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양명의 마이너리티 리포트 - 슬기로운 유배생활
3부. 슬기로운 유배생활(2) - 용장대오? 용장생활백서
깨달음? 마음과 사물(사건)
용장(龍場)은 귀주성의 작은 산골 마을이고, 그곳에서의 시간이란 것도 ‘겨우’ 2년 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만 양명(그리고 양명학)에 있어 용장은 그저 한 때의 추억으로 치부될 장소가 아닙니다. 이 사실은 양명이 대륙 전역을 종횡무진 내달렸던 천하의 대장부였다는 사실로도 가려지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제 아무리 의미를 축소하려 해도 최소한 ‘용장=깨달음’이라는 돌올한 사건 자체를 외면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국이라는 세계 내적 학문으로 양명학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어찌됐건 용장의 의미를 괄호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제까지 양명학은 그렇게 알려져 왔습니다. 하지만 양명의 깨달음, 다시 말해 양명적 대오(大悟)의 핵심은, 여러번 반복하는 말이지만, 결국 외부성이고 타자성입니다. 용장은 그 자체로 하나의 외부(타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양명적 깨달음의 성격은 곧바로 양명학의 사상사적 의미를 중국이라는 세계 외적 사건으로 전환시킬 잠재적인 스위치 같은 것입니다.
깨달음이란 간단히 말해 삶의 대전환입니다. 제 생각으론, 깨닫는다는 건 다른 삶으로 건너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깨닫는다는 건 지금 현재 나에게 가장 좋은 삶을 선물하는 것입니다. 지금 충분하다는 점에서 최고의 삶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용장의 양명에게 가장 중요한 건 다른 무엇보다 물 긷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밥 짓고, 산책하고, 이웃과 왕래하는 등등의 생활을 이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양명(양명학)의 깨달음입니다. 우리는 종종 ‘깨달음’이라는 말에서 어딘가 모르게 근본적이고 대단하고 신비롭고 위대한 무엇을 떠올립니다. 뭔가 달라도 다를 거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 말은 맞는 말이기도 하고 틀린 말이기도 합니다. 깨달음이란 결코 아무 것도 아니진 않지만, 그렇다고 신비한 이적을 행하는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 것도 아닙니다. ‘무엇’과 ‘아무 것도 아닌’ 사이? 말장난 같지만 지금으로선 이렇게밖에 표현이 안 됩니다.
생명으로서의 인간은 태어나면 숨을 쉬고, 걷고, 말을 하고, 밥을 먹고, 잠을 잡니다. 이런 일들은 평범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것 외에 달리 더 근본적이고 대단하고 신비롭고 위대한 것이 있을까요. 한 생명이 숨을 쉬고 살아갑니다. 어떻게 이런 기적이 있을 수 있을까요. 아니 기적이 있다면 이처럼 살아 숨쉬고 먹고 말하는 것 외에 달리 어느 곳에서 존재할 수 있을까요. <금강경>의 첫 대목은 석가 세존께서 손수 걸식을 하고, 돌아와 밥을 먹고, 손발을 닦고, 자리에 누우셨다… 뭐 이런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금강경>은 대승불교 경전 중에서도 손꼽히는 경전인데, 그 어마어마한 경전을 막상 열어보면 이런 얘기가 펼쳐지는 겁니다. 왜일까요.
이 시작을 그저 범상한 이야기로 읽는 사람은 계속해서 <금강경> 다음 대목을 읽어나가면 됩니다. 그러면 이 시작에서 어떤 전율 비슷한 감동을 느끼게 된다면? 그런 사람이라면, 아마 알아서 <금강경> 다음 대목을 읽어나가게 될 겁니다. 하하. 이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말인가 싶으실까요. 깨달음은 별 게 아닌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유별난 어떤 것도 아닙니다. 깨달음이 하학 그 자체냐 물으면 아니라고 말해야겠지만, 어떤 깨달음도 하학을 떠나 있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이것은 또한 양명의 유명한 ‘격물(格物)’설의 요체이기도 합니다.
양명의 격물설. 양명에 따르면, 격물의 격(格)은 올바름(혹은 바르게 하다)이라는 의미의 ‘바름’(正)입니다. 바르지 못한 것을 바르게 한다는 뜻입니다. 이때 물(物)이란 우리가 보통 사물, 동물 등으로 말할 때의 그 물이면서 어떤 일을 가리킬 때 쓰는 ‘사건(事)’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각각의 낱낱 물건 등이기도 하고 어떤 행위 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나무, 휴대폰 같은 것이기도 하고 청소하고 산책하는 등의 일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격물의 의미를 조합해서 풀어보면, 격물이란 사물(혹은 사건)을 바르게 하다는 뜻이 됩니다.
이때 중요한 포인트는 ‘사물을 바르게 한다’는 말을 문자 그대로 사물을 바르게 다듬는 것으로 생각해선 안된다는 점입니다. 양명의 격물은, 살짝 윤문해보면, 사건(물)으로 드러나 있는 이 마음의 바르지 못한 것에 대해 그 마음을 바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처음엔 좀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럴 거면 애초에 ‘마음을 바르게 한다’라는 의미에 오해되지 않도록 정심(正心)이라고 쓰면 되는데 굳이 ‘격물(格物)’이라고 써 놓을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의심도 가질 만합니다. 하지만 여기엔 좀 복잡하다면 복잡한 역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최소한 양명의 시대로부터 벌어진 500여년의 시간 차이(엄밀하게는 격물이라는 말이 언급된 <대학(大學)>이라는 문헌으로부터 오늘날에 이르는 시간 속의 언어 감각)도 언급되어야 합니다. 결정적으로 ‘물(物)’이란 말이 개체적이고 독립적인 낱낱의 사물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현대인의 언어 감각만으로는 격물에서 마음의 문제가 거론되는 자체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양명은 <대학>이란 책에 나오는 ‘격물’을 새롭게 해석한 셈인데, 양명은 물(物)이 사물(혹은 사건)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양명의 새로움은 사물(혹은 사건)이란 이 마음으로부터 펼쳐진 것이라는 지적에 있습니다. 이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양명에 따르면 물(사건)이란 결국 마음의 표현인 셈입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일까요. 마음과 떨어진 물(사건)은 없다는 뜻입니다. 물(사건)은 반드시 마음으로 말해지는 무엇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돌아가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서 사물과 마음은 별개의 두 가지입니다. 서로 외부적이고 독립적입니다. 그러니까 내 마음이 어떤 사물을 대상화하여 감정을 느낀다는 식의 표현은 자연스러워도, 어떤 사물(혹은 사건)이 이 마음으로 생성된 것이라는 식의 말은 어딘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양명에 따르면 물(物)이란 마음(心)이 닿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 어떤 존재물(우리가 보통 사물이라 지칭하는 낱낱의 물건들을 떠올려도 좋습니다)이 이 마음 바깥에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마음이 닿은 상태여야 물입니다. 물이란 말은 이미 마음 작용(표현)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바르게 한다는 뜻으로 ‘정심(正心)’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격물(格物)’의 물이 곧 마음 작용으로서의 물이기 때문에 물을 바르게 한다는 말은 곧바로 마음 작용으로서의 물을 바르게 하는 것이 되고, 그 물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마음 작용을 바르게 하는 방법 뿐이기 때문입니다.
글_문리스(남산강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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