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불 꺼주는 맥문동
풍미화(감이당 대중지성)
생맥산에 들어있다고 해서 여름에 오미자만큼 찾는 이가 많다는 맥문동. 그러나 집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약재는 아니다. 여름철 무더위에 땀을 많이 흘려서 몸에 진액이 부족해지기 쉬운 계절이나 되어야 한 번 구경할까 말까다. 그것도 가족들 건강 챙기는 일에 부지런한 누군가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아쉽게도 내 주변에는 아직 그런 누군가가 없다. ^^; 그러니 내가 챙겨야 한다.
맥문동은 좀 귀엽게 생겼다. 열매 같기도 하고 애벌레 같기도 하고. 그런데 이놈은 완전히 진액덩어리다. 이놈이 들어와서 우리 몸의 윤활유 역할을 제대로 해준다고 할까? 그래서 더 귀엽게 보이는지도^^
맥문동이란 녀석을 구해서 들여다보니 생김새만 보고는 열매인지 뿌리인지 판단하기가 모호하다. 이 녀석은 땅콩만 한 크기에 쪼글쪼글한 주름이 있는 반투명한 몸을 가지고 있다. 노르스름한 몸 빛깔에 끝부분이 뾰족한 것도 있고 통통한 것도 있는데, 아무리 봐도 속에 씨가 들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럼 열매는 아니고 무슨 뿌리인가? 뿌리가 뭐 이렇게 몽땅몽땅하게 생겼나? 뿌리를 모양 나게 칼로 깍은 것 같지는 않고... 뭔가를 찍 잡아당겨서 끊어낸 모양 같기도 하고, 그것 참 궁금증 유발하게 하는 생김새다. 그래서 맥문동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았다~.
알고 보니 가까운 곳에
맥문동(麥門冬)이라는 이름의 유래부터 알아보자. 맥문동은 뿌리가 보리(보리 맥麥)와 비슷하고, 잎은 차조(차조 문虋을 쓰기도 하는데, 같은 소리가 나는 문 문門을 쓴다)와 비슷하며, 겨울(겨울 동冬)에 얼어 죽지 않고 살아남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뿌리를 음식 대신 먹을 수도 있기 때문에 여랑(餘粮)이라고도 하였다.
요게 맥문동 열매다. 조그만 알갱이들이 오돌도돌 모여 있는 게 참 신기하다.
맥문동은 산과 들에 사는 겨우살이 풀이다. 줄기는 없고 짤막한 뿌리줄기로부터 난초잎과 같은 생김새를 가진 잎이 밑에서 무더기로 난다. 잎 사이로부터 기다란 꽃대가 자라나서 그 끝에 작은 꽃이 이삭모양으로 뭉쳐진다. 5~6월에 연한 자주색 꽃이 피고, 꽃이 지고 난 뒤에는 둥근 열매가 생기고 그 열매는 익어감에 따라 검은 빛을 띤 짙은 보랏빛으로 물든다. 뿌리줄기는 굵고 딱딱하며, 수염뿌리의 끝이 땅콩처럼 굵어진다. 흔히 우리가 맥문동이라 알고 있는 부위가 바로 이 굵어진 수염뿌리다. 맥문동의 생김새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
맥문동은 예로부터 ‘신선의 약재’, ‘신선의 음식’이라 불렸다. 음식 대신 먹을 수도 있다니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그래서 먹어봤다. 단단하게 말린 망고를 씹는 느낌이랄까? 씹을 때 느껴지는 식감이 그렇다는 뜻이다. 망고는 씹을수록 어금니 틈에 끼어들다가 목구멍으로 넘겨진다면, 맥문동은 쫀득한 느낌이면서도 씹을수록 목구멍까지 도달하기 전에 입안에서 녹아 없어진다고나 할까? 암튼 뭔가를 남기지 않고 몸에 흡수된다는 생각이 든다. 궁금하면 직접 먹어 보시라.^^
맥문동은 살짝 덜 볶인 땅콩을 씹을 때처럼 약간 비릿하면서도 고소하며 먹고 난 다음에 약간 쓴맛과 단맛이 함께 남는다. 그리고 시간이 더 지나니 입안이 윤택해진다. 뭐랄까, 침은 침인데 걸쭉한 농도가 생긴 느낌이다. 묽은 가래 같이 뭔가가 뭉친 느낌이 아니라, 에센스 같은 것이 농축된 그런 윤활유 같은 느낌이다. 그냥 먹을 수도 있고 물에 끓여서 차로 마셔도 좋다니 가스레인지 위에 주전자를 올려놓고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일 아닌가? 약재가 물에 잠겨 조금씩 우러나는 동안 혹시 사진에서 본 맥문동을 발견할지 모른다는 기대감을 갖고 산책에 나섰다. 그리고 몇 걸음 못가서 발견하고 말았다. 집 주변 가로수 아래에 잔뜩 심겨진 난초 같은 풀이 몽땅 맥문동이었다는 사실을!
갈증 나고 지치면 마셔~
집 근처에 널린 게 맥문동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맥문동이 갑자기 친숙하게 느껴졌다. 가까운 곳에 강아지풀이나 토끼풀보다도 맥문동이 더 많았다니 놀랍다. 맥문동은 꽃과 열매, 잎이 모두 아름답고 겨울에도 푸르름을 잃지 않기 때문에 관상용으로 많이 심는다. 약재로는 주로 봄·가을에 캐서 껍질을 벗긴 뒤 햇빛에 말려 사용한다. 여름 내내 수염뿌리가 굵어지면 가을에 캐서 사용하고 겨울 내내 수염뿌리가 굵어지면 봄에 캐서 사용한다. 연중 두 번이나 약재를 채취한다는 것은 약재가 가지는 기운이 풍요롭기 때문인 것 같다.
진은 맑은 것, 액은 끈끈한 것을 의미한다. 요 두 가지 있어야 몸이 삐걱대지 않고 제대로 굴러간다.
여름에는 강수량이 풍부하니 넉넉한 물기운을 머금게 된다. 가을이 되면서 물기운이 뿌리에 갈무리되면 채취하여 겨울의 건조함을 이겨낼 힘을 내는데 사용할 수 있다. 겨울에는 추위를 품고 견뎌낸 맥문동의 기운이 역시 뿌리에 모여들게 된다. 그래서 봄이 되면 따뜻해진 날씨 때문에 뿌리가 가진 서늘한 힘이 약해지기 전에 채취하여 여름의 더위를 이겨낼 힘을 내는데 쓰게 되는 것이다. 여름과 겨울이라는 극한 계절이 갖는 고유한 특성을 점성이 강한 진액 덩어리로 수염뿌리에 갈무리한 것을 어떻게 알고 캐서 먹는지 신기할 뿐이다.
맥문동의 효능은 고대문헌에도 기록되어 있다.『신농본초경』에는 "맥문동을 오래 복용하면 몸이 가벼워지고 장수할 수 있으며 양식이 떨어지더라도 굶주림을 느끼지 않는다"고 기록돼 있다. 맥문동의 약성은 서늘하며 맛은 달다. 단맛은 기본적으로 장부를 보하는 기능을 한다. 맥문동은 양식 대신 먹을 수도 있고, 먹어보면 찌꺼기를 남기지 않고 흡수되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오래 먹으면 신선처럼 장수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주장에 동의할 수 있다.
생맥산(生脈散)은 맥문동, 인삼, 오미자를 물에 달여서 여름에 물 대신 마시는 음료로『동의보감』에 의하면 "사람의 기(氣)를 도우며 심장의 열을 내리게 하고 폐를 깨끗하게 하는 효능이 있다"고 한다. 맥문동을 끓여서 유리잔에 따르면 약간 뿌연 느낌의 연한 담황색 차가 되었음을 볼 수 있다. 보리차나 녹차처럼 맑지가 않다. 끓여도 생으로 먹었을 때의 느낌처럼 농도가 짙다는 생각이 든다. 맥문동을 많이 넣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맥문동 자체의 성질이 농축된 진액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맛은 둥굴레차랑 비슷하게 구수하지만, 느낌은 훨씬 가볍다. 몸을 살짝 가볍게 하는 느낌이랄까.
맥문동을 먹으면 이렇게 몸이 가벼워질 수 있는 것일까? 배둘레햄이 몸을 완전히 장악한 나에게 맥문동은 신의 약초로 보인다. 어쩌면 좋을까^^
맥문동에 풍부한 진액은 몸에 들어와서 땀으로 인한 건조함을 보충해주고, 맥문동의 서늘한 성질이 뜨거워진 심장의 열을 식혀준다. 심장이 과도하게 열을 받으면 혈을 데우고, 뜨거워진 혈이 폐로 들어가서 도는 동안 폐장에도 민폐(!)를 끼치게 된다. 폐는 위쪽에서 심장을 감싸고 있으면서 심장에서 쉼 없이 올려보내는 탁한 피를 재생시키는 일을 한다. 그래서 심장과는 겉과 속처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심장의 열기가 혈을 통해 계속해서 폐에 영향을 끼치게 되면 폐도 뜨거워진다. 그러면 폐기가 위로 떠서 기가 상역하게 되는데, 이게 마른기침이다. 기계에 윤활유가 없이 계속 돌아가야 한다면 어떤 일이 생기겠는가? 마찰 때문에 더욱 열이 나서 수명이 줄어들 것이다.
우리 몸도 마찬가지다. 몸에 진액이 부족해지면 열기가 더욱 극성하게 되어 기(氣)뿐만 아니라 혈까지 끌고 역상하는데, 이것이 토혈(吐血)이다. 힘든 일을 많이 하면 진액이 마른다. 힘든 일은 양적인 기운뿐만 아니라 음적인 진액도 함께 고갈시키기 때문이다. 기운도 진액도 빠져나가면 내장이 쪼그라들면서 위험신호를 보낸다. 그 신호란 것이 열이다. 이 열로 인해서 생기는 번열과 소갈증을 맥문동으로 치료할 수 있다. 이는 맥문동이 갖는 진액 생성 능력과 열을 식히는 서늘한 성질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러니 지치고 갈증 나면 맥문동을 끓여서 마셔보라. 맥문동은 그냥 수분만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그 수분을 살짝 코팅해서 오래가게 해줄 것이다. 왜냐? 맥문동은 쫌 끈끈하니까.
심화를 가라앉혀 주는 쿨한 약재
위에서 맥문동이 심화를 식히고 폐기를 깨끗하게 한다고 했다. 여기 하나의 임상 사례가 전해지고 있으니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보자. 맥문동을 음료수 대용으로만 가볍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심각한 병을 고치는 중요한 약재로도 기억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옮겨보았다.
유공원은 가족들 사이의 불화로 인해 심화가 심해졌는데, 답답한 마음을 술로 달래려다 오히려 심화를 더욱 치성하게 만들고 말았다. 술은 물의 형태를 가진 불인데 말이다. 청심연자음은 심화를 끄는 대표처방 가운데 하나이다. 이 처방은 뜨거운 심화가 위로 올라가서 입이 마르고 갈증이 심하며 소변의 색깔이 붉고 잘 나오지 않는 증상을 다스린다. 연자, 복령, 인삼, 황기, 황금, 차전자, 맥문동, 지골피, 감초가 들어간다. 이중에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약재는 인삼, 황기, 맥문동 밖에 없지만, 대략적인 약의 성격을 추측할 수는 있다. 인삼과 황기는 달고 따뜻해서 비위의 기능을 살려주어 기를 보강해준다. 연자, 차전자, 지골피는 찬 성질의 약재들이라 심화를 식힐 것이고, 황금도 찬 약재이긴 한데 폐화를 주로 식힌다. 찬 성질을 가진 약재라도 식히는 장부는 각기 다른 것이다. 소변이 나오지 않는 증상은 복령이 해결해줄 것이다. 복령은 물을 잘 소통시키는 약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약방의 감초는 이 모든 약재들을 무리 없이 조화시켜줄 것이다. 방금 설명한 맥문동은 성질이 서늘해서 심화를 식히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진액을 생성하는 일을 주로 맡는다. 심화로 인해 진액이 부족해졌기 때문에 맥문동은 빠질 수 없는 약이다. 열불 날 때, 맥문동을 기억하라!
세상일은 만사가 마음대로 되지 않는 법! 우리를 열불나게 만드는 게 아무리 많아도, 폭발할 것 같아도 한 가지는 잊지 말자! 맥문동! 수행으로 마음으로 집에서 끓여보자. 광명의 나날들이 찾아올지도!
맥문동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아마도 모든 약재는 산이나 들이나 물가와 같은 자연의 어느 한 모퉁이에 예전부터 그렇게 존재했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그냥 지나친다. 마치 몸이 저절로 움직여서 우리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것처럼! 하지만 병이 생기면 세상 모든 것이 달리 보인다. 맥문동 또한 우리에게 그런 약재는 아닐까. 평소에는 길가의 나무 그림자 속에 숨어있는 한 줌 들풀일 뿐이지만, 열불 나는 세상에서 내 몸의 열을 꺼줄 수 있는 119 소방수, 맥문동을 기억해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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