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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고전 이야기 ▽/왕양명마이너리티리포트

[왕양명의마이너리티리포트] 2부. 슬기로운 유배생활(1) - 군자는 어떻게 유배지와 만나는가

by 북드라망 2022. 3. 15.

왕양명의 마이너리티 리포트 - 슬기로운 유배생활
2부. 슬기로운 유배생활(1) - 군자는 어떻게 유배지와 만나는가



치우, 상 그리고 묘족 - 왜 순(舜)이 아니라 상(象)이었을까

귀주(貴州). 귀주는 북쪽으로는 사천, 서쪽으로는 운남, 동쪽으로는 호남성, 남쪽으로는 광서성장족자치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많은 소수민족들이 살고 있으며 중국 전체에서 가장 소득이 낮은 곳입니다. 지형이 험준하다보니 왕래가 적어서 고립지가 많기 때문인데, 정식으로 중국사에 편입된 것도 명나라 때부터이니 실제로 귀주는 오랫동안 중국의 외부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게 귀주는, 양명학을 공부하게 된 이래 ‘언젠가’ 꼭 가보고 싶은(가 봐야 하는?) 장소였습니다(양명의 연보에서 귀주는 양명이 깨달음을 얻은 곳이라는, 다시 말해 양명학적 사유가 본격화 된 곳이라는 명확하고 특정된 시공간적 좌표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 바람은 2018년 10월, 실현되었습니다. 2005년 봄에 처음 <전습록>을 만났으니 대략 십수년의 시간이 경과된 셈입니다. 그 사이에 저는 양명과 양명학을 주제로 강의를 하는 사람이 되었고, <전습록>과 양명 관련된 작은 리라이팅 책을 한 권 썼고, ‘낭송용’ <전습록>을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아니 무엇보다도 양명을 그리고 양명학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배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양명이 아니었다면 제게 귀주는 아무 의미도 없는 곳이었다는 뜻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처음 귀주엘 갔던 그 무렵까지도 저에게 귀주는 그저 상상된 땅이었고 이미지화된 땅이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귀주를 ‘책으로’ 배웠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래서였을 겁니다. 처음 귀주, 그리고 묘족 사람들이 모여사는 ‘서강천호묘채’에서 맞닥뜨린 기묘함과 경이로움은 그간 제가 머릿 속에서 상상했던 이미지의 현실화가 주는 감동이었다기보다는 그저 낯설고 이국적인 풍광에 대한 찬탄에 더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양명학의 성지 순례라던 농담반 진담반의 기대와 흥분이 수천년에 걸친 삶의 현장 앞에선 한낱 관념 조각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달까요. 기분 나쁘다거나 그런 의미가 아니라 비로소 어떤 실감이 드는 듯한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처음 귀주, 그리고 묘족 사람들이 모여사는 '서강천호묘채'에서 맞닥뜨린 기묘함과 경이로움은 그간 제가 머릿 속에서 상상했던 이미지의 현실화가 주는 감동이었다기보다는 그저 낯설고 이국적인 풍광에 대한 찬탄에 더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상사기(象祠記)>는 여러가지 면에서 흥미로운 글입니다. 일단 ‘상사(象祠)’라는 존재 자체가 여간 이채로운 게 아닙니다. 배경 지식이 전무했다면 아마 코끼리(象)를 기리는 사당이라 여겼을 지 모릅니다. 귀주에 코끼리가 산다고(과거엔 살았다고) 상상했을 수도 있고, 하여 묘족(그리고 동족, 이족 등 소수민족 사람들) 사람들에게 코끼리라는 영적 동물이 사당을 지어 기릴 정도로 깊숙하게 연결되어 있다… 하는 식으로 관념과 관념을 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상사는 코끼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상(象)은 고대 중국의 성인 순(舜)임금의 이복 동생입니다.

 


왜 순(舜)이 아니라 상(象)이었을까.
상사를 만난 건, 귀주성 양명 로드의 하이라이트였습니다. 상을 기리는 사당이 아직 남아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지만(책에서 봤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까닭에 전혀 기억에 남아있지 않았더랬다), 양명학을 공부한다 하면서도 <상사기>를 제대로 읽어본 기억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전습록>에 실려있지 않다). 그런데 용장에서 한 시간여 차로 이동해서 찾아간 상사는 생각보다 멋진 사당이었습니다. 왜 상이었을까요?

이 질문에는 양명-귀주-묘족(그리고 이족)을 잇는 흥미로운 연결 고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연결을 통해 뜻밖에도 ‘양명학’의 어떤 본질을 이해할 것도 같은 묘한 흥분이 생겼습니다. 이를테면 묘족인들의 생활가옥 천여채가 모여있는 ‘서강천호묘채(西江千戶苗寨)’에서 뜻밖의 이름 치우를 만납니다. 치우는 한국의 축구 응원단 ‘붉은악마’가 상징으로 쓰고 있는 고대사의 전사입니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치우는 용감한 전사인데 탁록의 전투에서 황제(黃帝)에게 패하여 쫓겨납니다. 누를 황자, 황제는 <사기>에서 중국사의 기원으로 역사의 맨 앞자리에 놓이는 인물입니다. 이후 중국의 모든 나라들은 이 황제의 계보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반면 치우는 구려(九黎)의 군장이었고, 동이족의 정치연합 지도자였습니다. 맞고 틀리고를 떠나 느닷없이 치우가 등장한 배경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서울에서 비행기로만 열 시간 이상 걸리는 이 먼 땅에서 왜 다시 치우의 이름이 보이는 것일까요. 구려민=동이족을 기원의 정체성(Identity)으로 삼은 붉은 악마 한국인과 황제(黃帝)족에게 패하여 서쪽으로 이동한 삼묘(三苗)=먀오족이 치우의 후손이라는 출생의 비밀을 공유하게 되는 순간입니다.(cf. 청나라 건국후 만주족이 자신들의 기원을 백두산에 근거하면서 자연스럽게 조선과 공통 뿌리를 공유하게 되던 장면이 떠오릅니다^^)

묘족들이 살고 있는 ‘서강천호묘채’는 오늘날 관광객을 수입원으로 하는 곳이 되어버렸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천수백년 묘족의 역사(최소 육백여년간)가 살아 숨쉬는 곳입니다. 아직도 그곳은 묘족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입니다. 해발 고도가 1,600여미터 쯤인 깊은 산속에 산채가 무려 1,300여호 가량이 있습니다. 설악산을 거의 다 올라간 그 즈음에 느닷없이 천 여채의 집들이 눈앞에 펼쳐진다고 생각해 보면 됩니다. 그곳에 사는 이들중 9할 이상이 묘족인들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뜻밖의 이름을 만나게 됩니다. 이 묘족들이 자신들의 기원 조상으로 치우를 내세운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사실은 직접 현장에서 보고 듣기 전까지는 알 수도 없었고, 또 그냥 말로만 들어서는 제대로 된 실감도 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치우가 여기서 왜 나와… 이런 느낌?

귀주는 명나라 때 비로소 중국의 내부로 편입되었습니다. 지형이 험준할 뿐 아니라 원주민(묘족 등 소수민족)들의 저항이 심해 실제로 지배권을 행사할 수 없는 땅이었습니다. 묘족의 경우만 해도 중국 내에서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습니다. 묘족은 중국 내 소수민족중 여섯번째로 인구가 많은(!) 민족입니다. 묘족 내에서도 사는 지역에 따라 서로 확연하게 다른 복식과 풍속 등을 갖고 있습니다. 지금은 중국 서남부로 묘족이 집중화되어 있지만 이것은 사실 묘족이 오랜 세월 한족과의 끊임없는 분쟁과 갈등을 통해 계속 이동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동했다는 말은 포획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포획되지 않으려고 도주하는 겁니다. 싸울 수 있을 때까지 싸우고, 어떤 임계점을 넘어 더이상 싸움을 유지할 수 없게되는 때가 되면 이동(도주)하는 겁니다. 족(族)트리피케이션(!)이라 할까요? 하여 베트남, 라오스, 태국 등에도 묘족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이쯤 되면 여기엔 어떤 구도가 보입니다. 제국(황제/한족) 대 부족연합(치우/묘족 등 소수민족), 포획자 대 도주자, 주류 대 비주류, 다수성 대 소수성…. 등등. 그런데 여기에 재미있는 한 가지 사실이 더 있습니다. 좀 이상한 말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현재의 묘족이 묘족이 된 배경에 주자(朱子)가 간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현재의 묘족을 고대 삼묘(三苗)의 후손으로 계보화한 인물이 주자였습니다. <서경> ‘순전’에 따르면 “순임금이 삼묘를 삼위(三危)로 쫓아냈다(竄三苗于三危)”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연의 일치일까요? 순임금, 상, 주자, 양명… 묘족을 중심으로 기묘하게 얽혀 있는 셈입니다. 단지 우연이라 해도, 흥미로운 우연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글_문리스(남산강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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