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양명의 마이너리티 리포트 - 슬기로운 유배생활
2부. 슬기로운 유배생활(1) - 군자는 어떻게 유배지와 만나는가
정덕 3년(1508년), 귀주성 용장에 무슨 일이?
주자(주희)는 사유가 방대하고 놀라우리만치 담대한 대학자이지만, 결정적으로 그리고 상대적으로 그의 사유는 어떤 경계가 있습니다. 안과 밖, 나와 너, 중화와 오랑캐 등등. 물론 주자 혹은 주자주의자(?)들에게는 이런 지적 자체가 부당하게 들릴지 모릅니다. 하지만 전형적이지 않았을지는 모르지만, 주자의 학문 혹은 사상적 배경이 어떤 경계를 전제하고 있는 한 이분적(화이론적) 구도를 공고히 하게된다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나는 이미 5, 6세 때부터 생각에 잠겨 괴로워했다. 대체 천지사방의 바깥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 사방은 끝이 없다고들 사람들은 말하지만 나는 꼭 끝이 있을 것만 같았다. 예를 들면 이 벽처럼 말이다. 이 벽의 뒤쪽에는 무엇인가 있을 것이다. 그때는 너무 골똘한 나머지 병이 날 것 같았지만 아직도 벽의 뒤쪽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feat. 미우라 쿠니오, <인간주자>)
중원땅이 아닌 변방 귀주성, 주류 한족이 아닌 소수민족(묘족, 동족, 이족 등), 포획자와 도주자, 성인 순임금과 패악의 아이콘 상, 그리고 주자와 양명. 이쯤 되면 양명의 깨달음이 귀주성에서 폭발한 것은 우연이 아니지 않을까요. 유배생활이라는 자체가 탈일상이지만, 대개의 경우 유배는 본래의 자리로 회복하기 위한 과도기적 질곡처럼 받아들여졌습니다.
하지만 양명의 유배는 어디어디로 돌아가기 위한 유배생활이 아니었습니다. 양명이 귀주성에서 죽을 때까지 묘족과 함께 살아가겠다고 생각했다는 그런 말이 아닙니다. 삶이야말로 끊임없이 자신의 정처를 떠나야하는 것이고, 그런 점에서 유배는 그 자체로 이미 그런 이동의 한 버전인 셈이라는 것. 그러니까 양명의 유배생활은 제대로 유배자다웠다는 것.
그러니까 유배의 최종목적은 다시 떠나는 것입니다. 스스로에게 유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떠나왔지만 머물지 않는 것이고, 다시 떠날 것이지만 잘 머무는 것입니다. 말장난 같지만, 여튼 그렇습니다. 중요한 건 떠나온 그곳을 본래의 자리로 삼아 돌아가기 위한 유배생활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유배의 아이콘 다산 정약용의 경우만 봐도 그렇습니다. <자찬묘지명>에 따르면, 18년의 유배 생활동안 다산은 최소한 세 번 정도의 해배 기회가 있었습니다. 왕의 재가를 얻기까지 했지만 집행(!)되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아들과의 편지에 보면 그 중 한 장면은 훨씬 더 구체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산은 다른 준비를 모두 해두었으니, 최종적으로 해배를 위해 약간의 ‘타협’을 하자는 아들의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불의와 타협할 수 없다는 다산의 ‘꼿꼿함'(결기) 때문이지만, 다른 한 편 그저 단순히 ‘돌아가는’ 정도로는 그 길을 선택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결정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다산은 비로소 우리가 아는 ‘그 다산으로 되는’ 것입니다. 아마도 당시 해배를 누구보다도 간절히 원한 건 다산 자신이었을 것입니다. 18년의 유배를 마친 다산이 돌아간 곳은 어디였을까요.
묘족의 경우, 문자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까닭에 기본적으로 기록에 의한 역사가 없습니다. 고대 묘족에 관한 기록은 많든 적든 모두 타자들에 의해 기록된 것입니다. 이 말은, 묘족의 기록은 언제나 누군가(기록자)의 타자로서만 고유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 마디로 고문헌상의 고대 삼묘(三苗)가 현재 묘족의 조상이라는 증거는 아무 데도 없습니다. 수천년을 건너 송나라에 이르러서야 중국 문헌에 타자로서의 묘족 기록이 조금 등장할 뿐입니다. 특히 주자는 ‘호남 지역에 료(僚), 흘(仡), 령(伶), 묘(猫)가 있는데 이중 가장 ‘가볍고 민첩한‘(輕捷) 이들이 묘족이며… 이 묘족이 고대 삼표의 후손’이라고 주장했습니다.(주희, <기삼묘(記三苗)>; <치우, 오래된 역사병>, 김인회 지음, 푸른역사). 주자에게 묘족은 통제되고 다스려져야 할 위험한 이민족=타자였습니다.
양명은 묘족을 통제하거나 교화시켜야할 타자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는커녕 양명에게 묘족 사람들은 귀주라는 멀고 험하고 낯선 삶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선배이자 스승들이었습니다. 양명은 그들에게 밭을 갈고 파종하는 법 등 생존과 관계된 농사일 등을 배웠던 것입니다. 그리고 묘족은 양명을 만나 성인의 삶을 배웁니다. <상기>에서 보듯, 양명은 묘족인들이 존숭해 사당까지 지어 제를 지내는 상이 순임금의 패륜 동생이 아니라, 이미 충분히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인물이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칫 왜 상이냐며 화를 내고 순의 사당을 지어야한다느니 혹은 중원의 제대로된 문명을 전수해주겠다느니 하는 선민 의식이 나오기 쉬운 구조였음에도 그렇지 않았던 것입니다.
양명은 이렇게, 기존의 ‘나’라고 하는 견고한 아상(我相)과 반드시 꼭 어떠어떠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식의 기필함(必)과 고집(固), 그리고 어떤 의도(意)를 갖지 않았습니다. 그럼으로써 양명은 이제까지의 양명으로부터 어떠한 양명도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양명학의 출발에 귀주 그리고 묘족과의 마주침이 가로놓여 있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대단한 일입니다.
글_문리스(남산강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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