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오공의 구법의 길, 겸손의 길
地山謙(지산겸)䷎
謙, 亨, 君子有終.
겸괘는 형통하니 군자는 끝마침이 있다.
初六, 謙謙君子, 用涉大川, 吉.
초육효, 겸손하고 겸손한 군자이니 그를 등용해서 큰 강을 건너더라도 길하다.
六二, 鳴謙, 貞, 吉.
육이효, 겸손함이 드러나니, 올바르고 길하다.
九三, 勞謙, 君子有終, 吉
구삼효, 공로가 있는데도 겸손함이니, 군자는 끝마침이 있어 길하다.
六四, 无不利撝謙.
육사효, 겸손함을 발휘하는데 이롭지 않음이 없다.
六五, 不富以其隣, 利用侵伐, 无不利.
육오효, 부유하지 않아도 이웃을 얻으니 무력으로 치는 것이 이로우며 이롭지 않음이 없다.
上六, 鳴謙, 利用行師, 征邑國.
상육효, 겸손함을 드러내는 것이니 군사를 움직여 자신이 다스리는 곳을 단속함이 이롭다.
세상을 한바탕 소란스럽게 한 원숭이가 있었다. 무소불위의 힘과 신통술로 육해공을 넘나들며 행패를 부리더니 하늘나라 옥황상제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말썽을 부린 자, 바로 서유기의 주인공 손오공이다. 이 힘세고 오만한 원숭이는 그러나 부처님의 한 뼘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해 오행산에 깔린 채 500년을 지낸다. 하늘 높은 줄 모르는 한 존재의 교만을 천지자연 오행의 이치로 눌러 다스린 것! 그렇게라도 성찰하고 참회해 오만을 내려놓도록 말이다.
주역에서 겸손을 이야기하는 지산겸(地山謙)괘는 산이 땅 아래에 자신을 낮추고 있는 모습이다. 산이란 모름지기 땅 위에 우뚝 솟아 있는 법인데 땅 아래 산이 있다는 건 자신을 지극히 겸허하게 낮춘다는 의미다. 정이천은 ‘자신이 덕이 있으면서도 그 덕에 대한 인정과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을 겸손’이라고 했다. (정이천, 「주역」 346쪽, 글항아리) 자신이 갖춘 게 무엇이라도 그것을 내세우며 외부의 인정을 바라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라면 누구나 ‘나’를 세우는 순간 ‘나’를 중심으로 하는 의식적, 무의식적 아만(我慢)이 고개를 내민다. 여기에 능력과 성취 등 뭐 작은 것이라도 하나 얹히면 자만심이 올라오는 건 순식간이다.
자만이란 마음이 자기 자신으로 꽉 차 있는 상태다. 겸괘의 단전에선 인간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귀신들도 가득 찬 것을 해치고 미워하며 겸손한 것에 복을 준다고 말한다. (鬼神害盈而福謙 人道惡盈而好謙) 천지자연의 이치도 마찬가지. 해가 중천에 있으면 곧 기울어 버리고, 달도 차는가 싶으면 곧 스러지듯 하늘과 땅도 가득 찬 것을 덜어내어 겸손한 데로 흐르게 한다. (天道虧盈而益謙 地道變盈而流謙) 그러니까 주역에서 말하는 겸손의 이치란 한 순간도 가득 차 있는 채로 머물게 하지 않는 것이다. 전부 다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고 붙잡아 채우려는 마음,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그런 상태는 오직 ‘나’로만 환원되어 버린다. 그리고 그렇게 ‘나’를 내세우는 오만의 극단이 산 아래 납작하게 깔린 손오공의 마음이었다. 하여 손오공이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며 서역으로 경전을 구하러 가는 삼장법사의 제자가 되고 성심껏 수행을 하겠다는 마음을 내었을 때, 그건 자만을 내려놓고 세상에 대한 겸허함을 배우겠다는 발심이기도 했다. 구법의 길, 수행의 길이라는 것은 ‘나’와 ‘나의 소유’로 가득한 자만을 내려놓는 과정이면서 동시에 세상 모든 것의 인연과 도움으로 나도 존재함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과정이기도 하니 말이다. 그럼 오만방자하던 손오공은 10만 8천리 길을 가며 겸손의 덕을 지니게 되었을까?!
뛰어난 능력을 지닌 손오공은 근두운을 타고 여의봉을 휘두르고 72가지 변신술을 펼치며 서역으로 가는 길에서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매번 큰 공로를 세운다. 그야말로 ‘멋진 손오공’이다. 겸괘에도 능력을 지녀 단연 튀는 효가 있는데 바로 구삼이다. 구삼효는 만약 손오공이 수많은 공을 세우면서도 겸허할 수 있다면 어떤 모습일지를 보여준다. 한 번 보자. 구삼은 다섯 개의 음효와 함께 있는 유일한 양효이니 일단 돋보인다. 게다가 양(陽)으로써 양의 자리에 정(正)하게 위치해 있어 강건하다. 그뿐인가. 자신이 보필해야 할 위의 상육과도 호흡을 맞추고 다른 음효들과도 잘 어울리며 리드하고 있으니 ‘멋진 구삼’이다. 마치 삼장을 모시면서 저팔계와 사오정의 형님 노릇을 하는 손오공 같다. 그러나 구삼이 자신을 뽐내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구삼은 하체인 간(艮)괘에서 가장 위에 있는 양효로서 우쭐할 수 있지만 오히려 세 개의 음효인 상체아래 자신을 낮추고 있다. 힘이 있으나 그 힘을 함부로 과시하지 않고 자신의 위치에서 해야 할 일을 열심히 하며 공로를 세우고도 겸허하게 있는 모습. 구삼의 효사가 말하는 ‘노겸(勞謙)’이다.
그러나 애써 공로를 세우고도 그걸 내세우지 않는 마음을 갖기란 쉽지 않다. 조금이라도 인정받고픈 마음이 꿈틀거린다. 그렇지 못하면 속상하고 서운한 법. 손오공은 삼장을 보호하기 위해 요괴들과 싸우고 도적들을 죽이는데 손오공의 폭력적 해결방식을 인정하지 않는 삼장은 손오공을 질책하며 내쫒아 버린다. 애써 노력했건만 자신을 몰라주는 삼장이 야속해 손오공은 서럽게 울기도 하고, 자기 마음 속 번뇌의 현현인 요괴 ‘가짜 손오공’과 격렬하게 싸우기도 한다. 우리가 ‘나’를 내세울 때 ‘나’의 자존심을 생채기내는 모든 것은 불쾌와 분노의 대상이 된다. 나, 나의 것, 나의 소유를 외부와 분명하게 경계 지을 때 경계 밖과 구분되는 자의식은 더욱 견고하게 될 수밖에 없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 라는 자의식이 산처럼 쌓여, 그런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는다면 불쾌와 분노가 일어나고 말이다. 그럼 이런 자기중심적 오만을 내세우지 않고 그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겸허하게 낮춘다는 건 어떤 것일까?
겸괘의 괘사와 구삼효에는 ‘군자는 끝마침이 있어서 길하다’는 의미의 ‘군자유종(君子有終)’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끝마침이 있다는 것은 시작이 있다는 뜻이다. 즉, 겸손함의 미덕을 갖춘 군자라면 어떤 상황에서든 시종일관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자세를 견지하고 그럼으로써 덕을 완성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손오공은 처음에 겸허하게 발심하여 삼장을 따라 구법의 길을 가겠다는 마음을 내지만 중간 중간 고난을 맞이하며 이 마음이 위기에 처한다. 자기는 더 이상 못하겠다며 스스로 내빼기도 하고, 삼장에게 쫓겨나기도 하고. 그러나 중요한 것은 손오공이 14년 구법의 길을 결국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간다는 것이다. 무려 81개나 되는 고난을 통과하면서 말이다. 이때 종종 반복되는 장면이 하나 있다. 하나의 고난이 끝날 때면 삼장과 제자들에게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은 그 공로를 치하하며 좀 더 머물러 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들은 결코 머물지 않고 바로 그 다음 길을 떠난다. 뿐만 아니라 금은보화를 보시하며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해도 손사래를 치며 거절한다. 공로에 머물지 않고 공로의 대가를 소유하지 않는 것! 어쩌면 바로 이런 것이 일순간이라도 마음에 차오르려는 자의식과 자만을 내려놓는 수행의 길이 아닐까? ‘나’라는 중심에서 벗어나 모든 존재가 서로 의지하고 연결되어 있다는 자각 속에선 나만의 공로로 치하 받을 것도 없고 대가를 바랄 것도 없으니 말이다.
목적지인 영취산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 삼장이 제자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자 손오공은 이렇게 대답한다. “사부님이나 저희나 모두 감사할 필요 없습니다. 서로가 모두 돕고 의지한 것이니까요. 저희들은 사부님 덕분에 해탈하고 불문을 통해 공을 닦아 다행히 정과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사부님께서도 저희들의 보호를 받아 불법의 가르침을 지켜 다행히 세속의 태를 벗게 되셨습니다.” (오승은 「서유기」 10권 212쪽, 솔출판사) 자신이 이루었다고 생각한 공덕을 내려놓을 수 있는 마음에는 그 공덕이 내가 잘나서, 나만의 힘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겸손이 있다. 내가 그렇게 이룰 수 있게 한 수 많은 인연과 조건이 있다는 것을 알면 나를 내세울 것이 없다. 그저 내가 처한 상황에서 올바른 것에 최선을 다할 뿐! 최선을 다하되 그 공을 내게 돌리지 않는다. 공이란 나의 것도, 나의 소유도 아니다. 손오공의 말마따나 모두가 돕고 의지한 것이기 때문이다.
겸괘를 이루는 땅(地)과 산(山)은 사실 다르지 않다. 산 역시 흙으로 돌로 나무로 여러 자연 조건으로 구성된 넓은 땅의 일부이다. 계속 움직이고 변화하는 땅의 일부가 융기하면 산이 되고 산이 스러지면 다시 땅이 된다. 어느 날 흙이 높은 산을 이루었다고 거만할 이유가 있겠는가? 그러고 보면 손오공도 애초에 하늘과 땅, 해와 달의 오묘한 기운이 조합된 돌에서 태어난 존재다. 살아있는 어떤 존재가 그렇지 않겠는가. 겸손이란 모든 존재가 서로에게 의지하여 연결되어 있다는 통찰이 있을 때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미덕이다. ‘멋진 손오공’이 겸괘의 ‘멋진 구삼’이 되는 건 기나긴 구법의 길에서 끊임없는 마음 수행 속에 자신을 낮출 수 있을 때이다. 구삼의 군자가 끝까지 겸허의 유종(有終)을 지켰다면 손오공은 비록 좌충우돌이긴 하나 나름의 유종(有終)을 이룬 것이 아닐까? 10만 8천리 오랜 여정 끝에 정과를 이룬 손오공에게 구법이란 자신을 낮추고 내려놓는 겸손의 덕을 닦는 길이 아니었을까?
글_이윤지(감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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