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실이의 진실한 복
重水坎 ䷜
習坎, 有孚, 維心亨, 行, 有尙.
습감괘는 진실된 믿음이 있어서 오직 마음으로 형통하니 움직여 나아가면 가상하다.
初六, 習坎, 入于坎窞, 凶.
초육효, 거듭된 구덩이에서 더 깊은 웅덩이에 들어감이니 흉하다.
九二, 坎有險, 求小得.
구이효, 구덩이에 위험이 있지만 구하는 것을 조금이나마 얻는다.
六三, 來之坎坎, 險且枕, 入于坎窞, 勿用.
육삼효, 오고 가는데 구덩이에 빠지는 것이며 험한 곳을 베고 누워 더 깊은 구덩이로 들어가는 것이니 쓰지 마라.
六四, 樽酒, 簋貳, 用缶, 納約自牖, 終无咎.
육사효, 한 동이 술과 밥 두 그릇을 질그릇에 담아 간략하게 들이되 들창(군주의 마음이 열린 곳)으로부터 하면 마침내 허물이 없다.
九五, 坎不盈, 祗旣平, 无咎.
구오효, 구덩이를 채우지 못하고 있지만 평평한 데에 이르게 되면 허물이 없다.
上六, 係用徽纆, 寘于叢棘, 三歲不得, 凶.
상육효, 동아줄로 묶고 가시덤불에 가둬 두어서 3년이 지나도 벗어나지 못하니 흉하다.
시작부터 난감 그 자체다. 영화 프로듀서 일을 하며 쉼 없이 달려온 주인공 ‘찬실’은 회식 자리에서 감독님이 급사하는 상황을 맞이한다. 감독님의 황당한 죽음은 갑작스러운 실직으로 이어지고, 갈수록 상황은 더욱더 꼬여간다. 찬실은 서둘러 산동네 하숙집을 구해 긴축 재정에 들어가고, 친구의 가정부로 일하기 시작한다. 이 와중에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다고, 왠지 취향도, 마음도 맞는 것만 같은 두근두근 연하의 남자와 썸을 타는 줄 알았으나, 아뿔싸! 자신의 열띤 망상에 불과했을 뿐. 박력 있는 백허그로 마음을 고백했지만 단칼에 썸남에게 차이고 부리나케 달아나다가 우당퉁탕 넘어지는 찬실이의 뒷모습이 고달프다. 그토록 사랑했던 일은 물론이고, 인생사 뭐 하나 제대로 되어 가는 게 없다. 앞뒤로 첩첩산중.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대략적인 줄거리다.
중수감 괘는 구덩이를 상징하는 감(坎)괘 두 개가 겹쳐(習) 있는 모습이다. 작중의 주인공 찬실이가 겪는 상황을 괘로 그려본다면 이러할 것이다. 한 개도 어려운데, 구덩이가 둘씩이나! 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영화의 제목뿐만 아니라 메인 주제곡 또한 지겹도록 찬실이가 복도 많다고 웅얼거린다는 점이다. 관객을, 아니 찬실이를 놀려먹는 걸까? 중독성 있는 노랫말은 귀를 휘감고 돌며 질문을 던진다. 봐봐, 찬실이가 얼마나 복이 많은지! 아이러니하지만, 이 ‘복 많은’ 찬실이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중수감 괘를 풀 수 있는 힌트 한 자락 정도는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려움의 상징인 물이 두 개나 겹쳐있기에, 중수감 괘는 길한 효사가 하나도 없을 정도로 험악하고 예사롭지 않다. 이 어려운 괘를 어렵게 푸는 어려운 짓을 하지 않으려면 유쾌한 찬실이가 필요하다! 대체 왜 찬실이는 복이 많은 사람인 걸까?
아래 3효(하체)와 위 3효(상체)는 각각 구덩이 하나씩을 상징한다. 하체에서 첫 번째 구덩이에 빠져 허우적거렸다가 겨우 벗어난 순간, 상체에서 또 다른 구덩이를 만나 쏙 빠져버린 상황이다. 그런데 하체와 다르게 상체에서 마주한 두 번째 구덩이는 좀 다른 특징이 있다. 하체에서는 위험이 있고,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구덩이였다면, 상체의 구덩이는 채워지지 않는 구덩이(坎不盈)인 것이다. 찬실이 또한 갑작스레 직장을 잃고, 졸지에 친구의 가정부가 되고, 믿었던 제작사 대표마저 자신을 내팽개치는 점입가경의 연속을 치른다. 그러나 그녀가 본격적으로 마주한, 그녀를 완전히 저 바닥까지 처박아버리는 더 험난한 구덩이는 따로 있다. 자신이 평생토록 몸과 마음을 바쳐 사랑했던, 바로 그 무언가에 대한 회의감이다. 하숙집 주인인 복실이 할머니가 찬실이에게 묻는다. “영화 PD? 그게 뭐 하는 사람이야?” 온갖 시련과 불운을 하루 종일 겪고 난 어슴푸레한 저녁, 바로 그쯤의 피곤한 기운을 온몸에 전부 짊어진 채 찬실이는 우는 듯 웃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대답한다. “저도 이제 잘 모르겠어요…”
사랑이 뭔지는 몰라도 영화 하나만큼은 믿고 달려왔다는 그녀가 이제는 자신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무엇을 원하고 좋아하는지 대답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찬실이가 했을 대답은 분명 달랐을 터다. 찬실이의 뻥 뚫린 가슴처럼, 구덩이는 깊게 패어 있다.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 중수감 괘의 5효는 이 차지 못한 구덩이(坎不盈)를 말하면서, 평평한 곳(祗旣平)에 이르면 허물이 없다고 조언한다. ‘깊게 팬 구멍’과 ‘고른 수평’이 하나의 효사 안에서 명백한 대비를 이루는데, 나는 이 지점이 상당히 끌렸다. 구덩이를 빠져나오는 방법은 가득 차게 만들어 평평한 지대에 도달하는 것. 다시 말하자면, 5효는 구덩이에 빠진 조난자이면서 동시에 구덩이를 채워 평평함을 이룰 수도 있는 주체다. 그럴 만도 한 것이, 5효는 위아래 음효에 막혀 있지만, 중심을 잡고있는 튼실한(中實) 양효이기 때문이다. 충분한 힘이 있고 역량이 있는 군주의 자리에 있기도 하다. 지금 나를 힘들게 하는, 나를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 멈춰 있게 만드는 이 어려움이 오히려 움푹 팬 구덩이를 새롭게 채워 넣는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다. 어쩌면 이것이 중수감의 찬실이가 복이 많은 이유가 될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구덩이를 채울 수 있을까? 절망스러운 추락의 상황 속에서 돌파구를 만들어내어 딛고 설 수 있는 구오효의 능력은 구체적으로 뭘까? 중수감 괘의 괘사에서 힌트를 한번 빌려보자. 거듭된 구덩이(習坎)의 상황을 맞이한 이들에게 아주 유용한 조언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잇단 위험에도 진실과 믿음이 있어서(習坎有孚), 마음이 형통하니(維心亨), 나아가라! 그러면 숭상할 수 있는 일이 생긴다(行有尙)고. 뜻밖의 조언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중수감 괘가 가진 특징이 가장 두드러진다. 어려우면 몸을 사리고 상황을 관전하라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행하고 나아가라는 것, 즉, 음효 사이에 갇혔지만 강건한 양효의 역량을 지닌 감괘의 특성을 적극 활용해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려운 와중에 무엇을 어떻게 행할 것인가? 핵심은 ‘무엇을’이 아니라 ‘어떻게’다. 오직 진실하게, 믿음을 가지고 행하라! 이 괘사의 내용을 극에 대입해보면 찬실이만의 진실함이 뚜렷이 드러난다.
영화의 본격적인 전개는 실직 후 찬실이의 변화된 감성과 함께 예상치 못한 인연, 사물들로 흘러가며 채워진다. 나무 끝에 외롭게 달린 모과 한 알도 절절하게 다가오고, 하숙집 주인 복실이 할머니를 비롯해 왜 영화를 시작했는지 상기시켜주는 추억의 영화 비디오들, 수상쩍은 존재감을 자랑하는 ‘자칭’ 장국영(!), 4차원 정신세계를 가진 배우 소피와 친구들까지, 이들 모두가 영화계를 떠난 찬실이의 일상에 자연스레 다가온다. 오로지 영화를 향해 가파른 질주를 했던 그녀의 삶은 이제 전혀 다른 차원에 물들며 색다른 에피소드들로 북적이기 시작한다. 이런저런 만남과 성찰을 천천히 통과해나가던 찬실이의 깨달음은 영화 후반부의 담담한 고백으로 요약된다. “목말라서 꾸는 꿈은 꿈이 아니에요. 저, 삶이 뭔지 궁금해졌어요. 거기에 영화도 있어요.” 그녀는 비로소 영화에 더해 삶에 대한 궁금증을 털어놓는다.
수십 년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 영화에 대한 열정과 사랑은 그녀에게 크나큰 상실감을 안겨주기도 했지만, 또 그만큼의 밀도 있는 질문을 만들어내는 계기를 주었다. 그동안 묻어뒀던 갈증을 곱씹어 보고, 이제는 목마름이 아니라 충만함을 알고 싶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중수감 괘의 찬실이가 해낼 수 있는 소박하고도 진실한 나아감이다. 인생 40년 차에 접어든 찬실이는 비로소 눈을 들어 삶을 궁금해하기 시작한다. 확장된 화두, 넓어진 시야, 이것이야말로 눈앞의 구덩이에 매몰되지 않고 탈출할 가능성이 열렸다는 증거가 아닐까? 찬실이가 ‘이제 영화는 땡이다!’ 하면서 등을 돌려버린 것이 아니라, 사유의 범위를 더 넓혀버리는 기회로 삼았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다. 오로지 ‘영화’라는 두 글자만을 향해 달렸던 그녀의 뇌리에 ‘삶’이라는 본질이 치고 들어오는 순간, 이제 그녀의 달리기는 그동안의 모든 상실과 난데없는 변곡점을 재해석하며 다른 방향성을 틔워낼 터다. 그렇다면 연속된 구덩이라는 것은 참으로 위험하지만 동시에 진실함을 연마하는 공간이 된다. 이 공간에서 새로운 질문을 낳게 된 찬실이는 예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길을 탐구하며 또 다른 생기로 차오를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은 마치 기차에 올라탄 듯 카메라가 터널 속을 달리며 끝도 없이 쭉 이어지는 철로를 비춰주는 것으로 끝난다. 멈추지 않는 찬실이의 행로처럼 철로는 길고 어둡던 터널을 지나 갑자기 시야가 확 밝아지면서 경계 없이 펼쳐지는 아득한 설원으로 접어든다. 연속된 어려움 속에서도 진실함으로 나아가는 길 위에서 우리가 만날 것은 이렇듯 더 넓은 지평선일지도 모르겠다. 진실한 내공으로 위험을 자기 성찰과 새로운 질문으로 변환시킬 수 있는 동력을 내면에 갖춘 사람, 그래서 찬실이는 복도 많다, 아주 많다!
글_오찬영(감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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