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밤하늘에서 네모를 찾아주세요
-가을철 별자리를 찾아서①
손영달(남산강학원 Q&?)
페가수스 빙의
태풍 볼라벤이 지나갔다. 태풍이 불어 닥친 28일 서울은 유령의 도시 같았다. 행인들이 종적을 감춘 시가지, 사람들은 창문마다 부적처럼 X자를 쳐놓고 그분이 오시길 기다리고 있었다. 강풍에 갸냘픈 여우비를 흩날리던 그 이름도 요상한 태풍 볼라벤은 몇 개의 전봇대와 가로수, 간판과 함께 ‘천안함 아군 기뢰에 의해 침몰’이라는 놀랄 만한 이슈 하나를 사뿐히 즈려 밟고 지나가셨다. ‘최악의 것이 온다’며 온갖 매체가 헐리웃 영화 카피처럼 입을 모았고, 상황도 헐리웃 영화 식으로 허망하게 종료되었다. 공포감 조성, 매체 장악... 어딘지 좀 식상하면서, 한편으로 구린내가 풍기는 시나리오다. 사람들은 X자로 봉쇄한 방안에서 실시간 이슈를 클릭했고, 기대만큼의 스펙터클이 연출되지 않자 제주도 조랑말이 태풍에 날아다닌다며 판타지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제주도 조랑말 페가수스 빙의!” 조랑말이 태풍에 날린다는 뻥도 참 놀랍기 그지없지만, 거기다 페가수스를 갖다 붙인 신화적 감각은 혀를 내두르게 한다.
이것에 대해 그들의 설명이 없으므로 나도 알 도리가 없다. 비록 잘 모르지만 감히 한마디 하려고 한다. '과격주의'가 올 리도 없고 그것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지만, 다만 '온다'가 온다면 마땅히 두려워해야 한다. -루쉰, <온다> 中
페가수스를 아는가! 날개달린 말 페가수스, 우리말로는 천마(天馬)라고 한다. 개인적으로 참 인연이 깊은 심볼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인공이 마들렌 과자 한 조각을 씹고 아련한 회상에 빠져들듯, “제주도 조랑말 페가수스 빙의!”라는 기사를 앞에 두고 나는 깊은 상념 속으로 빠져들었다. 나는 단양 사람이다. 석회석의 고장 단양. 파란색 천마를 로고로 삼은 모 시멘트 회사는 단양의 몇 안 돼는 밥줄이다. 나 어릴 적엔 단양 읍내의 거리엔 새마을 마크와 나란히 푸른 천마 로고가 그려진 담장이 늘어서 있었다. 봄이 되면 시멘트를 만들고 남은 석회를 농가에 무상 배급해 주는데, 이 날 마을은 거의 축제분위기다. 그 구원의 푸대 자루엔 날개 돋친 푸른 말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있었다. 천마는 곧 단양의 상징이다. 나 역시 천마가 그려진 성냥으로 담배를 배우고, 천마가 그려진 거리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천마 그림이 그려진 시멘트 푸대를 져 날라 밥을 벌어먹던, 천마의 후예다. 생전에 말이라곤 몇 번 본적도 없는 내가 비상하는 천마 그림 앞에서 아련한 고향의 향수를 느끼는 데는 이런 사연이 있던 것이다.
까마득히 잊고 있던 추억의 페가수스는 태풍 볼라벤과 함께 내게로 엄습해왔다. 하지만 정작 나는 페가수스에 대해 아는 바 없다. 허기를 채우듯 페가수스에 관한 자료들을 닥치는 대로 읽어나갔다. 그리하여 나는 오늘 내가 얘기해야 할 가을 별자리와 엄청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아내고 말았던 것.(저의 무지를 고백합니다!^^) 페가수스는 어떤 별일까, 그리고 어떤 신화를 담고 있을까? 그리고 정작 내가 얘기해야 할 가을철 동양 별자리와는 대체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 자, 함께 내 영혼의 고향 페가수스로, 영롱한 가을철 별자리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보자.
네모는 천마다 -페가수스 이야기
고개 들어 하늘을 보자. 요즘은 서울에서도 희미하게나마 별이 보이더라. 선선한 바람에 귀뚜라미 우는 운치 있는 가을밤은 별을 보기 딱 좋은 시기이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가을 밤하늘은 별빛이 티미하기로 유명한 때다. 별빛이 강렬하지 않기에 그 별이 다 그 별 같아 보이는 시기가 가을이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라. 여기 가을 밤하늘에서 길을 찾는 법을 전격 공개한다.^^
밤하늘의 별에게 길을 묻던 시대는 끝이 났다는 한 저명인사의 말이 생각난다. 별을 길잡이 삼아 살아가던 시대의 길(道)과 우리 시대의 길(道)은 어떻게 달라진 것인가.
가을 밤하늘에서는 먼저, 네모를 찾아라. 입추가 되면 해질녘에 반대편 동쪽 하늘에서 태양과 맞교대 하는 네모 별자리를 발견할 수 있다. 이게 가을철 대표 별자리다. 가을 밤하늘에는 언제나 이 네모 모양의 별자리가 있다. 그래서 이 별을 가을 하늘의 기준으로 삼는다. 이를 가을 하늘의 대사각형이라 한다. 이 네모 모양은 페가수스의 3개별과 안드로메다의 별 하나가 만나 이루어진 것이다. 과학시간에 졸지 않은 사람은 알 것이다. 이 별자리는 하늘의 위치를 찾는데 중요한 길잡이 역할을 한다. γ별 알게니브와 안드로메다자리 α별을 연장하면 북극성과 춘분점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이 선은 적경 0도 선, 우리에게 익숙한 용어로 하면 ‘자오선’과 일치한다. 이 선과 하늘의 적도가 만나는 점이 바로 1년의 시작이 되는 춘분점인 것이다.
가을 하늘의 중심인 이 네모를 보고 서구인들은 어떤 상상의 나래를 펼쳤을까? 서구인들은 이 네모가 은하수를 향해 박차고 날아오른 천마 페가수스의 날개와 등짝, 안장이라고 생각했다. 가을 밤 은하수를 향해 질주하는 말이라, 어딘지 쓸쓸해 보이지 않는가? 역시, 예삿말이 아니다 싶었다. 그리스 신화는 사연 있는 말 페가수스의 내막을 소상히 전하고 있다.
이 말은 출생부터가 비범하다. 그의 어머니는 메두사요, 아버지는 포세이돈이다. 음양오행에서도 수(水)가 많으면 색을 밝힌다고 보는데, 그리스 신화의 해신(海神) 포세이돈도 음탕하기로 이름난 신이었다고 한다. 그는 섹시한 말의 모습으로 왕년에 절세의 미녀였다는 메두사를 꼬시는 데 성공한다. 그런데 하필이면 일을 친 장소가 순수의 상징인 아테나 여신의 신전이었다. 아테나 여신의 저주를 받아 메두사는 괴녀가 되었고, 급기야 페르세우스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된다. 메두사가 죽으며 낳은 자식이 날개 달린 말 페가수스다. 한때 아름다운 처녀였던 어머니를 닮아 눈처럼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는 백마였다.
페가수스의 별자리들. 하늘에서 저 별들을 어떻게 찾는담? 참으로 알 수 없는 경지다.^^ 그래서 이 세계가 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이런 페가수스가 절박하게 날아오르는 몸짓으로 별자리에 붙박이게 된 사연은 무엇일까? 페가수스는 오만한 왕자 벨레로폰의 소유가 되었다. 페가수스를 얻은 벨레로폰은 신의 세계에 도전하기 위해 하늘로 날아올랐고 이에 노한 제우스가 말파리의 독한 침으로 페가수스를 놀라게 해 벨레로폰을 땅에 떨어뜨렸다. 그리스인들은 페가수스의 네모 모양을 보고 오만한 인간을 떨어뜨리는 천상의 말의 몸부림을 연상한 것이다. 하지만 벨레로폰의 수중에 넘어가기 이전까지 페가수스는 고상한 학예의 신인 뮤즈들에게 사랑받던 말이었다. 가을 하늘의 저 네모는 우아한 뮤즈들이 타고 다니던 페가수스의 안장이었다. 참고로 뮤즈는 통상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오직 시만을 담당하는 신이 아니라, 학술과 예술 전반을 담당하는 아홉 여신들이다. (1-역사는 클레이오, 2-서정시는 에우테르페, 3-희극은 탈레이아, 4-비극은 멜포메네, 5-합창가무는 테릅시코레, 6-독창은 에라토, 7-찬가는 폴리힘니아, 8-천문은 우라니아, 9-서사시는 칼리오페라고 함!)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 것일까. 날개 달린 말 페가수스는 천상과 대지를 오가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의 등에 뮤즈가 타고 있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인간은 역사, 시, 천문 등의 학예를 통해 대지와 천상을 누비며 세계와 교통하려 한다. 학문과 예술이란 오래전부터 인간이 우주와 감응하며 소통하기 위한 도구였던 것이다. 그러나 간혹 야망에 찬 인간이 이를 오용하여 스스로의 파멸을 자처하고 만다는 것. 이것이 페가수스 신화가 전하고 있는 교훈인 것이다.
네모는 왕실과 도서관이다 -실수와 벽수 이야기
동양에서는 ‘가을의 대 사각형’을 어떻게 보았을까? 일단 누가 봐도 네모 모양인데 동양인들은 네모로 안 봤다. 동양인들은 작대기 두 개 라고 보았다. 동양 별자리 무시말자. 옛 선조들이 눈이 뼈서 그런 게 아니다. 별자리의 구성 원리 자체가 달랐기 때문이다. 동양별자리는 적도를 중심으로 균질하게 영역을 분할해 만든 것이다. 그래서 그리 밝지 않은 별들로 별자리가 구성되는 한편, 별자리의 분포가 고르고 조밀한 특징이 있다. 그런데 이때 분할의 기준이 된 시간권(이에 대해서는 지난 시간 글을 참고 하세요.)이 네모의 한 가운데를 관통한 것이다. 그렇기에 이 네모는 하나의 별자리로 묶일 수 있다. 마치 나란히 늘어선 성냥개비처럼 두 개의 작대기가 연이은 형상으로 각각 실수(室宿)와 벽수(壁宿)가 된 것이다.
동양 별자리가 별로 재미는 없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실수와 벽수에 얽힌 신화도 찾아보기 힘들다. 페가수스 이야기처럼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는 동양에 별로 없다. 그 이유, 동양인들은 28수 별자리를 천자와 제후들의 궁궐이라고 생각했다. 하늘을 다섯 영역으로 나누어 북극과 주극성들의 영역은 천자가 거하는 하늘의 중간, 즉 삼원이라 여겼고, 나머지는 동서남북 네 방위에 따라 각각 제후국들이 다스리는 영역으로 여겼다. 그 안의 별과 별자리들은 천자와 제후가 기거하는 궁궐과 마차들이라고 여겼다. 각각의 별자리마다 특정한 기능을 관장하는 궁실의 이미지를 덧붙였다. 대신에 그 점성적 의미, 즉 해석의 여지는 보다 넓고 깊다.
실수의 ‘실(室)’은 집을 뜻한다. 거처나 건물인 태묘(太廟)와 궁실(宮室) 또는 군량을 쌓아두는 곳간을 의미한다. 토목공사에 관한 일을 주관한다. 벽수는 동벽(東壁)이라고도 하여 건물의 벽을 의미하며 문필가의 별자리라고도 한다. 문운(文運)과 도서관 그리고 ‘실수(室宿)’와 같이 토목공사를 주관한다.
먼저 실수(室宿)에 대해 알아보자. 실수는 처서 무렵(8월 23일경)에 동쪽 하늘에 떠오르는 별이다. 실(室)은 집이나 방을 의미하는 글자다. 이 별은 글자 뜻 그대로 천자가 기거하는 궁실에 해당한다. 왕실의 태묘라고 보기도 했다. 태묘는 역대 임금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여기서 각종 제의와 의례가 행해진다. 그러기에 이 별은 국운을 점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실수의 대표별인 실성이 밝으면 천자가 쾌적한 곳에 거하고 선대 임금의 넋도 편히 쉴 수 있다. 반대로 실성이 흔들리면 종묘사직이 흔들리게 된다. 실성에 뭔가 변동이 있으면 궁실이 움직이므로 새 궁궐을 짓는 토목공사가 일어난다고 보았다. 실성이 심하게 가려지면 전쟁이 일어날 조짐으로 보기도 했다. 나라가 영 어수선 한 요즘, 우리 실성이 과연 안녕하신지 한 번 하늘을 올려다 볼 일이다.
다음 맞은편의 벽수(壁宿)에 대해 알아보자. 이 별은 백로 무렵(9월 8일 경)에 동쪽 하늘에 떠오르는 별이다. 벽(壁)은 역시나 말 그대로 건물의 벽을 뜻하는 글자인데, 여기서는 도서관을 의미하는 별자리라는 의미다. 이 별자리는 하늘의 도서관이었다. 이 별이 밝게 빛나면 천하의 책이 모이고 학문의 도가 이루어지고 현명한 군자가 벼슬자리에 오르게 된다. 특히 벽수의 핵심 별자리인 벽성을 이루는 두 별의 밝기가 환하고 균일해야 한다. 흐리거나 둘 사이의 균형이 깨지면 흉조로 여겼다. 벽성이 빛과 조화를 잃으면 임금이 문보다 무를 숭상하게 된다. 그래서 천하의 선비를 천하게 여기고 천하에 서적이 은폐되고 선비들은 은거하는가하면, 무인들이 활개를 치는 시대가 온다고 한다. 군부독재 시대는 끝났지만 천하의 어진 청년들이 손가락을 빨고 있는 청년 실업의 시대, 우리의 벽성은 과연 안녕하신지 하늘을 올려다 볼 일이다. 가을 하늘의 네모가 과연 온전히 보이는가?^^
흥미로운 것은 동서 공히 가을 하늘의 네모를 보고 학문을 떠올렸다는 것이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 게 근거 없는 억지 주장이라던데, 과연 그런 것 같지만은 않다. 음양오행으로 가을은 음기가 자라나는 계절, 외적으로 뻗어나가기를 그치고 무르익고, 강밀해지기를 요구하는 시기다. 가을의 음기를 받아 만물은 성숙의 길로 한 걸음 다가간다. 식물은 가을에 열매를 맺는다. 인간은 성숙을 위해 무엇을 하는가? 바로 공부다. 공부를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고 점검해본다. 앞선 선인들의 말씀을 배우며 자기를 고양시키려 한다. 자연의 호흡에 밀착했던 고대인들은 자연히 이 사실을 알았다. 가을은 공부의 계절! 페가수스 신화가 말해주듯, 공부로 나를 연마하는 것이야말로 천지자연과 소통하는 길인 것이다. 가을의 문턱이 열렸다. 북드라망과 함께 이 가을 알찬 공부의 열매를 맺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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