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나’를 바꾼다
『뻬쩨르부르그 이야기』 - 고골
코를 막아야 할 정도로 지구 곳곳에 고약한 냄새가 떠돈다. 그래서 그 달은 너무 약하여 사람이 살 수 없다. 거기에는 지금 코들만이 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 코를 볼 수가 없다. 코가 달나라에 가 있기 때문이다. 지구는 무거운 물체이기 때문에 이것이 달 위에 올라앉으면 우리들 코는 금세 가루가 될 것이다.(130쪽, 『광인일기』)
하지만 이 세상에선 무엇이든 오래가지 못하는 법이다. 기쁨 역시 다음 순간에는 그리 대수롭지 않고 또 그 다음엔 더욱 시들해져서 마침내 예사로운 마음으로 되돌아간다. 그것은 마치 작은 돌이 물에 떨어졌을 때 생기는 파문이 결국 다시 평평한 수면으로 되돌아가는 것과도 같다.(39쪽, 『코』)
루쉰은 레르몬토프, 고골, 가르신, 예로센코 같은 러시아 작가들을 무척 좋아했다. 「마라시력설」을 쓰던 일본 유학 시절, 러시아어를 직접 배우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루쉰의 위대한 처녀작, 『광인일기』는 고골의 『광인일기』로부터 힌트를 얻어 쓴 작품이다. 세부 내용은 서로 다르지만, 제목과 형식, 그리고 주요 모티프를 사용함에 있어서 루쉰에 대한 고골의 영향력이 여지없이 드러난 작품이었다. 더군다나 루쉰이 죽기 직전까지도 고골의 '죽은 혼'을 번역하고 있었다고 하니, 고골에 대한 루쉰의 존중은 가히 짐작할만하다.
코를 막아야 할 정도로 지구 곳곳에 고약한 냄새가 떠돌기 때문에, 코들이 모두 달에 가버렸다는 뽀쁘리시친의 코믹한 망상은 루쉰을 통해 식인사회라는 급진적인 프레임으로 탈바꿈된다. 어떤 의미에서 고골이 치밀하고 기발하다면, 루쉰은 직설적이고 급진적이다. 강아지 멧쥐가 피델에게 편지를 보내는 장면이나, 종이에 스페인이라고 써놓고 보면, 어느새 중국어가 돼버린다는 기발함같은 것들은 단편소설들 전편에 걸쳐 표출된다. 특히 '코'와 같은 작품은 카프카의 '변신'이나, 곰브로비치의 '페르디두르케' 처럼 첫 장면부터 주인공을 낯선 상황으로 몰아넣는다는 점에서 아주 현대적이다. 사실 구력인 율리우스력과 신력인 그레고리력을 이용한 고골의 트릭 속에서 쓰여진 『코(Nos)』는 그 첫 장면부터가 제목 코(Nos)의 철자를 뒤집은 꿈(Son)을 묘사하면서 시작한다. 이 평탄하게 보이는 세상에도 평상시와 다른 기이한 상황이 구석구석 숨어있다고 말하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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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의 여자』 - 아베 코보
그러다 결국 중독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음을 자각했을 때, 문득 더없이 단순한 타원 운동의 주기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 하늘과 1/8mm의 파장이 지배하는 사구 지대를 떠올리고 갑작스레 마음이 바뀌기도 하는 것이다. 남자가 끝없이 되풀이되는 모래와의 투쟁과 일과가 된 수작업에 미미한 충족감을 느낀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자학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그렇게 쾌유되는 방식이 있다고 해서 딱히 이상할 것도 없는 법이니까.(203쪽)
회사와 집 사이에 하나의 길만 있는 것처럼, 나는 오랫동안 출퇴근에 몰두해왔다. 앞집 문 앞에 항상 널브러져 있는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조선중앙-통신. 출근시간이면 건널목 맞은편에 늘 만나게 되는 저 아가씨. 퇴근시간이 좀 빨라진 것 같아. 지하철역 계단에서 미끄러진 젊은 친구. 부축해서 일으켜 세우니 고맙단 소리 하나 없네. 우라질. 출퇴근길이면 발견되는 어제와 오늘의 미세한 차이들. 반복은 하나의 길을 모든 현재의 길들로 만들어준다. 이 하나의 길이 아니었으면 감각들이 어찌 만들어졌겠는가. 그래서 "반복은 현재를 채색하고, 그 감촉을 확실한 것으로 만들어준다."(『모래의 여자』)
그래서 동시에 우리는 반복에 중독되기도 한다. 모든 일이란 시작하기만 하면, 적어도 일을 하는 동안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단순 보고서에 쓸 단순 엑셀작업도 일단 시작하면 반복이 가져다주는 단순함 때문에 ‘현재’를 제법 보람 있게 해준다. 어쩌면 노동이란 가만히 있지 못하는 병에 대한 신의 처방이지 않았을까? 자신의 심장 고동만으로는 안심하지 못하니까 노동이라도 해서 어떤 정적을 없애 버리려고 말이다. 성욕만으로는 충족되지 않으니까, 쥐고 있는 볼펜을 끊임없이 돌려서 힘을 빼려고 말이다. 뇌파의 리듬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으니까 담배를 피우고, PC를 쳐서 연기와 타자소리에 취하게 말이다. 어찌 보면 PC를 반복해서 치고 있는 것도 이 손가락이 뭔가에 만족스럽지 않으니까, 뭐라도 찾아서 한 일종의 반복은 아닐까. 그래서 반복은 사람의 몸을 하나의 고정된 경향에 익숙하게 만들고, 생각의 길들에 바리케이트를 만든다. 봉쇄된 다른 길들은 단 하나의 길을 위한 조건이 된다. 결국 차이의 생성도, 동일성의 작동도 모두 반복을 통해 만들어진다. 즉 반복은 생의 불가피한 도구이면서 형식일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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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나라의 앨리스』 - 루이스 캐럴
그들은 명제의 연결사를 '숨을 죽인 채' 말한다. 마치 그것이 살아 있는, 의식을 가진 개체인 것처럼, 자신이 무엇을 의미하기로 선택한 것인지 스스로 증명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하나의 개체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면 불쌍한 피조물인 우리는 다만 그 전능하신 개체의 의지와 기쁨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그것을 얌전히 따르는 것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 이러한 견해와는 반대로 나는 어떤 책의 작가든 쓰고자 하는 단어나 구문에 어떠한 의미든 마음대로 붙일 수 있는 권리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책 첫머리에 저자가 "나는 '검은색'이라는 단어를 항상 '하얀색'이라는 의미로, '하얀색'은 반대로 항상 '검은색'의 의미로 쓸 것이다. 이를 이해해 주길 바란다."라고 한다면, 나는 아무리 그것이 분별없는 처사라 생각해도, 순순히 그러한 조치를 받아들일 것이다.(루이스 캐럴, 『상징논리』)
"이름을 부르면 벌레들이 당연히 대답하겠지?"
모기가 무심하게 말했다.
"난 벌레들이 그런다는 걸 전혀 몰랐는데."
"걔네들한테 이름이 있어도 무슨 소용이 있겠어? 이름을 불러도 대답을 못 한다면 말이야"
"걔네들한테는 소용이 없지. 하지만 벌레들 이름을 붙이는 건 사람들한테는 유용한 것 같아. 그렇지 않다면 모든 것들에 왜 이름이 있겠어?"(『거울 나라의 앨리스』, 63쪽)
"글쎄, 잘 모르겠네. 네가 이름 같은 거 없이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얼마나 편할지 생각해 봐! 예를 들어서, 가정교사가 수업시간이라고 널 부를 때면, '어서 이리 오렴-." 이라고밖에 못 할거 아냐. 그럼 시작하려던 수업을 그만두고 말겠지. 부를 이름이 없으니까. 당연히 넌 안 가도 되고 말이야"(『거울 나라의 앨리스』, 66쪽)
"아니, 너무해! 이렇게 가는 길을 막는 집은 처음 봤어! 정말 처음이라고!"(『거울 나라의 앨리스』, 40쪽)
"내가 말하는 '실재'는 물론 그 본성에 부합하는 실재하는 모든 존재를 가리킨다. '꿈이 실재한다'와 '드럼이 실재한다'라는 두 명제는 완전히 다른 '실재'를 나타내고 있다. 드럼은 나무와 얇은 가죽의 집합으로 드럼 치는 사람의 손에 존재한다. 반면 꿈은 관념의 집합이며, 오직 꿈꾸는 자의 마음에만 존재한다.(루이스 캐럴, 『상징논리』)
“거꾸로 살면 기억이 양쪽으로 작용하거든”
“저는 분명 기억력이 한쪽으로만 작용하는데요. 일이 일어나기도 전에 기억할 수는 없다고요.”
“거슬러 올라가기만 하는 기억력은 형편없는 거라고 할 수 있지”
“여왕님이 가장 잘 기억하는 일은 무엇인데요?”
“아, 그건 다다음주에 일어났던 일들이지.”(『거울 나라의 앨리스』, 98쪽)
『옥스퍼드 영어사전』이 완성(1928년)되던 무렵, 루이스 캐럴은 바로 그 옥스퍼드 대학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의 시대는 19세기 후반 이래 언어의 과학적 연구가 크게 대두되던 시대이기도 했다. 말년에 그의 서재에는 존슨 사전, 베일리 사전, 웹스터 사전, 속어 사전, 스키트 영어 어학원 사전 등등 수많은 사전들이 꽂혀 있었다. 수학자이자 논리학자로서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규정하는 작업에 크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마치 ‘붉은 여왕‘의 관심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캐럴은 단어를 사전적 의미로만 한정하는 것에 저항했다. 그는 자기가 쓰고자 하는 단어나 구문에 마음대로 의미를 붙일 수 있는 권리가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이 유명론적 태도는 거울나라의 험프티 덤프티를 통해 “내가 단어를 쓸 때는, 내가 선택한 의미를 뜻하게 돼 있다”라는 선언으로 표현된다. 그것이 한 단어에 두 가지 뜻이 들어 있으므로 “양쪽으로 열리는 가방(Portmanteau)”으로 비유되면서, 이 단어가 실제로 '신조어'라는 의미의 '신조어'가 되기도 한다. 그는 정말 의미를 만들어 내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여기에 머물지 않고, 기존 단어로 여러 가지 합성 단어들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나비(Butterfly)에서 나온 버터빵나비(Bread-and-butter-fly), 잠자리(Dragon-fly)에서 나온 스냅드래건잠자리(Snap-dragon-fly) 같이 하이픈으로 연결된 합성어들이 작품 곳곳에 끼워 넣었다. 그는 명사-형용사(혹은 명사)로 구성된 이름에 또 다른 형용사 혹은 명사를 덧붙여서 상상 속의 이름들을 마구 만들어 냈다. 사실 이런 방식이라면 무한히 많은 단어를 만들어 낼 수 있게 된다. 무한히 생성되는 의미들을 위해서 단어들을 단지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어떤 의미에서 정확한 규정을 통해 단일한 의미를 확정하려는 태도는 단일한 ‘호명’으로 단일한 주체를 구성하려는 것과도 같다. 마치 그것은 앨리스가 아무리 달려도 집 앞으로 되돌아오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이와 달리 앨리스에게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모기들같은 ‘이름 없는 벌레들’-이들을 부를 이름이 없으니, 뭐라 불러도 된다!-이야말로 가장 인간으로부터 멀리 벗어나 있는 존재들인 셈이다.
이 생각의 근저에는 ‘실재’에 대한 캐롤의 남다른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 그에게 실재는 현실적인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관념 속에도 있을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라면 의미가 현실적인 관념 속에 잠재적으로 포함하고 있을 미지의 의미-현실적인 것 안에서는 '무의미'-를 이해하고 긍정할 수 있게 된다. 사실 의미는 이런 무의미를 같이 - 이런 의미에서도 '양쪽'이다.- 끌고 다닌다. 이런 '실재관'은 결국 시간까지도 뒤틀어버릴 가능성을 품는다. 현재는 미래뿐만 아니라, 과거로도-이것도 역시 '양쪽'이다!- 돌진할 수 있다. 이런 구도 하에서라면, 비로소 우리는 '하얀 여왕'이 했듯 미래를 기억할 수 있게 된다. 보이지 않는 실재를 믿는자, 그에게 미래는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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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의 회전』 - 헨리 제임스
마일스가 불안하게 주위를 살피자, 나는 그에게 급박한 공포가 찾아왔다는 최초의 징후를 힘겹게-정말 진기하게-발견했다! 그가 갑자기 나를 두려워하는 듯이 보였기에, 나는 그를 두렵게 만드는 것이 실로 최상의 방책이라고 간주했다.… 나는 지금 내가 우리의 상황을 그 당시에는 불가능했던 명백함으로 해석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가련한 우리들의 눈빛이 이미 앞으로 다가올 고뇌를 예고하는 섬광으로 타오르고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히 서로 맞붙지 못하는 투사들처럼 우리는 두려움과 망설임으로 주위를 배회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두려워한 건 각기 상대방이었던 것이다!(190쪽)
어느 대저택에 가정교사가 왔다. 두 아이는 엄마도 아빠도 없이 전임 가정교사와 보모, 그리고 하인들로 둘러싸여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가정교사는 유령을 본다. 또 두 번째, 세 번째 계속 마주친다. 그 유령들은 전임 가정교사와 어떤 하인이었다. 그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런데 두 아이는 같은 장소에서 그들을 같이 보았는데도 보지 못한 듯이 행동한다. 이상하다. 가정교사는 두 아이를 의심한다. 결국 이 의혹을 몰아세우자, 급기야 아이는 죽고 만다. 유령은 있었던 것인가.
『나사의 회전』의 내용이다. 유령이란 있었던 것인가? 소설은 그것이 시종일관 있었던 것으로 말한다. 첫날 플로라가 안내해 준 탑의 맨 꼭대기에서, 계단에서, 창문 건너편에서 마주친 ‘것’은 분명 유령이었다. 그것은 매번 마주칠 때마다 이쪽을 ‘유령으로서’ 응시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 형상이 가정교사가 본적도 없었던 전임 가정교사와 하인 피터 퀸트의 모습이라고 그로스 부인이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이제 유령이 없는 듯 행동하는 아이들이 두려워 진다.
다시 유령이 있었던 것인가? 이 소설은 그것이 없었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 유령은 늘 가정교사에게만 보였다. 그것들이 그녀에게 드러날 때, 현실의 다른 사람들 눈에는 부재하는 것들이었다. 혹시 아이에 대한 자기 이외의 모든 영향력들을 경계한 그녀가 일종의 환상을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마지막에 그녀가 “앞으로도 무슨 상관이 있겠어? 난 너를 가졌는데”라고 하는 말은 정말 어처구니없지 않은가. 이제 아이들은 유령이 있는 듯 행동하는 가정교사가 두려워 진다. “그는 우리를 엄습한 거대한 존재를 도무지 찾지 못한 채 당황하여 새파랗게 질려 나를 쏘아보았다. 그분이 오셨나요?”
데리다는 ‘디페랑스(différence, 차연)라는 것이 생각할 수 없는 것’이라면서, 그것은 우리가 ‘동일자와 전적 타자를 … 동시에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헨리 제임스가 말하고자 했던 진실이란, 없다고 하면 있어 보이고, 있다고 하면 없어 보이는, 그러니까 아주 애매해서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그런 상태, 즉 어떤 결정불가능성의 연속, 바로 ‘지연’ 그 자체이다. 그것은 있음과 동시에 없음을 함께 보여주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결국 유령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있고 없고를 결정할 수 없는 것 그 자체를, 그리고 그 불가능성이 만들어내는 소름끼치는 현실을 이 소설은 작정하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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