음을 먹었다. 사실, 손님이 없으면 없는 대로 할 일은 많았다. 책도 읽어야 하고, 글도 써야 하고… 손님이 없으면 공부할 시간이 생겨서 좋고, 손님이 많으면 매출이 생겨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나는 혁명이라는 것이 대단한 이상 혹은 포부를 실현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에 찾아온 어려움을 걸림돌처럼 여겼다. 이것만 해결하면 모든 게 순조로워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짜 위험은 다른 데 있었다. 다른 삶을 살아보겠다고 했던 그 마음이 변질되는 것이다. 혁명을 도모할 때 크고 작은 위험은 생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위험은 초심을 잃는 것이다. 나는 새로운 삶을 살아보겠다고 뗀 첫걸음에서부터 사업이 잘못될까 노심초사하며 헛발질을 했는데, 이를 계기로 ‘혁명은 일상을 지키는 데서 시작된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글_성승현(감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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