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껑을 덮지 않은 예수의 우물
水風 井(수풍정) ䷯
井, 改邑, 不改井, 无喪无得, 往來井井, 汔至亦未繘井, 羸其甁, 凶.
정괘는 고을은 바꾸어도 우물은 바꿀 수 없으니, 잃는 것도 없고 얻는 것도 없으며, 오고 가는 이가 모두 우물물을 마신다. 거의 이르렀는데도 두레박줄이 우물에 닿지 못한 것과 같으니 두레박이 깨지면 흉하다.
初六, 井泥不食, 舊井无禽.
초육효, 우물에 진흙이 있어 아무도 먹지 않는다. 오래된 우물에는 짐승들도 찾아오지 않는다.
九二, 井谷, 射鮒, 甕敝漏.
구이효, 골짜기와 같은 우물이라서 두꺼비에게만 흐르고 항아리가 깨져서 물이 샌다.
九三, 井渫不食, 爲我心惻, 可用汲, 王明, 並受其福.
구삼효, 우물 바닥을 파내어 물이 깨끗한데도 사람들이 먹지 않으니 내 마음이 슬프다. 끌어올려 쓸 수 있으니 구오의 군주가 현명하면 모두 함께 그 복을 받는다.
六四, 井甃, 无咎.
육사효, 우물에 벽돌을 쌓으면 허물이 없으리라.
九五, 井洌, 寒泉食.
구오효, 우물물이 맑으니 시원한 샘물을 마신다.
上六, 井收勿幕, 有孚, 元吉.
상육효, 우물물을 긷고서 장막으로 뚜껑을 덮지 않으니 오래 유지되는 믿음이 있어 매우 좋고 길하다.
성경 요한복음을 대표하는 장면 중 하나. 선지자로서 본격적인 설교를 시작하며 이곳저곳을 다니던 예수는 사마리아 지방을 지나가게 되고, 우물가에서 잠시 쉬게 된다. 거기서 사마리아 여인 한 명을 마주친다. 높은 기온 때문에 한낮에는 활동을 자제하는 것이 그 지역의 풍속이건만, 어쩐지 그녀는 사람들을 피해 정오의 우물가에 홀로 물을 길으러 왔다. 범상치 않은 그녀의 내력을 줄줄이 읊어 내리는 예수. 이 사마리아 여인은 무려 다섯 번의 결혼을 했었고, 지금은 여섯 번째 남자와 동거 중이다. 여기서 예수가 그녀에게 건넨 말이 바로 그 유명한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1)”는 말씀이다. 여기서 예수가 주는 물은 진리를 품은 말씀을 뜻한다. 주역의 수풍정 괘 또한 요한복음과 아주 비슷한 방식으로 우물에 빗대어 진리를 말한다. 이 괘는 우물에 대한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는데, 정(井)이라는 한자 자체도 우물의 맨 아래에 나란히 놓인 나무판자 모양에서 나온 것이다. 효사와 괘사도 우물과 관련된 문장들이 쭉 이어진다. 요한복음의 예수 역시 설교 장소인 우물과 어쩐지 딱 맞아떨어지는 비유와 상징으로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을 건넨다. ‘우물’이라는 소재 하나로 묶이는 수풍정 괘와 요한복음. 이렇게 서로 다른 문명의 고전들이 한 접점에서 딱 만나는 것만 같은 테마를 접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아주 흥미로운 대목이다.
내가 유달리 수풍정 괘를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서 비롯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늘 읽을 때마다 새롭게 다가오는 성경의 우물가 일화, 그리고 이 장면과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는 주역 수풍정 괘라니! 만약 수풍정 괘를 가지고 글을 쓰게 된다면 당연히 차가운 물을 들이켜는 것으로 깨닫는 순간의 통쾌함을 묘사한 구오효(井洌, 寒泉食)를 쓰고 싶었다. 뜨거운 여름에 벌컥벌컥 마시는 냉수의 시원짜릿함을 진리에 빗대어 말하는 기가 막힌 매칭이 참 좋았다. 그러나 글을 쓰면서 정작 내게 더 깊은 생각과 암시를 줬던 것은 놀랍게도 상육효였다. 상육효만이 가진 독특한 미션이 하나 있는데, 바로 우물의 뚜껑을 닫지 않는 것(井收勿幕‧정수물막)이다. 뚜껑을 덮지 않는 것이라? 왜 수풍정 괘의 끝자락에서 이런 당부를 남기는 것일까? 왜 우물은 열려있어야만 할까?
처음 예수를 대면했을 때 사마리아 여인은 자기 삶의 문제 때문에 비틀거리고 있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몇 번째 남자와 살고 있는지를 정확히 맞추는 예수를 보고 보통 사람이 아닐 것이라 짐작한 그녀, 예수에게 질문을 던진다. 신기한 것은 다른 것도 아니고 “예배”에 관해 유독 꼬치꼬치 캐묻는다는 점이다. “당신들(유대인)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하는데, 그 말이 진짜입니까? 우리가 예배드릴 곳은 정말로 예루살렘밖에 없습니까?2)” 왜 그녀는 하필 예배에 대해 예수께 질문했을까? 당시 사마리아 민족은 유대 민족과 갈라지며 예루살렘에서 예배할 권리가 금지되었다. 이 말은 단순히 일요일 아침에 출석할 교회가 사라졌다는 것이 아니라, 신 앞에 나아가 자신을 비춰보고 경건한 삶을 유지해나갈 수 있는 민족적 전통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는 뜻이다. 이스라엘의 백성은 매주 성전으로 가서 대제사장들이 전하는 신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삶을 갈무리하고 공동체의 윤리와 신의 율법을 마음속 깊이 새기며 다시 일주일을 시작한다. 예배를 할 수 없다는 것은 사마리아인들에게 이 모든 과정에 참여할 일상적인 구도의 통로가 닫혔다는 의미다.
수풍정 괘의 상육효는 “오래도록 지속하여 변하지 않는3)” 믿음(有孚)을 우물의 핵심으로 꼽는다. 이 믿음이 품은 영속성과 항상성은 우물물을 먹는 자를 가리지 않는 무한한 보편성, 뚜껑을 절대 닫지 않는 열려있음에 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우물은 특정한 집단을 위한 우물로 변질되어 버렸고, 이로 인해 사마리아에게 우물의 맥은 끊겼다. 이것은 유대 민족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유대 민족만을 먹일 수 있는 우물은 진정한 우물이 될 수 없다. 즉 유대와 사마리아 둘 다 우물의 진정한 믿음을 잃어버린 셈이었다. 사마리아인에게 닫혀있는 유대만의 우물은 모든 이들을 품을 수 있는 우물이 아니다. 어떤 구분 없이 오고 가는 누구나에게 마땅히 물을 건네줄 수 있고, 그 덕목을 지속하여 변하지 않는 것. 이것이 상육효가 정수물막(井收勿幕)에 이어서 말하는, 우물의 믿음이 있어야 크게 길한 유부원길(有孚元吉)이다.
예수에게 “주여, (영원히 마르지 않는)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게 하옵소서4)”라고 요청하는 사마리아 여인. 그녀는 단순히 목이 말랐던 게 아니었다. 내 삶은 왜 이럴까? 예루살렘에 가지 못해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 없는 지금, 누가 나를 위해 새로운 길을 알려줄 수 있단 말인가? 이 번민과 고통을 해결하지 못한 채 그녀는 매일 뜨거운 정오에 우물물을 뜨러 갔을 것이다. 마을의 소통 창구인 우물가조차 떳떳이 나가지 못하고 사람들을 의식하며 피하는 마음, 남편이 계속 바뀌고 떠나가며 도저히 갈피를 못 잡고 헤매는 안개 같은 삶. 그녀야말로 예배에 갈급하고, 진리에 주리고, 지혜가 고픈 사람이었다. 이제 예수는 그녀에게, 그리고 사마리아인 모두에게 기꺼이 닫히지 않은 우물이 되어 준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5)”
신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자신을 온전히 돌아보는 예배를 원했던 그녀에게 예수의 말은 혁명적인 것이었다. 예루살렘도 아닌, 어느 곳에서든 예배할 때가 온다고. 게다가 이 선포는 사마리아와 가장 적대적인 유대 민족 출신의 선지자 예수가 보증하는 것이었다. 서로 으르렁거리며 척을 지고 있던 이들에게 이전과는 다른 방식의 화합이 가능해지는 지점이다. 예수가 나타나기 전에 그들은 예루살렘이라는 우물에서만 생수를 맛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예루살렘을 차지한 유대인만이 진리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던 사마리아인들은 유대를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예수의 선언이야말로 우물의 뚜껑을 열어 보인 정수물막(井收勿幕)을 그대로 실천한 것이었다.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어디서든 예배할 수 있다는 것! 수풍정 괘 괘사의 말씀처럼 오가는 사람들 모두가 우물물을 먹는 기쁨을 누리게 하면(往來井井)서 “우물의 도를 완성한 것6)”이다. 이제 우물은 어디서든 생겨나고 사람들을 먹일 수 있게 된다. 언제든, 어디서든 진리와 접속할 수 있다! 믿는 자들 각자가 자신이 선 자리에서 예배자가 되고 성전이 되고 마침내 뚜껑을 닫지 않는, 영원히 열린 우물이 됨으로써 말이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신약(새로운 언약)이 예수를 통해 새롭게 열어젖힌 우물이었다.
사마리아 여인은 그 말을 듣고 기쁨에 차서 물동이를 내던지고 동네로 달려간다. 예수가 민족과 출신지에 따라 뚜껑을 닫아버리지 않고 진리의 우물을 열어 보여주었듯, 사마리아 여인 또한 이 말씀을 나누기 위해 자신처럼 진리의 갈급함에 시달리고 있을 동네 사람들에게 외친다. 와서 보라, 자신이 어떤 말을 들었는지를! 그녀가 예수를 닮아 열린 우물로 새롭게 탄생하는 순간이다. 기뻐서 동네를 휘젓는 여인의 모습을 읽을 때마다 그녀의 벅참이 오롯이 느껴진다. 성경의 이 장면은 두레박으로 길어 올린 우물물이 멀리멀리 퍼져나가 우물의 덕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 순간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만 같다. 진리를 맛본 자는 기꺼이 달려나가 진리를 나누고 먹는 자들을 구분하지 않는 미덕으로 우물의 도를 이루어나간다. 그래서 상육효에 비춰보면, 예수의 선포와 사마리아 여인의 달려나감은 더욱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우물물을 혼자서만 맛있게 맛보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향함으로써 실현되는 진리의 무한한 흐름. 성경과 주역, 이 두 가지의 교차가 바로 이 지점을 정확히 통과하고 있다는 것이 경이로울 뿐이다. 수풍정 괘는 상육효의 뚜껑을 덮지 않은 열린 우물을 보여주며 주역을 공부하는 모든 이들에게 묻는다. 당신의 우물은 열려있습니까?
글_오찬영(감이당)
1)요한복음 4장 14절
2)요한복음 4장 20절-21절
3)정이천, 주역, 글항아리, 967쪽
4)요한복음 4장 15절
5)요한복음 4장 21절
6)정이천, 주역, 글항아리, 9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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