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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하고 인사하실래요 ▽/이우의 다락방

[이우의다락방] 역사, 시공간을 탐구한다는 것

by 북드라망 2022. 2. 24.

역사, 시공간을 탐구한다는 것
-하야시다 신노스께, <인간 사마천>-



1. 성은 사마, 이름은 천

사마천은 <사기>와 함께 따라다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들어본 이름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사마천, 그리고 사기. 이렇게 두 단어만 알지 그 이상은 전혀 알지 못했다. <인간 사마천>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 책이다. 앞부분은 사마천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이고, 뒷부분은 <사기>에 대한 내용인데, 내가 이번에 읽게 된 부분은 사마천의 생애 부분이다. 한 사람의 생애일 뿐인데 내가 역사적 지식이 없어서 도통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일단 책의 내용을 따라가면서 사마천의 생애를 그려 보았다.

사마천은 중국에서 ‘역사의 아버지’라 불릴 정도로 매우 유명한 역사가인데, 그에 비해 사마천에 대해 잘 알려진 바는 별로 없다. 심지어 이 책에서도 대략 기원전 1세기의 사람이라고 가정을 하고 있다.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지만, <태사공행연고>에 근거해서, 사마천이 태어난 해를 기원전 145년으로 잡는다.

사마천은 한나라의 사람이다. 한나라는 진나라 이후의 중국의 통일왕조로, 유방이 기원전 206년에 세운 나라이다. 중국의 문자를 ‘한문’, 중국 사람을 ‘한족’, 그리고 다른 여러 ‘한약’과 ‘한시’등의 단어에 ‘漢’이라는 문자가 들어가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한나라는 중국 역사의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나라 중 하나이다. 사마천이 살았던 시대는 한 무제가 다스렸는데, 그는 한나라의 7대 황제였다. 한 무제가 열여섯의 나이로 즉위하게 되며 약 54년간 통치한 한나라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한 무제는 중국의 정체성을 설립시킨 군주이며, 중화의 영토를 동, 서, 남, 북으로 모두 넓혔기 때문에 중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3대 명군에 오르게 된 황제이다. 사마천은 그를 위대한 군주라고 칭하긴 하지만 그가 하는 업적을 모두 찬양하지는 않았다.

사마천이 태어난 곳은 한나라의 하양(夏陽)이라는 곳인데, 이 근처에서는 황하의 나루터로 유명한 나루터 용문이 있다. 용문은 ‘등용문’ 전설이 유래된 곳이기도 하다. 용문 부근은 나루터 때문에 황하의 흐름이 급격히 빨라지는데 그곳을 지난 물고기가 용이 된다는 전설이다. 아마 사마천도 이 전설을 들으며 자라지 않았을까 싶다. 사마천은 소년 시절동안 부친과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하며 살았다.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은 집안 대대로 주나라의 왕실의 사관 직무를 맡아왔다고 자랑스러워했기에, 사마천은 공부에 몰두할 수 있었다. 이 노력 덕분에 사마천은 열 살이 되었을 때 고대 문자로 쓰인 경서를 완전히 암송할 수 있었다고 한다. 사실 원래 사마씨의 집안은 ‘사마’의 성을 갖고 있지 않았다. 원래 사마는 군관의 직무를 가리켰는데, 역사관의 지위와 멀어지자 바꾼 성이 바로‘사마’였다. 나는 처음 ‘사마천’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이름이 ‘마천’이고 성이 ‘사’인 줄 알았는데, 성이 사마고 이름은 마천이 아니라 천이라는 것을 알고는 내 무지에 다시금 놀랐다.

기원전 770년도부터 춘추시대에 접어들었을 때, 주나라 왕실의 권위는 실추되었고 그에 더하여 반란까지 일어났다. 이 때 사마씨 가문은 진나라, 조나라, 그리고 위나라로 흩어지게 되었다. 사마담과 사마천 부자로 연결된 가계는 진나라로 이동한 일족이었는데, 이들의 조상 중에는 역사에서 유명한 사마착과 사마기가 있다고 한다.

사마담은 임종 전에 사마천에게 ‘우리 집안은 근래에 몰락하였다.’라고 말한다. 사마담은 그의 윗대 조상이 맡은 직책 중 가장 영광스러운 직책인 태사령으로 있었다. 태사령(太史令)은 문학과 역사, 천문과 역법에 익숙하여 황제의 자문 역할을 했다. 중대한 제도의 개혁이나 의전(儀典)과 의례의 절차를 제정하고 실시하는 일에도 태사령은 모두 참가했다고 한다. 태사령의 임무는 역사 기록과 석실 및 금궤의 책을 모아서 엮는 것, 곧 사서 및 국가의 장서를 모아서 이를 엮어내는 것이었다. 태사령이 된 후에 그는 일가를 데리고 무릉으로 이주한다.

      

2. 사마천의 여행과 기록

사마천이 <사기>를 쓰게 된 가장 큰 영향은 그의 아버지 사마담 덕분이었다. 어린 나이에 사마천이 고대 문자로 씌여진 책을 암송하는 것을 보고 부친 사마담은 그 당시 대유학자라 불리던 동중서의 제자로 들어가게 한다. 동중서는 박사 관직에 있었고, 유교에 대한 학식이 매우 깊었기에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는 육예(<시경>,<서경>, <역경>, <예기>, <악기>, <춘추>)를 교육과정으로 만듦으로써 박사 관직을 두게 되었는데, 이것이 오경박사 제도이다. 동중서는 오경 가운데 <춘추>를 특히 중시하였는데, <춘추>를 해석한 책인 <춘추공양전>을 자신의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그래서 사마천이 동중서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은 어찌 보면 매우 당연한 것이었지만, 사마천은 동중서와는 달리 무제의 정치 중 천명에 위배되는 행태를 매우 싫어하였다고 한다.

사마천은 스무 살이 되던 해, 벼슬길에 오르려는 다른 제자들과는 다르게 여행에 나선다. 그 때가 기원전 116년이었다. 그 당시에 넓디넓은 중국을 여행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을 것같다. 하지만 “어느 사이엔가 이 외로운 여행자는 길고 힘겨운 고독과의 싸움에서 인간의 생사, 애환이 복잡하게 뒤얽힌 역사의 드라마를 구상할 만큼 상상력의 날개를 굳건히 채득하기 시작하였다”(<인간 사마천, p.60>) 그가 여행을 가게 한 것도 부친 사마담이었는데, <태사공서>에 현실감을 넣고 싶어 아들에게 부탁하였다고 한다. 그가 20세 때 간 여행은 약 2-3년이 걸린다.

 

나이 스무 살 때에는 남쪽 장강(長江)과 회하(淮河)를 돌아보았으며, 회계산(會稽山)에 올라서, 우(禹)임금이 죽어서 들어갔다고 하는 동굴을 탐험하였으며, 순(舜)임금이 매장된 구의산(九疑山)도 살펴보았으며, 원수(沅水)와 상수(湘水)에 배를 띄우고 유람을 하였다. 그러다가 북쪽으로 문수(汶水)와 사수(泗水)를 건너서, 제(濟)와 노(魯)나라의 수도에서 학업을 닦고, 공자가 남긴 풍속을 살펴보았으며, 추현(鄒縣)과 역산(嶧山)에서는 향사(鄕射)를 살펴보았다. 파현(鄱縣)과 설현(薛縣)과 팽성(彭城)등에서 재앙과 곤란을 겪었으며, 양(梁)과 초(楚)나라를 거쳐 고향으로 돌아왔다. <태사공자서>


사마천은 장안에서 출발하여 남양으로 나와 양자강으로 가는 여행을 하였다. 장안에서 출발하여 장각, 회수와 회계산을 찾았다고 한다. 그가 한 여행 견문이 <사기>의 소재로는 그다지 많이 사용되지는 않았으나, 책에서 생동감과 정확한 표현들이 그의 여행에서 대부분 나온 것이라고 한다. 그는 여행을 통해 풍토나 지리, 교통 루트를 정확히 알게 되었다. 이 외에도 여행을 통해 사마천은 여러 민족들을 인식할 수도 있었고, 여행지에서 직접 보고 들은 것들을 기반으로 인물들을 평가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스무 살 때의 여행이 아니더라도 황제의 의례나 봉선(封禪)에 참여하게 되며 사회나 재정 상태를 직접 보았다고 한다.(봉선은 제왕이 하늘과 땅에 왕의 즉위를 고하고, 천하의 태평함에 감사하는 의식이다. 원래 봉선은 진나라의 시황제가 처음 실시한 것으로, 이 의식에 대해 누구도 알 수 없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무제는 즉위 초부터 봉선을 행하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다.) 여행을 끝낸 그는 벼슬길에 나아가 낭중이라는 관직에 오르게 된다. 낭중은 신변을 호위하는 시종관으로, 비록 낭관직 중 최하위직으로 그리 좋은 자리는 아니었으나 눈에 띌 기회가 많아 고관을 노리기 좋은 자리이기도 했다. 사마천은 낭중으로 일하며 그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칠 이릉이라는 자를 만나게 된다.

사마천은 나이 서른다섯에 무제로부터 군현제를 실시한 이민족 지구를 실정을 시찰하도록 명령을 받는다. 덕분에 중국 서북 지구도 직접 경험해 볼 수 있었지만, 그 시찰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 사마담은 병으로 쓰러져 있었다. 사마담은 태산에서 천지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의식인 봉선을 행하러 가다가 병환으로 쓰러지게 된 것이었다. 죽음을 앞둔 사마담은 사마천에게 이런 유언을 남긴다.

 

내가 죽으면 어는 반드시 태사가 되어라. 태사가 되면 내가 저술하고자 했던 것을 잊지 말아라. 효라고 하는 것은 어버이를 섬기는 것이 첫째이고, 이어서 군주를 섬기는 데에 이르는 것이며, 마지막으로 입신양명(立身揚名)함으로써 완결되는 것이다. 큰 효란 이름을 후세에 드리워 부모를 빛내는 데 있는 것이다. <태사공서>

 

이 유언을 들은 사마천은 눈물을 흘리며 반드시 <사기>를 완성하겠다고 다짐하였고, 한순간도 사마담의 유언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부친의 유언대로, 사마천은 서른여덟의 나이로 태사령의 자리에 오른다.

태사령에 오른 지 팔 년이 지난 후에, ‘이릉지화(李陵之禍)’라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릉은 이 때 5,000명의 군사로 50,000명의 군사를 보낸 흉노와의 전쟁에서 연전연승을 거둔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이릉이 흉노에 패해 항복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사실 이 때는 이릉 말고 이광리라는 다른 장군 또한 있었다. 원래는 이광리가 이릉에게 지원군을 보냈어야 했으나, 그 또한 전쟁에서 패하였기 때문에 지원군을 보내지 못한 것이다. 이것이 이릉이 전쟁에서 패한 것에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이기도 했지만, 이광리는 한 무제가 아끼던 부인(이부인)의 오빠, 즉 한 무제의 처남이었기에 그 누구도 이광리를 탓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때 이릉에게는 잘못이 없으며 전쟁에서의 작전상의 문제가 있었다고 유일하게 주장한 사마천은 사형 선고를 받는다. 사형을 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선택지가 있었는데, 첫 번째는 거액의 벌금을 내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궁형을 받는 것이었다. 이 시대에 있던 다른 형들에 비해 궁형은 그리 잔혹한 형은 아니었지만, 한나라가 가장 중시하는 가치 중 하나는 바로 효(孝)였다. 효의 첫 번째는 바로 대를 잇는 것이었는데, 거세를 당하면 대를 이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궁형은 그 당시에 가장 치욕스러운 형벌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아직 <사기> 집필을 완성하지 못했던 사마천은 궁형을 택한다.

궁형을 받은 지 삼 년 후에, 무제는 이릉사건에 몇 가지 오해가 있었다고 생각하여 사마천을 석방시키고 중서알자령이라는 관직을 내린다. 중서령은 일명 황제의 옆에서 심부름을 하는 벼슬이다. 사마천은 큰 수치심을 느끼지만 오직 <사기>를 완성하겠다는 의지로 버틴다. 그리고 드디어 기원전 90년 즈음에 사마천은 십사 년 동안의 <사기> 집필을 끝낸다. 여행을 통해 준비기간을 더한다면 무려 삼십칠 년의 시간동안 <사기>를 위해 시간을 쏟아 부었던 것이다.
 

3. 사마천의 여행과 <사기>

사마천이 여행에서 <사기>를 쓰는 데에 큰 도움을 얻을 수 있었으니 여행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넘어갈 수가 없었다. 우리가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분들, 예수, 붓다, 무함마드(??), 그리고 연암 박지원 등 이 모든 분들은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사마천도! 비록 각자 생각하는 여행의 정의는 모두 달랐겠지만, 목적은 모두 배움을 퍼뜨리고 배움을 얻기 위한 여행이었다.

코로나가 시작되고 여행을 갈 수 없게 되니 여행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고 가지 않음으로써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생각해 보았다. 그저 당연하게 가기만 하던 여행을 가지 못하게 되니 ‘떠나는 것만이 여행일까?’ ‘왜 나는 여행을 하고 나면 기억에 남는 게 별로 없을까?’ ‘내가 하던 여행은 그 순간만 즐거웠던 여행이었던 것일까?’하는 생각들이 몰려오며 내가 여행에 대해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어졌다.

예전에 나의 여행에는 배움이 끼어들 자리가 없었다. 물론 놀러 갔다가 우연한 사고를 겪어서 배우는 점들이 있기는 했지만, 배움을 위한 여행을 한 적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차마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여행이 무엇이냐고? ‘여행’ 하면 바로 생각나는 것은 호텔, 수영장, 바다, 특산물 이런 것밖에 없다. 그리고 여행은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루만이라도 일탈을 해보고자 가는 것이 여행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식의 여행을 정말로 계속 즐길 수 있을까? ‘지루한 일상’이라는 것이 이미 무언가 잘못된 듯한 느낌이 든다. 그저 일탈을 하기 위한 것이 여행이라면, 지쳐가는 일상, 그리고 가끔 씩의 기분 전환. 이 이상도 이하도 되지 않을 것이다. 일상을 벗어나는 것이 아닌 일상을 소중하게 느낄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여행이 아닐까? 솔직히 사람마다 여행에 대한 생각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 우문이 아닐까 싶었으나, 그래도 풀어보고 싶었다.

 


놀기 위한 여행이 아닌, 나를 돌아보고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 여행은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원래 여행을 하면 모든 것들이 낯설다. 그 낯선 환경과 낯선 사람들, 그리고 낯선 문화 속에서 시간을 보내며 나 자신을 뒤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왜 어째서 내가 하는 여행은 나 자신을 뒤돌아보기는커녕 한 순간만 행복하고 지나면 시간 낭비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 여행이 되어버리는 것일까?

반면 사마천이 한 여행은 어떤 것이었을까? 왜 굳이 이 먼 거리를 여행해야 했을까? 도대체 여행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었기에? 처음에 책을 읽으면서 사마천의 여행에 대한 부분(약 스무 페이지)을 읽으며 한자들 투성이에다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를 않아서 기분 내키는 대로 읽지도 않고 은근 슬쩍 스르륵 넘겼다. <사기>를 집필하는 데에 그가 다녀왔던 여행이 많은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설마 처음부터 ‘나는 <사기>를 쓰기 위해 이 여행을 가는 거야. 오늘 본 것은 꼭 적어야지.’ 이러며 여행을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당시의 여행은, 그것도 꽤나 어린 나이에 여행하기엔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이었다.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세상을 널리 알기 위해서’였다. 요즘에는 세상을 널리 알기 위해서 여행을 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하도 대중매체가 발달해서 직접 가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 많으니 말이다. 그러나 기원전에는 직접 멀리 여행을 다녀와 자세하게 적어놓은 여행기나 역사서도 별로 없었다. 21세기에는 이제 여행을 가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은 것이 되어 한 번 간 곳은 수많은 여행지 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사마천에게는 여행이라는 것 자체가 그가 여행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가 여행을 통해 사기를 집필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설마 오직 아버지의 유언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버지를 아무리 존경한다고 하더라도 유언으로 역사서를 완성하라는 말 한마디로 책을 쓸 것 같지는 않았다. 그 당시에 역사를 기록한다는 것은 어떤 것이었을까? 사마천은 명석한 머리로 한 무제에게 총애를 받았다고 하는데, 아부를 떨었으면 충분히 잘 살 수 있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사마천에 대한 책을 보면 그의 삶의 목적은 꼭 <사기>를 완성하는 것 같았다. <사기>는 중국의 역사 5000년 중 3000년을 52만자로 압축한, 엄청난 책이다. 그만큼 완성하는 데에 인생의 거의 모든 시간을 쏟은 것이기도 하다.

사마천은 <사기>를 쓰게 된 계기를 ‘구천인지제(究天人之際)’라고 설명한다. 이 말은 공간에 대해 연구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하늘과 땅과 사람 사이에 있는 공간, 그 공간 안에 일어나는 일을 연구하겠다는 뜻이다.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지금 내가 지내는 곳을 어떤 것 사이에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정말로 멀리서 보면 우리가 사는 곳은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공간이다.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을 공간을 공부한다고 표현하다니 정말 멋지다! 그럼 다른 말로 하자면 그는 그가 한 여행을 통해 공간을 느꼈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통고금지변(通古今之變)’이다. 이것은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겠다는 뜻이다. 매일, 항상, 시간, 분, 초 단위로 모든 것이 변하는 세상을 역사로 통찰하겠다는 뜻이 아닐까? 그렇다면 역사로 공간을 탐구하고 시간을 통찰한 사마천이 목표로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사기>를 남겨 ‘성일가지언(成一家之言)’을 이루어야만 사마천이 궁형을 자청하고 살아남아야 했던 비통한 심경을 표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칫하면 개인적인 원한으로 끝났을 수도 있었습니다. <사기>를 완성하지 못했거나 <사기>가 지금 우리가 보는 정도의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면 사마천 개인의 한풀이로 끝났겠지요. 사마천은 깊이 있는 생각과 공부를 통해 개인적인 원한을 보편화, 객관화하는 데 성공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사마천을 시대의 한계와 제약을 깨뜨린 사람이라고 평하는 이유가 이겁니다. (<사기史記를 읽다>, p.132)


이 책에서는 ‘성일가지언(成一家之言)’이라고 말한다. 사마천이 ‘일가의 말’을 이루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역사서를 완성하는 것은 아버지가 바랐던 것, 그리고 또한 그가 원했던 것이기도 했다. 사마 가문이 역사가의 가문이었기 때문에 역사서를 쓰고자 했던 사마담의 꿈이 사마천에게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그에게 역사를 기록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기록한 역사는 후대에게 전해진다. 기록한다는 것은 그만큼 미래의 사람들에게 자신이 살던 시기를 정확히 전달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역사에서 배우는 것들이 많다고 생각하는 만큼, 역사가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에 내가 역사를 기록한다고 생각한다면, 나의 입장에서 쓰는 것이기 때문에 나의 개인적인 생각과 상대를 내가 보는 시선으로 적게 된다. 내가 보기엔 이렇게 적는 것이 맞는데,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내가 너무 과장해서 적은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보기에 괜찮을 역사서는 있을 수 없겠지만, 어느 정도는 객관화된 역사책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것이 사마천이 위대한 역사가로 불리는 이유라고 한다. 자신이 아는 역사를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낸 책이 바로 <사기>다.


4. 역사를 왜 배워야 할까?

<인간 사마천>에서 사마천의 인생을 정리하다가 문득 내가 역사를 왜곡하는 것은 아닌가 걱정 되었다. 워낙 아는 것이 없다보니 무엇이 틀리고 맞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무엇을 어떻게 요약해야 할지 모른 채 쩔쩔맸다. 아마 분명 지금도 내가 쓴 글에서 꽤나 많은 내용이 생략되고 바뀌었을 것 같은데 이 때 정말 절실하게 역사를 배워야겠구나 싶었다.

‘역사는 반복된다.’ ‘역사를 통해 현재를 배울 수 있다.’ ‘역사는 세상을 보는 안목을 키워준다.’ 등등 역사를 배워야만 하는 이유는 수도 없이 많다. 모두 맞는 말인 것 같지만 여전히 다가오지가 않는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과 내 몸은 따로 놀고 있었다. 역사가 수많은 점에서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현실에서는 전혀 사용할 수 없기에 알고 있는 것이 맞기는 한 건가 의문이 들기까지 했다. 학교에서 역사에 대한 수업도 들어보고 추천 받은 책들도 읽어 보고 유명한 선생님 인강도 들어봤지만, 배우면 까먹고 역사를 왜 배워야 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기 일쑤였다. 역사를 ‘지식을 얻기 위해서’ ‘시험을 보기 위해서’ 이렇게 쓸모로 역사를 배우다보면, 언젠가는 한계점에 도달할 것 같았다.

이 책에서 아직 역사에 대한 재미를 찾지는 못했지만, 한 가지 배운 점은 있는 것 같다. 역사는 우리가 꼭 배워야만 하는 ‘과목’으로 생각될 것이 아닌 것 같다. 비록 우리는 지금 ‘역사’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부르고 있지만 그 안에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이 담겨 있다. 역사는 사람들이 살아왔던 이야기를 공부하는 학문이다. 역사가 세상을 보는 안목을 키워준다는 것도 과목으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인생을 살펴볼 수 있는 데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예전에 살았던 사람들을 살펴본다면 지금 사는 사람들과 다를 것이 별로 없다. 사는 방식은 다르겠지만 결국 생각하는 것과 고민하는 것은 모든 비슷하다. 욕망을 채우기 위해 물질을 찾다가 허무함을 느끼는 것이 반복된다. 계속 물질을 추구하다가 어떻게 되는지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내가 한심하다. 하지만 여전히 다른 사람의 인생을 보고 배울 수 있다는 점은 정말 감사하다. 역사는 과거에 일어난 일이지만, 사람들이 역사를 ‘미래학’이라고 부르는 것들도 이 때문이 아닐까?

 

 

글_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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