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양명의 마이너리티 리포트 - 슬기로운 유배생활
3부. 슬기로운 유배생활(2) - 용장대오? 용장생활백서
하학으로서의 격물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청소하고 응대하는 것이 바로 하나의 물(物)이다. 어린아이의 양지가 단지 그 정도에 도달한 상태라면 청소하고 응대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바로 그의 한 점 양지를 실현하게 하는 것이다. 또 만약 어린아이가 선생과 어른을 경외할 줄 안다면, 이것도 역시 그의 양지이다. 그러므로 비록 놀고 있는 중이라도 선생과 어른을 보면 곧 읍하고 공경한다면 이것은 그가 격물할 수 있어서 선생과 어른을 보면 공경하는 양지를 실현한 것이다. 어린아이는 스스로 어린아이의 격물치지가 있다.
또 말씀하셨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격물은 어린아이로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똑같은 공부이다. 다만 성인의 격물은 더욱 숙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다지 힘들일 필요가 없을 뿐이다. 이러한 격물은 비록 땔나무를 파는 사람이라도 역시 할 수 있으며, 비록 공경대부로부터 천자에 이른다 하더라도 모두 그와 같이 하는 것이다.
(<전습록>, 319조목 | 문맥 및 글의 논의를 고려해 약간 윤문)
격자화. 그러니까 격물이란 늘 보던 것을 늘 보던 바와는 다르게 보는 것입니다. 본다라는 말도 오해될 수 있으니, 다르게 겪는다고 말하는 게 나을지 모르겠습니다. 요컨대 격물이란 실천(실행, 작동)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냥 가만히 있어도 세상을 다르게 겪게 되는 건 아닙니다. 격물 ‘해야’ 다르게 겪게 됩니다. 다시 말해 격물은 이미지상 수동적으로 격물 ‘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격물 ‘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오해를 무릅쓰고 말해놓자면, 우리는 하루 하루 다르게 겪고자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저는 양명학에는 오직 하학이 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하학이란 물 긷고, 청소하고, 밥 짓는 등의 가장 원초적이면서 가장 일상적인 삶의 행위들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오직 하학이 있을 뿐인 양명학은 용장에서 양명이 깨달은 <대학>의 격물설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계를 격자화하여(낯설게하기) 마주친다는 격물설은 곧 양명학적 사유의 격자(프레임)이기 때문입니다.
<대학>에는 격물을 포함하여 총 여덟가지의 큰배움(大學) 비전 실현 조목이 제시됩니다. 그 여덟가지란 천하를 평안하게 하는 것(평천하), 나라를 다스리는 것(치국), 씨족내 가문의 질서를 이루는 것(제가), 자기 관점을 가진 주체가 되는 것(수신),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정심), 생각을 정성스럽게 하는 것(성의), 앎을 분명하게 꿰뚫는 것(치지), 마주치는 세계를 격자화하는 것(격물)입니다. 얼핏 일견된 말로만 봐도 알 수 있지만, 천하라느니 나라 등의 경우로부터 생각이나 마음의 경우까지 다양한데 저마다 지향이 뚜렷합니다.
하지만 저마다 지향이 뚜렷한 것처럼 보여도 결국 이 여덟 가지가 가리키는 방향(?)은 ‘큰배움(대학)’이라는 목표의 실현이라는 점에서 일치합니다. 다시 말해 천하를 평안하게 하는 일(평천하)이나 마주치는 세계를 격자화하는 일(격물)이나 모두 <대학>의 실현태입니다. 다만 현실에서 천하의 일을 주관할 기회를 가질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격물은 누구나 겪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양명의 말을 조금 비틀어서 <대학>의 여덟 조목(팔조목)을 엮어본다면, <대학>은 결국 ‘격물’이 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격물은 누구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용한 대목을 보시기 바랍니다. 양명은 어린아이에게는 어린아이의 격물치지가 있고, 성인(聖人)에게는 성인의 격물치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성인(聖人)은 천하를 평안하게 하는 일의 주체로 보아도 가능합니다. 그러니까 평천하의 주체도 결국 격물치지의 외부가 아닙니다. 다만 성인의 격물치지는 그가 더욱 수련되어 있기 때문에(물론 어린아이에 비해 상대적일 뿐입니다) 그다지 힘을 많이 들이지 않아도 격물치지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이러한 격물은 땔나무 파는 이로부터 공경대부 및 천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와 같다고 말합니다. 실로 엄청난 발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순간 양명학은 나이와 신분, 성별, 지역, 종족 등에 관한 사실상의 어떠한 차별적 경계를 무장해제시켜버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주자에 의해 정교하고 방대하고 치밀하게 설계된 주(主)와 종(從), 화(華)와 이(夷) 등의 세계관이 한순간 비루해지는 대목이기도 합니다.(말하고 보니 좀 비약이 있는 듯도 합니다만… 일단 고(go!)입니다^^)
여하튼 이렇게, 가장 멀고 험하고 낯설고 가난하고 비천한 한 이민족(묘족 등)의 땅에서 도도하고 고귀한 유리의 성채 속 성인의 말씀은 해체됩니다. 다시 말해 물 긷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밥 짓고, 산책하고, 용장의 사람들과 이웃이 되는 일상의 별 것 없는 삶이 양명에게 어느 순간 낯선 사건으로 격자화된 것입니다.
저는 양명학의 출발이라는 용장에서의 이 깨달음을 기존의 유학사 전체에 대한 흥미로운 변곡점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이에 대해서는 다음편 등에서 논의를 확장해 보겠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양명학은 유학 아닌 데로부터 유학으로 삽입된 것입니다.(하지만 그 외부는 어디일까요?) 혹은 양명학은 유학을 유학 아닌 것으로까지 영토화시킨 제국의 학문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그렇다면 여기에서는 제국(왕도)적인 것과 제국주의(패도)적인 것에 관한 논의가 필요합니다. 혹은 제국과 제국주의는 둘 다 패도이면서 성격을 달리하는 두 유형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어찌됐든 그 출발은 그의 유배와 유배지의 외부성, 그리고 그 외부에서의 생존을 위한 실존적 문제 의식 등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생존의 최전선에 내몰린 지식인의 유학이라고 하면 될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양명학의 특징은 그런 부정적이고 반동적인 산물로 이해하기엔 훨씬 더 유동적이고 적극적인 사유의 매혹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 계속해서 거친 물음만 던지고 있습니다. ‘양명과 양명학을, 그리고 그의 유배생활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해 마음만 앞서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조금 방향 전환이 필요해 보입니다. 이 질문들을 답하기 위해서라도 그렇다면 이번에는 양명이 유배지에서 대면해야 했던 문제들을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글_문리스(남산강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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