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부의 유물론
1. 십년의 고독
그간 거울 앞에서 내쉰 한숨을 모으면 컨테이너를 몇 개나 채울 수 있을까.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그보다 이제 그만 나아질 때도 됐는데. 둘 다 영 마음처럼 안 풀린다. 그런 점에서 여드름만큼 훌륭한 선생도 없다. 세상엔 뜻대로 되는 일이 드물다는 사실을 이렇게 가까이서 실시간으로 알려주고 있으니. 무려 십 년 동안이나 말이다. 여기서 핵심은,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피부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피부에 신경을 끄는 것 또한 내 의지 밖이다.
집착이 사라지면 대상도, 대상에 대한 욕망도 자연스레 사라지게 된다고 했다. 같은 이치로, 피부를 신경 쓰지 않게 될 때쯤 여드름도 사라질 것이다. 더 정확히는, 더 이상 피부가 문제 되지 않으니 사라지든 남아 있든 간에 별 상관이 없게 될 것이다. 물론 이 경지는 멀다. 그리고 그 정도 내공이 생기는 동안 내 이십대가 끝나있을지도 모른다. 한 가지 난관은 이마가 올라가고 있다는 것. 아무리 도력이 높아진다 하더라도 이 두 번째 파도는 만만치 않을 것 같다. 어쩌면 내게 흉터 없는 볼과 풍성한 머리칼은 영영 함께 허락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기억도 아득한 중학생 시절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촉촉해진다. 집착이 사라지면... 자연스레...(또르륵)
마음 약해지면 안 된다. 세상의 어느 현자가 외모에 연연했던가. 소크라테스, 실레노스, 애태타, 인기지리무순 등 내가 배운 책에 등장하는 ‘못난이’들 누구도 지혜와 매력이 넘쳤을지언정 투덜거리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어느 수행자나 철학자가 제 얼굴 때문에 한숨을 쉬고 앉아있는가? 자기 얼굴을 신경 쓰고 매달리는 사람이 어떻게 생사와 우주와 인간에 대해 고민하겠는가? 그건 절실함이 없다는 증거이자 여전히 타인의 시선에 지배되고 있다는 증거다! 맞다. 문제는 여드름이 아니라 거기 딸린 표상과 자의식이다. 고쳐야 할 건 외모가 아니라 외모를 나라고 동일시하고 남들과 비교하는 태도다. 거기에 마음이 쏠려 있으니 더 과장되게 느껴지는 것이다. 사실이다. 그런데 이 틀림없는 결론들이 별다른 위안이나 도움이 안 되는 것도 사실이다. 어쩐지 정신적인 설득 같달까. 여전히 얼굴은 화끈거리고 거울에는 소보로빵 같은 피부가 비친다. 많은 걸 바라는 것도 아니다. 흉터는 어쩔 수 없더라도 붉게 올라오는 것들이라도 줄었으면... 머리가 뻗치면 빗고 싶고, 입가에 뭔가 묻으면 털고 싶은 것처럼.
피부를 떠올리면 우선 슬퍼지긴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절망이나 아픔만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몇 년 전과 비교해보면 한숨도 줄었고 실제 증상도 나아졌다. 그리고 진심으로, 이 오랜 피부 트러블에 감사하는 마음도 있다. 만일 피부가 좋았다면 난 훨씬 산만하게 나돌아다녔을 게 뻔하다. 술, 담배, 야식을 경계하고 생활습관을 관리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개구리 같은 이목구비는 다르지 않았겠지만, 주제도 모른 채 얼굴을 들이밀며 까불고 다녔을지도 모른다. 좋든 싫든 여드름은 내게 겸손함을 알려주었다. 그런 점에서 고마운 존재이자, 습관을 바꾸는 뒷문을 열어줬다는 점에서 감사해야 마땅한 스승이다. 이런 생각들로 위안을 얻고 있노라면 꼭 반대편에서 다른 시나리오가 떠오른다. 하지만 피부만 좋았어도 분명 자신감이 더 생겼겠지. 그러면 몇 번의 연애 기회도 말아먹지 않았을 거고, ‘내 주제에’ 하며 단념하지도 않았을 거다. 매번 화농이 번져서 멈춰야 했던 근육 운동도 신나게 했을 테고. 확실히 인생 경험은 더 풍부해졌을 거다. 이렇게 고마움은 곧바로 아쉬움으로 또 설움으로 이어지고, 겨우 찾은 희망 옆엔 원망이 딸려 붙어있다. 이렇게 피부 덕분에, 피부 때문에 운운하며 망상을 짓는 동안에도 여드름은 또 올라온다.
2. 처음부터 다시 질문하기
물론 밥 먹고 살아가는 내내 피부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 따져보면 거의 안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별 탈 없이 지내나 싶다가도, 어느 순간 속상함이 불쑥불쑥 올라오곤 한다. 모르는 척도 해보고 태연한 척도 해보고 나름대로 감사도 해보지만, 그 아래는 여전히 크나큰 소란이 있다. 이제 그만 사라졌으면 하는 바람,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는 다그침, 순간순간 느껴지는 현실적 화끈거림, 그래도 덕분에 좋은 점도 있다는 깨달음, 그걸 자기 위안이라고 코웃음 치는 해묵은 원한. ‘피부’를 떠올리는 내 마음의 깊은 곳은 절망, 희망, 원망, 체념, 반성, 감사, 속상함이 뒤섞인 아수라장이나 다름없다.
어쩌면 피부라는 문제를 둘러싸고 내가 지금까지 취해왔던 조치들은 뭔가를 놓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중요하지 않다’, ‘집착하지 말자’, ‘신경을 끄자’, ‘좋은 면을 보자’ 등의 처방들은 어느 날 아침의 여드름 몇 개에 무너질 정도로 빈약하고 텅 비어있다. 왤까? 이 말들은 틀리지 않았고 무척 중요하다. 하지만 나는 그것들을 손쉬운 결론으로 가져와 마치 주문처럼 되풀이할 뿐이었다. 알게 모르게 갖고 있고 반복하고 있던 전제들은 건드리지 않은 채, 호들갑은 호들갑대로 떨면서 말이다. 이건 루크레티우스 형님 보시기에 옳지 않다. 전혀 유물론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바라는 바를 요약하면 이렇다. 여드름이 사라졌으면 좋겠다! 그게 어렵다면, 피부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었음 좋겠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래왔듯 나의 이 두 바람 중 어느 하나도 이뤄지지 않을 게 분명하다. 왜냐고? 둘 모두 ‘자연의 이치’를 무시하거나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자연이 내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안다. 그럼에도 몸에 있어서는 당장 손을 움직이고 몇 가지 행동을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되기에, 피부도 의지대로 되기를 원하고 있다. 적어도 ‘내 몸’은 날씨나 다른 자연 현상과는 달리 순순히 따라줘야 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거기에, 이 반항적인 피부 때문에 속상하고 괴롭다는 판단이 덧붙는다. 그래서 ‘이 괴로움이 없어졌으면!’ 하는 꿈을 꾸고 있는 것.
인정하긴 싫지만 여기에는 단단한 무지와 이상한 착종이 있다. 이 괴로움이 가짜라거나 그래선 안 된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 원인이 정말 ‘피부 트러블 때문’인지는 의심되어야 한다. 사실 ‘얼굴에 생긴 붉은 것’이 ‘절망감’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는 겹겹의 관념들이 가세하고 있지 않은가? 매끈한 피부가 더 좋은 것이라는 생각, 10년은 너무 길다는 생각, 무엇보다 피부로 대표되는 몸이 ‘내 것’이라는 생각. 진원지는 몸이 아니라 몸을 둘러싼 표상들과 강박들이다. 그렇다면 온갖 잉여적인 희망이나 기대는 내려놓고, 여드름이든 괴로움이든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을 제쳐두고, 초점을 그 아래로, 유물론적으로 맞춰서 접근해보자. 대체 몸은 뭔가? 무엇으로 되어 있고 어떻게 작동하는가?
3. 몸, 원자들의 버스
덕지덕지 붙어있는 정념들을 걷어내고 생각해보면, 피부는 ‘내 얼굴’이기 이전에 우선 몸이고, 몸이기 이전에 생명이고, 생명이기 이전에 사물, 즉 자연이다. 그리고 그런 이상 동일한 ‘사물의 본성’을 갖는다.
루크레티우스가 말하는 사물의 본성이란 무엇인가? 바로 원자다. 우주는 운동하는 원자들과 허공이라는 것. 이것이 루크레티우스 철학의 출발점이다. 하늘도, 열기도, 냉기도, 땅도, 물체도, 생명도, 감각도, 생각도, 영혼도, 정신도, 심지어는 신들도 원자들의 집합체다. 감각되지 않을 정도로 작고,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원자들의 이합집산으로 빚어지는 세계. 여기에는 우열도, 옳고 그름도, 잘잘못도, 좋고 나쁨도 없다. 그렇지만 세계에는 얼마든지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가! 하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것은 자연의 끔찍함이 아니라 우리의 끔찍함이다. 우리가 슬픔이나 기쁨에 차서 경험하는 현상들을 원자 차원에서 클로즈업해보면, 그저 특정한 원자들 특정한 방식의 결합 및 해체다. 죽음도 태어남도 심지어 별의 폭발이나 생성조차도 마찬가지다. 우주는 “각각의 것에서 떠나가는 몸체들이, 그것을 떠나는 그 사물은 줄어들게 만들고, 그것들이 그리로 옮겨간 사물에게는 성장을 선물”(2:72)함으로써 운행된다. 어딘가에서 흩어진 것이 어딘가에서 다시 다르게 모이고, 여기에서 저기로, 이 조합에서 저 조합으로 변하는 것이 전부다. 모든 원자는 무구하다. 그 원자들이 짝지어 춤추는 우주의 어느 구석도 무구하다. “자연은 보이지 않는 알갱이들로 일들을 처리하는 것이다.”(1:328) 여기에는 찬양할 것도 없지만 나무랄 것도 없다.
이런 관점으로 몸을 보면 어떨까? 그러면 너무도 당연했던 상식 하나가 모호해진다. 그 동안 내 몸, 내 얼굴, 내 피부 운운해왔는데, 과연 어디까지가 ‘내 몸’일까? 우리는 보통 보이는 윤곽이나 만져지는 덩어리를 몸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그것이 작은 알갱이들의 임시적 모임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심지어 돌멩이나 의자나 책상보다도 훨씬 빠르고 복잡하고 불안정하게 움직이는 생명 덩어리라면 말이다.
몸은 먹고, 싸고, 숨 쉬고, 땀 흘리고, 열을 낸다. 살아 있는 모든 순간에 “많은 몸체[원자]들이 여러 방식으로 흘러나가고 떨어져 간다.”(4:860) 또 끊임없이 흘러들어온다. 실제로 우리 몸의 원자들은 3년이 지나면 완전히 새로운 원자들로 대체된다. 그것들은 다른 곳으로 가서 다른 몸을 이룬다. 우리는 마치 쉼 없이 승객이 타고 내리는 버스와도 같다. 차이가 있다면 차체의 부품까지 실시간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타고 내리는 승객도, 교체되는 부품도 버스에 소속되어 있지 않다. 승객들이 버스의 것이 아니듯 우리 몸을 이루는 원자들은 아무 소속도 갖지 않는다. 심장 깊숙한 곳의 원자 하나를 지목해 ‘내꺼’라고 말하기엔, 이미 너무나 많은 존재들의 것이었다. 삼엽충의 것이었다가, 매머드의 상아이기도 했다가, 운이 좋으면 부처님의 일부였을 수도 있다. 원자는 영원하고, 원자만이 불멸한다. 여권이 있다면 스탬프가 끝도 없이 찍혀있을 것이다. 그렇게 억겁의 세월 동안 온 세상을 여행 중인 원자들이 아주 잠깐 경유하고 있을 뿐인데, 무엇을 꼬집어 ‘내 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영혼? 기억? 루크레티우스에겐 그조차도 끊임없이 자리바꿈하고 있는 원자다.)
한 가지 반론이 든다. 몸의 구성 성분이 변한다고 해도 그것을 저 바위나 고양이와 동일하다고는 할 수 없지 않은가? 우리의 몸은 어떤 형태와 특성을 지속한다. 매일 해가 뜨고 지듯, 자고 일어나도 손발의 모양은 그대로고 몸은 달라지지는 않는다. 승객이 타고내리는 와중에도 버스는 비슷한 길을 달린다. 몸으로 흘러들어온 원자는 제멋대로 떠도는 것이 아니라 생체리듬을 유지하고 작동시키는 데 합류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원자들의 일관된 흐름으로 유지되는 특성을 가리켜 ‘내 몸’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맞다. 변화들 속에는 일정한 경향성이 있다. 루크레티우스는, 우주는 그 자체로 우연하고 목적 없는 원자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렇다고 무작위로 연결되고 흩어지는 카오스는 아니라고 말한다. 만일 그랬다면 우리는 어떤 종(種)이나 닮은꼴의 형제들 대신에 “도처에서 괴물들을 발견할 테니까”(2:701) 말이다. 갑자기 해가 뜨지 않는 일이 없듯이, 날개 달린 말이나 반인반수는 나타나지 않는다. 하늘과 땅과 바다와 동식물들은 이러저러한 꼴과 패턴을 갖는다. 어느 날 갑자기 뿅 창조된 게 아니다. 루크레티우스는 “세계의 본성은 결코 신들에 의해서 우리를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2:180) 기억하라고 했다. 원자론에는 우주 바깥의 손이나 의도는 없다. 원자들의 충돌과 결합과 해체가 있을 뿐이고, 헤아릴 수 없는 시간 동안 헤아릴 수 없는 세계가 있어 왔다. “온갖 종류의 운동과 모임을 실험한 끝에 마침내 사물들의 이 총체가 자라나서 유지되도록 하는 그러한 배열에 당도”(1:1025)한 것이 우리가 아는 세계다. 그리고 이 또한 지나갈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짧은 시기, 이 좁은 영역에서 갖춰진 배열들 간의 유사성과 차이를 발견해가며 이것과 저것, 질서와 무질서, 정상과 비정상을 나눈다. 어떤 특성들이 더 정상이고 더 좋은 것인지, 어떤 경향성이 더 권장할 만한 것인지 등. 하지만 사물들의 경향성도, 우리가 추론한 정상성도 형성된 것이다. 그런 한에서 결코 절대적이지도 영원하지도 않다. 영원한 것은 원자들과 원자들의 조합 실험뿐이다.
다시 몸으로 돌아와 보면, 우리의 몸 역시 어떤 실험들의 한 국면이다. 각 몸들의 특성은 이 실험의 중간 결과다. 기억해야 할 점은 이 실험의 기획자는 결코 우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원자 승객들을 태운 것도 내보내는 것도, 또 이 리듬에 맞게 돌아가도록 한 것도 내가 하는 일이 아니다. 좋든 싫든 알아서 음식이 들어가고, 배설물이 나오고, 피가 흐르고, 잠이 오고, 기분이 들고, 생각이 난다. 태어난 것이 그랬듯이 이 모든 건 ‘내가’ 하는 일이 아니다. 여기에 나의 의도가 끼어든 곳은 없다. 또 감각되는 것도 극히 일부다. 사실 이 일들이 살아 있음의 거의 전부인데도 말이다. 어쩌면 손가락 튕기기 정도가 그나마 확실하게 내 통제 영역으로 남아 있는 일 아닐까(그것도 완전히 내가 했다고는 자신할 수 없다만). 우리 몸의 살아 있음에서 의식과 감각에 해당하는 것은 부스러기뿐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과연 이렇게 시작도 끝도 과정도 나의 감각과 통제 밖에 있는 것을 여전히 ‘내 몸’이라 할 수 있을까?
물론 보이고 만져지는 이 몸이 없다거나, 내 것이 아니니 내버려 둬도 된다는 건 아니다. 다만, 원자들의 임시적인 모임으로서는 존재하되 내 뜻대로도 내가 아는 대로도 존재하지는 않는 것이 몸이라면, 그걸 두고서 울고 웃으며 굳이 괴로워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정념들은 어쩌면 오지랖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질문은 남는다. 비록 소유 관계가 불분명하다 하더라도 이 몸뚱이와 저 몸뚱이는 다른 리듬과 다른 개성을 갖고 작동한다. 몸들 간의 이런 차이, 버스들 간의 그런 경로 차이는 어떻게 생기는 걸까?
4. ‘놓임새’가 전부다
루크레티우스에 따르면 원자들에게는 색깔도, 온기도, 냉기도, 소리도, 풍미도 없다. 크기와 무게와 모양을 제외하면 원자는 아무 성질도 갖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세계는 이토록 현란한 사물들로 가득 차 있으며, 우리 몸은 이렇게 복잡하고 다이나믹하게 작동하는 걸까? 무색무취의 원자에서 형형색색의 사물이 만들어진다니? 루크레티우스는 그 힘을 ‘놓임새’, 즉 조합의 다양성에서 찾는다. “저 같은 기원들이 어떤 것들과 어떤 위치로 연결되는지, 또 서로 간에 어떤 운동을 주고받는지가 지극히 중요하다.”(1:908) 세계의 모든 특성과 차이는 거기서 생겨난다. 그가 즐겨 쓰는 알파벳의 비유를 보자.
“사실 나의 시행 자체의 여기저기서 당신은 많은 단어들에 공통된 많은 철자들을 본다. 하지만 시행들과 단어들이 그 뜻과 소리의 울림에 있어서 서로 다르다는 것을 당신은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글자들은 단지 순서를 바꾸는 것으로 그만큼의 일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사물들의 기원인 것들은 이보다 더 많은 변화 요인을 제공할 수 있다, 그로 인하여 각각의 다양한 사물들이 생겨날 수 있을 요인들을.”(1:823-830)
알파벳은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다. 하지만 그것들이 모이면 소리와 의미를 만들며 이야기가 되고 감정과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루크레티우스가 쓴 시를 포함에 세상에 가득한 책들은 모두 불과 몇십 개에 불과한 철자들이 형성한 조합이다. 원자들도 비슷한 원리로 조합해 모든 것을 만든다. 단 그 종류가 셀 수 없이 많으며, 알파벳처럼 옆으로만 놓이지도 않는다. 온갖 방식의 조합이 가능하다. 똑같은 종류의 원자도 결합방식에 따라 흑연이 되거나 다이아몬드가 된다. 중요한 것은 배치다. “재료의 간격, 행로, 연결, 무게, 타격, 모임, 운동, 순서, 놓임새, 형태가 바뀔 때, 사물도 바뀌어야 한다.”(2:1022)
복잡한 우리 몸도 어떤 연결패턴들이 우세한가에 따라 각각의 특성을 갖는다. 이 특성을 아는 데 있어 원자들 각각에 주목하는 것은 별로 도움이 안 된다. 색, 냄새, 열 등의 생겨나는 것은 일정 단위 이상의 구성물에서부터이기 때문이다. 책이 알파벳이 형성한 단어들로 되어있듯이 우리 몸도 원자들이 형성한 다양한 요소들로 되어있다. 루크레티우스는 그중에서도 개개인의 기질을 형성하는 요소들에 대해 말한다. 사실 이것들은 영혼을 이루는 요소들이지만, 루크레티우스에게는 영혼도 몸이다(!). 원자론은 마음, 정신, 영혼, 감정, 이성 등 우리가 비물질적이라 생각하는 그 어떤 것도 물질, 즉 원자들의 집합체로 본다. “정신과 영혼의 본성이 육체적”(3:161)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정신은 신체에 자리하며 신체와 함께 성장하고 함께 소멸한다. 둘은 같은 것의 다른 역할 혹은 다른 활동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그가 공들여 설명하는 정신과 영혼의 본성을 이해하는 것은 곧 몸을 이해하는 길이다.
영혼은 열기(테르몬), 바람(프네우마), 공기(이에르), 그리고 ‘이름 없는 원소’라는 네 가지 요소로 이뤄져 있다. 이 요소들은 혈액보다도 더 작고 미세한 것으로 우리의 정신활동 뿐 아니라 생명작용도 가능케 하는 일종의 기(氣)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것들은 “어느 한 요소도 나뉠 수 없고, 그 능력이 공간에 의해 분리될 수도 없으며, 말하자면 한 육체의 많은 힘들 같이 존재한다.”(3:263) 이러한 상보적이고 불가분한 요소들이 섞여서 생리적이고 심리적인 본성을 창출한다.
“다음과 같은 존재들에게는 더 많은 열기가 있다, 그들의 가슴이 더 사납고, 그 마음이 화를 더 잘 내서 분노 속에서 쉽게 끓어오르는 것들에게. 무엇보다도 사자들의 광포한 힘이 이런 종류에 속한다. 그들은 으르렁거릴 때 자주 포효로써 가슴을 터뜨리고 분노의 물결을 가슴속에 잡아두질 못한다. 반면에 사슴의 차가운 마음은 좀 더 바람이 많고, 살들을 통해 싸늘한 바람들을 더 빨리 일어나게 한다. 그리고 그 바람들은 사지에 떨리는 운동들이 생기게 만든다. 한편 소들의 본성은 좀 더 평온한 공기를 지닌 채 살고 있으며, 분노의 연기 나는 횃불이 그것을 불붙여 지나치게 자극하지도 않는다, 컴컴한 어둠의 그늘을 쏟아 덮으면서. 또 그것은 떨림의 차가운 차에 꿰뚫려 얼어붙지도 않는다. 그것은 사슴과 사나운 사자들의 양극단 중간에 자리 잡고 있다. 인간의 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3:295-307)
화와 사나움을 유발하는 열기, 공포와 떨림을 동반하는 바람, 잔잔함과 태평함을 나타내는 공기. 이것들은 서로를 상쇄하고 자극하며 두루 섞이게 되는데, 그 운동을 주관하는 일종의 윤활유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가장 작고 민활한 ‘이름 없는 원소’다. 이 때문에 이름 없는 원소는 ‘영혼 전체의 영혼 격’이라고 설명된다. 어쨌든 이 세 요소의 비율과 밀도와 이동방식에 따라 그 사람의 영혼과 몸이 다르게 표현된다. “하나가 다른 것들보다 밑에 있거나 더 두드러지면서도, 모두로부터 어떤 단일한 것”(3:284)을 이루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배합의 양상이 당연히 다종다양한 신체적 차이로 나타난다. 다양한 신체의 모든 메커니즘은 우리의 앎 바깥의 영역이다.
재미 삼아 추측해보자면, 나의 피부 문제는 공기 요소가 응축되어 긴장하는 동안 식혀지지 않은 열기가 얼굴로 솟게 된 결과가 아닐까? 애기 때부터 그런 건 아니었으니, 지금 주변 요소들 혹은 기운들과의 균형이 이렇게 잡혀있나 보다. 슬퍼하거나 투덜대는 것과는 별개로, 몸의 유물론적 ‘놓임새’가 이렇다는 것을 알아두는 것이 좋을 듯하다. 어차피 내 거라고 하기도 애매한 몸, 중요한 건 이 몸과 함께 무엇을 하는가에 달려 있지 않을까?
5. 너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네 요소에 대해 설명하면서 루크레티우스는 흥미로운 말을 한다. 루크레티우스는 그 네 요소의 조합이 낳는 기질을 ‘본성의 최초의 자취’라고 부른다. 이것은 교육이나 의술로 바꿀 수 없는 영혼과 신체의 타고난 습관이다. 그러니까 공연히 사자 같은 성질머리나 사슴 같은 겁많음, 소 같은 태평함을 고칠 생각을 말라고 말한다. 허! 이거 너무 희망을 짓밟는 거 아닌가? 그럼 우린 그냥 각자 부여받은 자질에서 만족하고 살아야 하는 건가? 하지만 여기엔 반전이 있다.
“사람들의 다양한 본성과 그에 따르는 습관들은 달라야만 한다. 그것의 보이지 않는 이유들을 나는 지금 제시할 수가 없으며, 시초들로 이뤄지는 만큼의 그 형상들의 이름을 찾아낼 수도 없다. (...) 하지만 이 일들에 있어서 이것은 주장할 수 있다고 본다, 즉 본성들의 자취 중 남은 것들, 이치가 우리를 위해 쫓아내 줄 수 없는 것들은, 우리가 신들에게 걸맞는 삶을 누리는 걸 결코 방해하지 않을 만큼 작은 것들뿐이라는 점이다.”(3:315-322)
세상에는 그 이름을 붙이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나 많은 몸과 영혼의 형태들이 있다. 정확히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 왜 그래야 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고, 사실 그럴 필요도 없다고 루크레티우스는 말한다. 그것이 멋지든 구제불능이든 아름답든 추하든 우리는 그 ‘본성의 자취’에서 따라 나오는 습관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그런 선결 조건들은 우리가 신들에게 걸맞는 삶, 다시 말해 우리를 얽매는 두려움과 탐욕을 넘어가 지복의 삶을 누리는 걸 결코 방해하지 않는다. 그 어떤 기질도 행복하게 살고 지혜를 배우는 데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자연의 이치 앞에선 장애도, 병도, 가난도 아주 작은 것일 뿐이다. 부끄럽지만 여드름도 그렇다. 핵심은 그 자취들 옆에 어떤 행동과 생각을 두는가가 아닐까? 역시 또 ‘놓임새’가 중요하다. 어떻게 보면, 여드름과 피부는 나 자신의 몸과 정신의 습관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이렇게 어줍잖은 유물론을 생각해보게 한다는 점에서 하나의 배움의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솔직히 내가 여드름을 둘러싼 정념에서 벗어나는 날이 언제 올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매번 한숨만 쉬고 있기보다는 그 ‘본성의 자취’들로부터 다른 사용법을 발견하는 시도를 시작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을 해본다. 좋다, 너 내 동료가 되어라.
_성민호(고전비평공간 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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