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고미숙, 『몸에서 자연으로, 마음에서 우주로』- 앎을 향한 운동

고미숙, 『몸에서 자연으로, 마음에서 우주로』

— 앎을 향한 운동

 

우리는 알지 못하면 살 수가 없죠. 매일매일 무언가를 배워야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아는 만큼의 힘으로 사는 거예요. 그래서 인류를 호모 사피엔스라고 하는 겁니다. 더 정확히는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죠. 사피엔스를 사피엔스한다. 다시 말해 생각을 또 생각한다는 의미잖아요. 동물이나 벌레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매일 뭘 배워야 먹고 살잖아요. 그렇다면 생명과 앎은 분리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죠. 아주 중요한 테제입니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꽤 거룩하고 거창한 질문이지만, 답은 의외로 소박합니다. 앎을 향한 운동. 그래서 이걸 포기하고 외부의 기준에 맞춰 버리면 소외의 연속이 되는 거죠. (고미숙, 『몸에서 자연으로, 마음에서 우주로』, 19쪽)


‘자연’이란 정말이지 문제적 개념이 아닐 수 없다. 눈에 보이는 들판과 나무 동물들을 ‘자연’이라고 묶는 순간 ‘나’는 거기서 빠져 나온다.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소외’되었다고 한다면, 그 ‘소외’의 구조는 아마 그러할 것이다. ‘나는 자연을 너무 사랑해’, ‘자연을 보호해야지’, ‘자연으로 돌아가야 해’ 같은 식의 친(?)자연적 언사들마저 그 안에 모종의 ‘소외’를 품고 있게 된다. ‘자연’이 문제적 개념인 이유는 그 때문이다. 사랑해도, 이용해도, 혐오해도 ‘그것’에 ‘대해’ 어떻게 말 하더라도 그 ‘말’은 거기에 가 닿지 못하고 다만 우리가 거기에서 떨어져 있다는 사실만을 재확인 할 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아직 ‘몸’ 안에 있다. 우리 것 중에 그것만큼 애쓰는 것이 또 있을까. 사실은, 우리가 저편에 두고 ‘자연’이라 부르는 것 안에 살고 있다. ‘몸에서 자연으로’라는 말에는 그런 의미가 있다. 멀리 떠나 온 것 같지만 사실은 거기에 살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그 ‘몸’이 사실은 ‘마음’에 다름 아니다. 예를 들어 만성적으로 소화가 잘 안 되면 쉽게 화를 내는 성격이 되거나, 이를 뽑고 나면 남은 생애에 아무 일도 못할 것 같은 무기력감에 휩싸인다거나 하는 것들이다. 요지는 내 몸의 상태가 어떠한가, 또는 마음의 상태가 어떠한가에 따라 그에 조응하는 몸과 마음의 상태가 바뀐다는 의미다. 

그 말은 무엇인가? 몸에서 일어나는 어떤 변화, 마음에서 일어나는 어떤 변화를 잘 살피지 않는다면 결코 소외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말과 같다. 왜냐하면, 우리 몸이 이미 바깥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역으로 이렇게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바깥을 더 잘 알수록 몸도 더 잘 알게 된다고 말이다. 아주 먼 옛날의 인류가 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고, 누워 쉴 시간과 일어날 활동할 시간을 구분해 왔던 것처럼 말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자신을 바깥으로 잘 열 수 있는지, 바깥을 얼마나 내 안으로 잘 받아들일 수 있는지 하는 문제다. 그러니까 살아가는 일이란 결국, 알아가는 일에 다름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미 너무 많이 닫혀있고, 너무 많이 굳어있다는 데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우리에겐 더 복잡한 앎이 강요된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나’를 아는 것조차 그렇다. 지금 잠깐 멈춰서 자신의 ‘마음’이 어떤지 살펴보면 어떨까? 너무 복잡하고, 너무 뜨겁지는 않나. 언제나 ‘지나침’을 특징으로 하는 이 삶을 해체해 볼 필요가 있다. 소외를 넘어, 제대로 살아가는 일에 어떤 ‘직면함’이 필요하다면 바로 그때 필요할 것이다.

‘자연’은 문제적 개념이지만, 멀리 있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바깥에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내디뎌야 하는 한 걸음은 바깥이 아니라 자기 안으로 향해야 할지도 모른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밖으로 나오게 되는 역설, 이 역설을 긍정할 수 있으면 좋겠다.

설정

트랙백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