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살당하지 않을 권리
- 헨리 데이비드 소로, 『시민의 불복종』
소로우가 말하는 불복종의 필요성
우리는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국민이 되는 일은 그다음이다.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내가 떠맡을 권리가 있는 나의 유일한 책무는, 어떤 때이고 간에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행하는 일이다. 단체에는 양심이 없다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참으로 옳은 말이다. 그러나 양심적인 사람들이 모인 단체는 양심을 가진 단체이다. 법이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더 정의로운 인간으로 만든 적은 없다. 오히려 법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선량한 사람들조차도 매일매일 불의의 하수인이 되고 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강승영 옮김, 『시민 불복종』, 은행나무, 21쪽)
『시민 불복종』은 부당한 시민 정부에 대한 저항을 주장한 에세이다. 소로우는 1846년 7월에 멕시코 전쟁에 반대하며 투옥을 당한 경험, 그리고 노예 해방과 전쟁 반대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한다. 멕시코 전쟁과 노예제도에 반대하여 인두세(人頭稅) 납부를 거부했던 소로우는 이 때문에 감옥에 수감되기도 했다. 이 일로 그는 개개인의 자유와 국가의 방식이 분리된다고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2년 후 그는 그때 있던 일로 강의를 하며 그 강의를 책으로 내는데, 그 책이 <시민의 불복종>이다. (당시에는 『시민 정부에 대한 저항』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그는 1859년에는 노예제도 폐지를 위해 의회에 탄원서를 제출하고, 여러 강의와 다른 일들을 하며 노예제도 폐지를 위해 힘썼다. 하지만 그는 노예제도 폐지를 위해 여러 활동들을 이어 가던 중 폐결핵 진단을 받고 1861년 11월에 45세의 젊은 나이로 숨진다.
『시민 불복종』의 저자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우리가 인간 그 자체가 되는 것이 국가에 충실한 시민이 되는 것보다 더 먼저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정부가 정의롭지 않은 일을 할 때는 시민이 불복종을 하여 정부를 올바른 길로 갈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단순하게 머리로만 생각하지 말고 행동으로 옮기라’고 강조한다. 마냥 비대해지고만 있는 정부,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지는 법에서는 어떠한 일을 해도 괜찮다는 인식, 법에 걸리지만 않으면 어떠한 일을 해도 된다는 인식 등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정부에 대한 적대감 같은 것이 생겼다는 것이다. 소로우가 미국 정부에 대해 별로 좋지 않은 말을 하는 것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정부는 나쁜 것이고 법은 잘못된 것이다’라는 생각이 어느새 스며들었다.
그런데 한 가지 소로우가 좀 바꿨으면 했던 일은 있었다. ‘불복종’이라는 과제만 던져 놓았다는 것이 좀 마음에 걸렸다. 만약에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으면,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고, 왜 고쳐야 하는지 등을 말하는 것이 그저 불복종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소로우는 그저 정부에 대한 불복종성을 주장하고 끝냈다. 그 자신은 사람들에게 ‘당신의 온몸으로 투표하라. 단지 한 조각의 종이가 아니라 당신의 온몸으로 투표하라’라고 말했으면서 말이다. 즉, 그는 자신의 온몸을 던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만약에 그가 시위라도 일으키며 자신의 영향력을 모두 사용할 수 있었다면 분명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르고 어느 정도는 미국 정부를 바꿀 수 있었을 것 같은데 말이다. 적어도 박근혜 대통령 탄핵 촛불 집회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고작 강의로 끝나고, 책으로 썼다는 점이 좀 아쉬웠다.
나에게 소로우의 이런 행동은 그저 법에 반항하는 불량 시민(?)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런 면에서는 소로우가 좀 소심했다고 생각하지만, 그가 내놓은 정부와 법들, 그리고 이에 대한 상황에 따른 불복종 의견에 대해서는 나도 동의한다.
나는 다른 누군가가 아니다
누구의 소유물이 되기에는, 누군가의 제2인자가 되기에는, 또 세계의 어느 왕국의 쓸 만한 하인이나 도구가 되기에는 나는 너무나도 고귀하게 태어났다.(셰익스피어, 『존 왕』 5막 2장)
이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왠지 어깨에 뽕이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동기부여가 되었달까. 내가 이렇게 고귀하게 태어났다는 말을 듣고 갑자기 ‘난 이런 고귀한 존재인데 무슨 일이라도 해야 되지 않을까’ 하며 숙제를 얼른 해치웠다. 말하자면, 이런 사소한 행동으로 내가 쓸모 있는 존재이고 고귀한 존재임을 퉁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니 좀 어이없다. 어쨌든, 소로우가 여기서 이 말을 인용하며 하고자 했던 말은 나는 나 자신이지 그 이외의 것이 아니라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항상 나를 나 자체로 인정하지 못한다. 항상 내가 속한 어느 부분 속에서만 나를 구속시키고, 그 안에서 나를 찾으려고 하고 있다. 학교를 다닌다면 엄이우 학생, 밥 잘 먹으면 먹는 거 좋아하는 엄이우, 그리고 자면 잠꾸러기 엄이우. 그냥 ‘나’ 자체를 나타낸다기보다는 나의 어떠한 모습을 위해 나를 끌어오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나 자체로 고귀하게 여긴다는 건 뭘까? 나 자체를 고귀하게 여긴다는 것은 나를 온전히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인데, 방금 내가 나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고 한 것과 모순이 되는 것 같다. 내가 이해하고 원했던 것은 그저 ‘겉모습’이어서, 고귀하다고 스스로 생각하지만 정작 나 자신은 찾지도 못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내가 고귀하다고 우쭐대던 나의 모습은 모두 겉모습이었던 걸까? 소로우가 ‘네 겉모습을 보고 고귀하게 여겨라’라는 말을 하려고 한 것은 아닐텐데. 그렇다면 내가 고귀하다고 여겼던 나의 모습은 나의 권리와 불복종, 어느 것에도 상관이 없는 그저 겉치레일 뿐이다. 소로우가 나를 존중하고 고귀하게 여기라는 것은 나처럼 겉치레를 신경 쓰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견을 국가의 법에 종속시키지 말고 옳지 않은 것에는 불복종하라는 것이 아니었을까?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세상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려는 중요한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좋든 나쁘든 그 안에서 살기 위해서이다. 한 사람이 모든 일을 다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중 어떤 일만 하면 된다. 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할 수 없다고 해서 어떤 나쁜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강승영 옮김, 『시민 불복종』, 은행나무, 21쪽)
불의의 법들이 존재한다. 우리는 그 법을 준수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그 법을 개정하려고 노력하면서 개정에 성공할 때까지는 그 법을 준수할 것인가, 아니면 당장이라도 그 법을 어길 것인가? (같은 책, 36쪽)
솔직히 정부에 대하여 불복종을 시도해 보는 것 중 가장 쉬운 방법은 시위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약에 그 시위가 일리 있고, 동의할 사람들이 있다면 말이다. 아니면 정부에 청원을 넣는 것? 하지만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정부에 복종하고 있다는 얘기가 아닐까. 그러니까 우리가 하는 행동은 법을 지키며, 즉 정부에게 복종을 하면서 하기 싫다고 쫑알대며 반발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일 말고 복종하지 않을 만한 다른 방법은 딱히 없는 것 같다. 만약에 법이 개개인, 공동체, 사회 이 모든 것의 이익과 평등을 가져다줄 수 있다면 시민 불복종이라는 것이 생겨날 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이란 불가능하다. 소로우도 이것을 알고 있었겠지만, 노력하지 않는 정부가 옳지 않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부를 비판하며 불복종이라는 단어에 다가가고 있는데, 나도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휩쓸려서 자꾸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다고 긍정하고 있었다.
청소년이 정치에 참여한다?
어른들이 투표 권리는 당연히 20살부터라고 말했고 그것이 법이었기에 나는 그 말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내게 법을 따르는 것은 그냥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진 운명처럼 당연한 것이었다. 그 법이 말이 되건 말이 되지 않건, 일단 ‘지키기만 하면 되는 것’, 이것이 내게 있어서 법이다. 하지만 항상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예를 들어보자면 6월 항쟁 같은 것은 당시의 법에 어긋나는 행동이었지만 아무도 이 일이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약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법을 따르지 않고 불복종다면 나도 그럴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나는 별종(?)이 되기는 싫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들이 하면 하고, 하지 않으면 안 하고. 말하자면 법을 어길 용기가 없다. 어기면 좋은 일은 없을 테니까.
덕분에 내가 정치에 참여할 수 있으리란 것은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 하지만 소로우가 쓴 책을 보니 딱히 못할 것도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정치라는 것을 나이든 아저씨들이 권력 가지고 싸우는 것 외에는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정치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보면 나와는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사람들 같았다. 그런 느낌이 듦에도 불구하고 주변 사람들이 ‘나라가 왜 이 모양이야’라는 말을 하면, 알지도 못하면서 나도 모르게 그냥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그러다가 언젠가부터는 사람들이 정치에 이의를 제기하면 ‘그러면 더 나은 나라가 만들어지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데? 저 사람들이 잘 하고 있는 건 아닐지 몰라도, 그에 대한 해결책이 없으니까 자기가 생각하는 최선의 결론을 내린 거 아니야? 어차피 누군가 나선다고 해도 모든 사람들이 그 사람에 대해 만족할 수는 없잖아’라고 말하며 따지고 있었다.
이렇게 혼자서 아빠와 문제를 토론할 때는 있었지만 여전히 나는 그냥 생각만 하고 있을 뿐 정작 그 결과에 대해서는 나와는 관련이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내가 책임질 것도 아닌데’, ‘누군가는 해결하겠지’라는 생각을 하며 그냥 방관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어른들이 ‘애들은 이런 거 몰라도 된다. 이건 어른들 문제야.’라고 말할 때 그 ‘기준’은 뭐냐며 따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정치에 참여할 생각은 전혀 없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들면서도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나이가 20살이라는 제한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학교에서 도덕 문제를 풀다 보면 ‘어린이들이 정치 참여를 하지 못하는 것은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판단 능력이 옳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그것을 고려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권리 침해라고 할 수 없다’라는 답을 써야 하는 문제들이 나온다. 이럴 때는 반론을 제기하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내게 답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드는 것은 정말로, 왜 하필 20살일까? 청소년인 내가 판단 능력이 떨어지나? 다른 사람이라면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판단할 때 내가 생각하는 가장 ‘올바른 것’ 아니면 ‘나은 것’을 기준으로 결론을 내렸다. 이것은 거의 모든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그저 각자의 생각에 다른 점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법은 왜 모든 것을 획일화시켜서 똑같은 나이=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만들어 버리는 걸까?
나는 무엇에 복종하는가
내가 ‘청소년 정치 참여’에 관해서 문제를 생각해 보지 않은 것도 그렇고, 다른 것들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하다 보니, 나는 내가 항상 무언가에 복종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하라는 일에 딱히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하라는 건 다 했기 때문이다. 그냥 일상에서도 하기 싫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거의 다 했다. ‘내가 왜 이런 일을 해야 되는데?’라며 짜증을 내면서도, 실제로 하지 않은 적은 거의 없었다. 어쩌면 ‘이 일이 옳기 때문에 나는 복종한다’라는 생각보다는 그냥 일상이 아무 일 없이 조용히 지나갔으면 했던 마음에 하라는 일은 다 한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복종한다는 것은 그에 대한 이유가 있고, 불복종한다면 복종하지 않는 이유가, 더 나은 어떠한 해결책이나 방식이 있을 것 같다. 나는 나 하나만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면 어영부영 넘어갈 수 있을 거라고, 그렇다면 모두 잘 진행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냥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내가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고 끝나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는 항상 피해를 보고 있었다. 가끔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으면 문제를 말하기는 했지만, 하더라도 반항이라는 단어가 알맞을 정도로 짜증내는 식으로만 가볍게 했을 뿐이다. 사람들이 10대 때 한 번 정도는 해본다는 흔한 반항이었지, 그런 걸 불복종이라는 웅장한 단어로 표현하기는 좀 그럴 정도로 ‘나는 왜 안돼?’라고 깊이 생각하지 않은 채 무작정 입에서 튀어나오는 대로 생각했던 것 같다. 이대로 계속 사는 게 맞을까?
모두가 흔히 듣는 말처럼 싸우는 것이 옳지 않고, 싸우지 않기 위해서는 소통이 필요한 것은 맞다. 하지만 싸우지 않고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나의 의견은 없애고 그냥 지나치는 것은 옳지 않은 것 같다. 나도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만 했다고 나름 자부했지만 그저 ‘제발 빨리 지나갔으면...’하는 생각에 한 행동들이 많이 있었다. 옳지 않은 일을 알게 된다면 그에는 합당한 ‘불복종’이 필요하다. 반드시 복종하는 것이 옳은 것은 아니다. 나도 ‘내 의견 하나쯤은 뭐, 없어도 되겠지’하며 그냥 무조건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그대로 행동하는 것을 고쳐야 할 것 같다.
나는 누구에게 강요받기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아니다. 나는 내 방식대로 숨을 쉬고 내 방식대로 살아갈 것이다. 누가 더 강한지는 두고 보도록 하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 강승영 옮김, 『시민 불복종』, 은행나무, 50-51쪽)
글_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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