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세상의 중심엔 내가 있다

북극성, 중심의 윤리학


손영달(남산강학원 Q&?)


장작패기에서 도(道)를 읽다


군복무 시절, ‘장작병’이라는 것이 있었다. 장작병이란 말 그대로 장작을 패는 병사다. 아침밥 먹고 저녁밥 먹을 때 까지 종일 장작만 팬다. 군인들은 이 보직에 열광했다.^^ 시간 잘 가고, 잔소리 하는 사람 없고, 하고 나면 근육도 생긴다. 언젠가 애인과 펜션에 놀러가 빛나는 어깨 근육을 뽐내며 장작을 팰 날을 꿈꾸며, 군인들은 다투어 장작병이 되고자 했다. 하지만 장작은 아무에게나 자신을 허락하지 않는다. 무식하게 힘으로 달려드는 애송이들의 도끼는 빗맞거나 씹히거나 둘 중에 하나다. 경쾌한 소리를 내며 쩍쩍 장작을 가르는 고수의 도끼질, 이건 나무의 결을 읽어 내는 혜안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부모 자식 간에도 안 알려준다는 그 비방을 여기 전격 공개한다.


다 쪼개놓을 거야~~!! 저것들!! 빨리빨리 장작 패는 비법을 가르쳐줘~~!!


『장자』에 보면 소 잡기의 달인 포정(庖丁) 이야기가 나온다. 한 편의 춤곡을 보듯, 우아한 리듬을 타며 소를 잡았다는 그의 칼은 19년 동안 수천 마리의 소를 잡았어도 늘 갓 숫돌에 간 듯하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 도(道)로써 소를 잡는 것이다. 소를 소로 보지 말고 그와 혼연일체가 되면, 살과 뼈가 이루는 미세한 결과 틈이 눈에 들어온다. 그 길을 따라 칼을 놀리면 ‘흙덩이가 땅에 떨어지듯’ 뼈와 살이 툭툭 절로 갈라진다. 무릇 장작패기의 도도 이와 같으니, 먼저 장작과 혼연일체가 되어 장작-되기를 시도해야 한다. 그러면 나무의 도(道)가 보인다.


나무의 몸통을 굴려보라. 분명 한 면이 어두침침할 것이다. 모르겠으면 나이테를 음미해보라. 어딘가 원들이 조밀하게 밀집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 이곳이 북쪽이다. 나무는 북(北)을 등지고 남(南)을 향해 자란다. 그래서 남쪽을 향한 나이테는 넓고, 무르며, 밝은 빛깔이 난다. 반면에 북쪽의 나이테는 조밀하고, 단단하며, 빛깔은 어두침침하다. 바로 이곳, 나무의 북쪽에 도끼를 대라. 이곳은 나무의 숨통이 모인 길이다. 북에서 남으로 뻗어나간 나무의 보이지 않는 길이 바로 여기로 통한다. 도끼로 이곳을 내리치면 나무는 경쾌한 소리를 내며 두 동강 난다. 나무의 기준점이 나이테 동심원의 중앙이 아니라 북쪽의 어딘가라는 점. 보이지 않는 길이 북쪽으로 통하고 있다!


군대 가서 장작병이 되라고, 여친한테 점수 따라고 지금 이 얘기를 하는 거 아니다. 장작패기라는 작고 사소한 일에서 우주의 이치를 읽어 보자는 것이다. 불쏘시개로 쓰일 나무개비도 하나의 소우주다. 땅의 바위도, 바위 밑에 꼬물거리는 벌레도, 그리고 그걸 보는 우리 인간들도, 모두 하나의 소우주라는 점에서 같다. 우주의 섭리는 이들 모두에게 공히 내재되어 있다. 길은 북쪽으로 통한다는 것, 이것은 비단 통나무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북에서 남에 이르는 보이지 않는 축, 그것은 곧 우주 만물을 이루고 있는 뼈대요, 길이다.


고개 들어 하늘을 보라. 하늘의 중심은 천구(天球)의 한 가운데가 아니다. 춥고 어두운 북쪽 하늘 어딘가, 거기 북극성이 있다. 디카 동호회 회원들이 별 일주 사진을 찍기 위해 카메라를 고정시키는 별, 실크로드를 횡단하던 그 옛날 상인들이 길잡이로 삼던 별, 고대 이집트인들이 영혼이 돌아가는 별이라 믿었던 별, 그곳을 향해 피라미드에 작은 창문을 내던 별. 그것이 바로 부동의 별, 중심의 별, 북극성이다. 이 별은 우리에게 북쪽의 의미를 각인시켰다. 그곳은 중심이자 기준이 되는 방위이다. 홀로 움직이지 않으면서 뭇 존재들의 조화와 운행을 주관한다. 북극성은 곧 우주의 축이 되는 별이다. 


북극성, 세계의 중심이자 우주의 중심. 그것을 중심으로 모든 별들은 돌고 돈다.


북극성과 중국 천문학


중국 천문학은 북극성 중심의 체계를 가지고 있다. 고대 문명권에서 대체로 태양을 중심으로 한 천문학이 싹 튼 것과 비교 되는 지점이다. 여기선 태양이 지나다니는 길, 곧 황도(黃道)가 하늘의 중심이다. 지구가 공전하며 만들어 내는 태양의 궤적은 인간에게 씨 뿌리고 거두는 농사의 시기, 그리고 계절의 변화를 일러주었다. 중국인들 역시 태양의 운행을 눈여겨봤지만 그 길이 하늘의 중심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일찍이 바퀴와 수레를 만들어 냈던 중국인들에게 회전하는 천체의 운행에 어딘가 축이 되는 지점이 있다는 생각은 자연스런 것이었으리라. 그렇기에 중심이 가운데가 아니라 북에 있다는 사실이 이들에겐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태양의 길 말고 변하지 않는 정점, 바퀴의 굴대 같은 곳을 찾았고 그곳을 기준으로 삼았다. 그 별이 곧 북극성이다. 멀리 주나라 시절부터 중국인들은 북극성을 하늘의 중심이라 생각했다.


북극성(北極星)의 극(極)은 세계의 정점을 잇는 우주의 축이라는 말이다. 중국인들은 북극성을 바퀴의 축, 혹은 저울대(權) 같은 이미지로 떠올렸다. 북쪽 하늘에 얼어붙은 듯 붙박인 고정점이 아니라, 세상이 변하고 역동할 수 있게 하는 축이라는 것이다. 『진서』에서는 이 별을 하늘이 회전하는 지도리(天之樞)라고 생각했다. 지도리는 텅 빈 중심이다. 비어있기 때문에 열리기도 하고 닫히기도 한다. 한 가운데 붙박여 있지만, 결코 녹스는 법이 없다. 중심은 운동과 변화를 낳는다.


여기서 중국인들이 생각했던 중심의 의미를 엿볼 수 있다. 중(中)이란 결코 물리적인 한 가운데가 아니다. 온갖 변화, 그리고 그것이 야기하는 대립적인 국면들을 포괄 하는 자리, 그것이 중이다. 그렇기에 중은 특수한 어느 한 지점이어선 안 된다. 불변의 고정점이어서도 안 된다. ‘입장 아닌 입장’*을 견지하며 계속 굴러가야 한다. 마치 스피노자가 ‘중심으로부터 동일한 거리에 있는 점들의 집합’이 아니라 ‘선분의 회전 운동’으로 원의 정의를 바로잡듯, 중국인들은 세계를 변화하고 운행하는 그 자체로 사유하려 했다. 중이란 변화를 아우르는 정점, 그렇기에 어느 하나가 아니면서, 모든 것일 수 있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


*프랑수아 줄리앙, 『현자에게는 고정관념이 없다』, 182쪽


그 까이꺼 뭐 중심 잡는 게 어렵다고^^ 요렇게 중심을 잡으려면 신체적인 수련이 필요하다고! 아무리 중심, 중심 외쳐봐도 몸이 안 따라주면 말짱 도루묵이여~~


(中)의 원리는 천지만물을 이루는 우주의 이치이다. 북극성을 통해 이 원리를 체득한 고대 중국인들은 이를 정치 윤리로 밀고 나갔다. 혼란으로 가득한 인간사, 천체의 조화로운 운행을 본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일찍이 공자는『논어(論語)』의 한 대목에서 북극성에 대해 말한 바 있다. 「위정(爲政)」편의 첫 구절에 그는 이렇게 적었다.

덕으로 다스림은 비유하자면 북극성은 제자리에 있고 여러 별들이 그를 향하는 것과 같다.

(子曰 爲政以德 譬如北辰 居其所 而衆星共之)


북진(北辰)이란 북극성을 일컫는 말이다. 지리멸렬한 춘추전국시대를 겪으면서, 그리고 진한대의 통일 국가를 경험하면서 사람들은 통일과 조화에 관심을 기울였다. 인간 사회의 중심인 천자는 북극성의 덕을 이어받아 질서의 중심축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군주가 패권으로 세상을 제압하는 것은 공자가 생각한 우주적 정치의 모습이 아니다. 뭇 제후들이 스스로 복종하게 해야 한다. 그래서 천자에게는 세상을 감화시킬 ‘덕(德)’이 요구되었다. 덕이란 대립하는 입장들의 합의점을 이끌어 내고 강요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각자의 자리에서 저마다의 입장 그대로인 채 조화롭게 운행되게 하는 길을 찾는 것이다. 천자는 머물러 있는 듯 하지만 상황에 맞게 부단히 그 중심을 조절해야 한다. 매 순간 때에 맞는 판단을 내려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中)의 윤리학이 나온다. 어떤 측면에 안주하지 않으면서도 항상 모든 가능성을 온전히 열어 놓은 상태, 매 순간 저울추를 움직여 가며 때에 맞는 판단으로 균형 있는 삶을 살아가는 자세. 이것이 옛 선인들이 추구했던 지혜로운 현자의 삶이다. 이때 그 모델이 된 것은 저 하늘의 북극성이었다. 

내 안에 북극성 있다


다른 한편 북극성은 소우주인 인간의 몸을 이해하는 데도 기여했다. 『황제내경』 영추에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가 나니, 사람은 머리가 둥글고 발이 모난 것으로써 거기에 상응합니다.(天圓地方 人頭圓足方以應之)”라 하여 인간과 우주의 상응을 설명하고 있다. 머리가 둥근 것은 하늘을 본받은 것이고, 발이 평평하게 각진 것은 땅을 본받은 것이다. 일 년에 365일이 있듯이, 인간에게 365개의 뼈마디가 있고, 일 년에 사계절이 있듯이 인간에게는 팔다리 사지가 있다. 그리고 하늘의 북극성에 상응하는 전체를 아우르는 중심점이 인간에게도 존재한다. 현대 의학에서 뇌(腦)라 부르는 머리 한 가운데, 동양에서는 이를 니환궁(泥丸宮)이라 부른다.


하지만 니환궁은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뇌와 같지 않다. 니환(泥丸)이라는 말은 불교 용어인 니르바나(nirvana, 열반)에서 왔다. 이는 번뇌를 소멸시킨 깨달음의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오직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사람의 머리야만이, 북극성처럼 우리의 전체를 조화의 도로 아우를 수 있다. 하지만 번뇌 속에 살아가는 보통의 우리 삶 가운데 그것은 희뿌연 구름에 가려져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중심 없는 패닉의 상태를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바로 자신의 일상과 몸을 돌아보라. 우리는 얼마나 중심 없이 살고 있는가. 하루하루가 얼마나 충돌과 혼란의 연속들인가.


공자는 『논어』「양화(陽貨)」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본성은 서로 비슷하지만 습관에 따라 서로 다르고 멀어진다.(性相近也 習相遠也) 습관이 우리를 멀게 만든다. 조화와 균형의 저울추, 내 안의 북극성으로부터. 일상의 편리를 위해, 우리는 익숙한 대로, 길들여진 대로 살아간다. 그러면서 자신의 현재 모습을 직시하지 않는다. 습관은 우리가 일상적 편리를 위해 자기의 중심점을 맞바꾼 결과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내 안의 북극성은 가려져 잊혀진 것일 뿐, 사라져 없어진 것은 아니다. 전환의 여지는 상존한다. 즉, 자각 없이 살아가고 있는 일상적 자기로부터 떨어져 나올 때 숨은 내 안의 빛과 대면할 수 있다. 이것이 다름 아닌 수행의 목표다. 내 안의 북극성, 내 존재의 중심을 찾아가는 길. 그렇다면 그 길은 어떻게 찾아갈 수 있는가?


세살 버릇 여든 간다는 속담이 있다. 이것들... 좀 걱정된다^^


자기 안의 우주와 합일하려 했던 도가수행자들은 북극성을 신격화 한 ‘태일(太一)’과의 합일을 위해 노력했다. 우리 몸의 오장육부에 마음과의 통로가 있고 각각을 지키는 신이 있지만, 그 중 제일 중요한 것은 그 신들 중의 우두머리인 태일신이다. 태일과 만난다는 것은 마음의 중심점을 다잡는다는 것과, 몸의 각 장부들과 기운이 조화롭게 운행되게 한다는 두 가지 의미를 모두 포함한다. 이를 ‘내단 수련’이라는 구체적인 수행법으로 승화시켰던 도가들은 명상을 통해 혼잡스런 의식을 고요히 가라앉히고, 호흡과 의식집중을 통해 몸 안의 기를 원활히 소통시키는 두 가지 길을 모두 중요시했다. 이들에게 몸과 마음은 둘이 아니었다. 몸 안의 기가 순리대로 소통될 때 마음의 번뇌도 가라앉는다. 반대로 의식이 고요히 가라앉을 때 몸의 기운 역시 정미로울 수 있다. 몸과 마음을 다잡고 내 안의 신을 찾아 떠나기. 이것은 자아의 일상적 습관을 깨고 나오기 위한, 그리고 내 안의 북극성과 만나기 위한, 도가 나름의 전략이었다.


갈등과 번뇌로 시름에 겹다면, 고개들어 북쪽 하늘을 보라. 힘찬 도끼질 한 방에 산란한 마음을 다잡아 줄 부동의 별이 저 하늘 어딘가에, 그리고 내 마음속에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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