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들의 클리나멘
1.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참 의아하다. 나 같은 촌놈이 어쩌다가 이렇게 서울 한복판에 살고 있으며, 이런 속물이 어쩌다가 철학 공부를 한다고 이렇게 책을 들여다보고 있는 걸까? 게다가 지금 여기 앉아서 루크레티우스에 대한 글을 쓰고 있는 것은 대체 무슨 영문인지. 새벽녘, 나도 모르게 센치해지면 가끔 지금의 생활이 무척 낯설게 느껴진다. 어느 누구의 삶인들 안 그러겠는가마는 거기에는 자꾸 의문이 남고 곱씹게 되는 지점들이 있다. 비슷하게 흘러가는 날들이 갑자기 다른 길로 돌아서게 되는, 우연적이고 돌발적인 순간들 말이다. 멋지게 말하면 변곡점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로서는 크게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다. 태어나 자랐던 시골의 교회공동체를 나오게 된 때와 어렵사리 들어간 대학을 그만두던 때.
명절 때 가끔 고향의 교회 친구들 소식을 건너 듣게 된다. 한 방에 살면서 산과 들을 쏘다니며 자란 그들은 하느님과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한다. ‘방황’이라 불리는 것을 해봤을지 모르겠지만, 매주 예배를 드리고 사순절을 지키면서 시골 교회 특유의 독립적인(혹은 배타적인) 문화 속에 있을 것이다. 이젠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는 어머니가 전과 같이 열심히 헌신하고 계실 그곳에. 내가 중학교 2학년에 올라갈 때 아버지는 반평생을 봉사했던 교회를 나오셨다. 나는 무서움 반 의심 반으로 얼떨결에 따라나섰다. 곧바로 기숙형 대안학교에 다녔는데, 역시 시골이긴 했어도 전국에서 온 ‘일반적인’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예배가 없는 일요일, 외식을 하고 여행을 가는 가족, 다른 무엇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성공을 위해 하는 공부가 있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되었다. 해방감과 불안감이 뒤섞인 묘한 기분이 일 년 정도는 이어진 것 같다. 그저 평범한 학생이 된 것이지만 나로서는 중대한 ‘경로 이탈’이었다. 어쩌다 보니, 신앙심이나 영적 상태가 전혀 문제 되지 않는 세상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내가 다닌 대안학교는 출세를 지향하는 학교였고 나 또한 이를 악물고 공부해서 서울로 대학을 왔다. 환경을 바꿔보겠다는 꿈과 무엇보다도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성공하고 싶다는 여망을 가지고 있었다(그 목표는 무려 UN이었다!). 중고딩 시절에 그랬듯 대학에서도 성실히 과정을 이수해서 착착 나아갈 계획이었다. 선배들과 동기들을 따라 학점을 잘 관리하고 차근차근 스펙도 쌓아가야지. 실패하긴 했지만, 군대에서 밤 시간을 쪼개 토익이나 환경기사 책을 펴기도 했다. 그런데 웬걸. 전역 후 복학생으로 한 학기를 마친 나는 또 다시 휴학을 했고, 그해 가을 학교를 그만뒀다. 환경을 살리는 일과도 관련이 없고, 사회적 성공과는 완전히 반대라고 할 수 있는, 연구실을 오가는 백수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얼마 전 일이긴 하지만 전체를 놓고 돌아보면 이 또한 희한한 궤도 변경이다. 지금은 거의 취직했을 친구들을 뒤로하고, 번듯한 직업이나 출세와는 전혀 무관한 길에 들어선 것이다. 역시 어쩌다 보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지금도 종종 꿈속에 교회의 풍경이 등장하고, 카카오톡 친구 목록엔 대학 동기들과 선배들 번호가 빽빽하다. 그렇지만 나는 하느님의 종도, 성실한 환경공학도도 되지 않았다. 나는 시골 교회의 궤도로부터, 그리고 대학과 성공의 궤도로부터 이탈했고, 사는 장소도, 생활 방식도, 원하는 것들도 아주 달라졌다. 그 당시에도 그랬지만 지금 돌아보더라도 왜 어떤 원인으로 그렇게 된 건지 뾰족하게 짚을 수가 없다. 확실한 것은 내가 의도하거나 계획한 일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다고 다른 누가 한 일도 아니다. 신? 신의 뜻이라면 교회를 등지게 할 리가 없잖은가. ‘보이지 않는 손’ 같은 법칙이라면 경제 논리가 안 통하는 생활로 들어가게 할 리가 없다. 그러니까 이 변곡점에는 이렇다 할 원인이 없다. 단지 내가 잘나서 해낸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나와 무관한 어떤 초월자나 법칙에 떠밀려 왔다고 하기에도 애매하다. 이 사건들을 어떻게 이해해볼 수 있을까?
우선, 나도 그 누구도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불쑥 일어났다는 점에서 우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연이라는 것은 언제나 모호하다. 조금만 시야를 넓혀서 여러 조건을 따져보면 결국 필연적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경험적으로도 안다. 지나가다가 날아오는 축구공에 맞았다. 우리로서는 험한 말이 튀어나올 우연적 사고다. 하지만 시점을 달리해보면 어떨까? 공의 입장에서는 찬 사람의 발 모양, 받은 힘의 세기, 바람의 방향 등에 맞게 운동한 것뿐이다. 맞은 사람 또한 나름의 이유로 그 자리에 있었던 것뿐이다. 즉 전체 정황을 헤아려 보면 일어날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렇다면 우연은 개체의 주관적인 관점에서만 성립되는 말일 것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차원에서는 너무 당연하고 명백한 필연적 과정들을 우리의 제한적인 시야 속에서 각색한 것이 우연이다. 모든 것은 필연이다. 우리는 필연 안에서 우연을 겪을 뿐이다. 이렇게 보면 내 삶의 경로 이탈도 모두 필연적인 일이었던 것이 된다. 엥? 그렇다면 더 이상 그것을 이탈이라 부를 수도 없지 않겠는가? 그 무엇도 경로를 벗어나지 않았으니까!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모든 것이 필연이고 일어날 일이 일어난다는 말은, 어떻게 보면 나타난 모든 것과 나타날 모든 것의 도면이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뜻과 같다. 다만 우리가 모를 뿐이다. 그렇다면 누가 아는가? 그런 존재가 있다면 아마도 신일 것이다. 신이 없다고 한다면, 자연 혹은 운명일 것이다. 우리는 잘 짜여진 시나리오대로 살아가는, 복잡하지만 예상 가능한 존재가 된다. 행동도 생각도 마음까지도 전부. 이렇게 생각하니 조금 섬뜩하다. 하느님은 다 알고 계획하신다는 말이 스친다. 그렇게 되면 교회로부터의 이탈까지도 신의 손바닥 위의 ‘방황’이라는 것 아닌가! 마치 소설 <백년의 고독>의 마지막 장면 같다. 가문이 겪어온 모든 사건이 양피지에 예견된 것의 실현이며, 마지막 인물 자신이 그 양피지를 읽고 충격에 빠지는 일까지 모두 쓰여 있음을 보는 장면 말이다. 이런 관점 속에서는, 그것을 우연이라 부르든 필연이라 부르든, 내가 겪는 모든 것이 그저 외부에서 부여된 운명처럼 느껴진다. 그렇다면 나는 정말 그저 운명으로서의 우연을 수동적으로 겪은 것뿐일까? 얼떨결에 벌어진 일이지만 거기에 나 자신의 영향은 조금도 없었던 걸까?
필연과 운명 속으로의 침몰. 이 문제를 누구보다도 심각하게, 가장 근원적인 차원에서 고민했던 사람이 루크레티우스다. 그는 생각한다. 세상과 인간이 불가피한 필연의 늪에 빠져버려서는 곤란하다고. 세상의 모든 사건은 이미 설정된 인과법칙에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 미신과 향락이 극에 달했던 그 시기, 모든 게 필연이라는 생각은 곧 체념과 자기 포기로 이어졌을 것이다. 영혼의 지복과 자기 구원을 목표로 하는 루크레티우스는 필연의 그늘로부터 우연을 구해내야 했다. 정확히는, 우연처럼 보이는 사건들을 주어진 운명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설명해낼 수 있어야 했다. 이를 위해 그가 가장 문제 삼고 맞서야 했던 사상은 종교나 다른 외도들의 학설이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그 자신의 철학의 토대인 원자론이었다! 루크레티우스는 운명이라는 이 무거운 속박을 풀기 위해 그는 스승들의 원자를 약간 비틀었다. 이것이 바로 원자들의 빗겨남, 클리나멘이다.
2. 데모크리토스를 넘어서
루크레티우스의 주안점은 시종일관 평정과 행복이다. 자연에 대한 어떤 이해방식이 우리의 불안과 두려움을 치유할 수 있을까? 루크레티우스는 원자론을 택했다. 원자론은 사물을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가장 작은 씨앗들의 집합체로 보는 사유다. 세상은 원자와 허공으로 되어 있다. 물이나 땅이나 동물 같이 물체적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신도, 영혼도, 생명도, 감정이나 생각도 모두 원자다. 태어남은 원자들의 결합이고 죽음은 해체다. 그렇기에 우리는 죽음도, 사후의 심판도, 신의 분노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이런 혁명적인 주장들은 모두 최초의 원자론자 데모크리토스의 유산이다. 그의 원자론은, 근원적 ‘일자’를 주장하며 모든 감각과 운동을 부정한 파르메니데스를 반박하면서 시작되었다. 원자들 각각은 그 자체로 불변하지만 모이고 흩어지면서 세계를 빚어낸다. 원자와 더불어 ‘일자’는 해체되고 대신 변화와 운동이 들어섰다. ‘태초’나 ‘섭리’, ‘창조자’로서의 신은 사라졌다. 모든 것은 허공 속의 무수한 원자들의 이합집산이다.
하지만 루크레티우스가 보기에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에는 사소하지만 치명적인 문제점이 하나 있었다. 일어나는 모든 일은 세계 내부에서 설명되지만, 그 내부의 완결성 자체가 다른 한편에서 또 다른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원자는 운동한다. 시작도 끝도 없이 이어져온 그 운동이 삼라만상을 만들고 흩뜨린다. 그럼 그 운동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타격이다. 허공 속을 움직이는 다른 원자들과의 충돌, 그것이 데모크리토스가 말하는 운동의 원인이다. 즉 세계는 마치 당구대 위에 당구공들처럼 서로서로의 연쇄적인 타격에 의해 움직이는 원자들로 이뤄진다. 그런데 이걸로 정말 충분할까? 다시 말해, 운동의 ‘원리’에 대한 설명이 된 건까? 조금 더 클로즈업해 보자. 어떤 원자 하나의 현재 운동 상태는 다른 원자의 타격에 의해 규정된 것이다. 그럼 타격을 가한 그 원자의 운동은 어떻게 이뤄졌는가? 이전의 타격. 그리고 다음은? 더 이전의 타격. 이대로라면 타격들의 시작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최초의 창조 계획이나 의도 같은 것을 묻는 게 아니다. 원자의 운동이 그저 다른 원자에 의한 것이라는 식의 모호한 대답이라면 이렇게 무한 소급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원자론에서 최초의 원인으로서의 신을 부정했으니(혹은 원자로 만들어버렸으니), 데모크리토스는 운동의 시작에 대해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원래부터 그랬다!” 이렇게 보면 그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비판은 합당했다. “데모크리토스는 목적인을 다루지 않았고, 자연의 모든 길을 필연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데모크리토스의 우주론에서 원자는 언제나 기계적인, 즉 외부에서 강제된 운동을 따르며, 그런 원자들이 만드는 모든 사건은 필연적인 것들, 즉 ‘원래 그랬던 것들’에 다름 아닌 일이다.
실제로 데모크리토스는 무게를 가진 원자가 그저 운동한다고만 이야기했지 운동의 원리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루크레티우스가 의문을 제기한 지점은 여기다. 원자가 그저 수동적으로 반작용만 한다면, 즉 다른 것이 와서 쳐줘야만 움직이 가능해진다면, 그 운동을 거슬러 올라갔을 때 무엇이 나올까? 결국 자기 무게 때문에 비처럼 아래로만 떨어지고 있는 정적인 세계가 아닐까? 거기서는 어떤 충돌도 일어나지 않고 그렇기에 어떤 사물도 생겨날 수 없을 것이다. 오 이런. 이래선 안 된다. 다행히 지금 이 세상은 이런 암울한 태초의 풍경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면 분명히 원자의 운동에는 다른 원리가 있을 것이다.
원래 그랬음으로 귀결되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의 문제는, 그것이 말하는 기계적이고 필연적인 운동이 곧 결정론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항상 모든 운동이 연결되어 있고, 새 운동은 옛 운동으로부터 정해진 순서를 좇아 생겨난다면, 그리고 기원들이, 원인이 원인을 무한한 시간부터 좇게”된다면, 그런 우주는 결국 “운명의 법”(2:252) 아래 놓이게 된다. 불가피한 운명을 상정하게 하는 결정론은 인간을 무력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종교와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 에피쿠로스는 그것이 기도드릴 신조차 남기지 않는다는 점에서 종교보다도 해롭다고 말했다. 운명은 가능성이 아니라 체념을, 도전이 아니라 순응을 가르친다. 즉 ‘다음 순간 무엇을 할 것인가?’하는 질문을 차단한다. 모든 것이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우리는 우연 앞에서도 필연 앞에서도 그저 당할 뿐인 무력한 존재가 된다. 세계 구석구석까지 모든 것이 결정된 대로다. 그 결정자가 저 위의 신에서 이 아래의 원자들로 변했을 뿐.
그런데 이런 결정론이 왜 문제가 되는 걸까? 어차피 알 수 없는 차원에서의 결정이라면 그저 겪을 것을 겪는다는 생각으로 즐겁고 명랑하게 살아가면 되지 않는가? 맞다. 그것이 루크레티우스가 원하는 바다. 무구한 원자의 자연을 이해하여 우리가 갖고 있는 편견에서 오는 괴로움 넘어가는 일 말이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라도 모든 것은 정해져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바로 그렇게 즐겁고 명랑하게 되는 것, 다시 말해 자연을 배우고 우리의 생각의 습관과 생활의 방식을 바꾸는 사건 자체는 우리 자신의 소관이어야 한다. 마음의 차원이든 행위의 차원이든, 지금의 불행에 머물지 않을 수 있는 우리 자신의 선택의 영역이 남아 있어야 한다!
루크레티우스는 에피쿠로스주의자다. 에피쿠로스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영혼의 평정으로서의 행복이며 그 방법은 쾌락의 추구다. 물론 이때 쾌락은 단순한 향락이 아니다. 우리가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듯 쾌락이란 것은 무작정 추구한다고 따라오지 않는다. 즉각적이고 손쉬운 쾌락은 언제나 고통을 동반한다. 멍청이가 아니고서야 우리는 다음 순간에 곧바로 고통으로 바뀔 쾌락을 쫓지 않을 것이고, 쾌락이 방탕과 무절제한 탐닉에서 얻어질 수 없음을 알 것이다.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는 오히려 소박한 생활과 절제에 기반한다. 그렇다고 모든 감각적 요구를 부정하는 금욕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 철학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어떻게 현명하게 쾌락을 영위할 수 있는가?’하는 질문과 그로부터 따라 나오는 생 전반의 수련이다.
여기서 더 없이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의 신중한 선택이다. 에피쿠로스는 다음 순간의 행위를 숙고하는 능력인 ‘사려’(phronesis)를 찬양한다. 에피쿠로스학파에게 “가장 큰 선은 사려, 즉 선택하는 것이 나은지 피하는 것이 나은지를 가장 정확하게 계산하는 기술인 것이다.”(장 살렘, <고대원자론>, 134쪽) 그것이 정말 나 자신에게 기쁨을 주는가? 어떤 쾌락으로부터 더 막대한 고통이 결과할 것임에 틀림없다면 피하고, 만일 더 유효한 쾌락을 준다면 그 고통을 무릅쓰라는 것. 이러한 선택의 윤리가 영혼의 행복에 대한 에피쿠로스의 가르침이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외부 조건들과 연루되어 있으며 그것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지 자신에게 질문하고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미래는 냉담하게 쓰여진 시나리오여서는 안 된다. 그것이 자유의지라고 불리든 해방이라고 불리든 우리는 우리 손으로 지복에 이를 수 있다. 따라서 원자들의 기계적 운동에는 숨구멍이 있어야 한다.
3. 어떤 원인도 없는 운동
그리하여 필요한 것은 결정론을 벗어날 수 있는 원자 내부의 원리다. 세상 위에서 지배자 노릇을 하는 그 무엇도(완벽한 법칙성 자체도) 상정하지 않을 방법은 내재론 뿐이다. ‘충돌을 통해 강요된 운동’만이 존재한다는 옛 원자론은 변경되어야 한다. 필연이라는 빙산의 일부로서의 우연이 아닌, 원자 내부에 자리 잡는 원리 혹은 본성으로서의 우연적 움직임이 있어야 한다. 이때의 우연은 아직 알려져 있지 않은 질서의 한 단면이 아니라 “순수 ‘비질서적인’ 사건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말테 호센펠더, <헬레니즘 철학사>, 341쪽) 루크레티우스는 이러한 비질서적인 ‘일탈’을 원자 자체에 집어넣었다. 우리뿐만 아니라 원자 자체가 우연을 겪는다. 즉 원자가 자기 경로를 이탈한다. 클리나멘의 탄생!
“이 주제와 관련해서 이것도 그대가 알기를 원하노라, 즉 물체들이 자체의 무게로 인하여 허공을 통하여 곧장 아래로 움직이고 있을 때, 아주 불특정한 시간, 불특정의 장소에서 자기 자리로부터 조금, 단지 움직임이 바뀌었다고 말할 수만 있을 정도로, 비껴났다는 것을.”(2:215)
원자들은 ‘그냥’, ‘갑자기’, ‘무작위적으로’ 빗겨난다. 원래 직선으로 나아가던 것이 아주 약간 경로를 벗어나 버리는 것이다. 여기에는 아무런 사전(事前)적 결정 요소가 없다. 다시 말해 외부적 원인이 없다. 원인이 결핍된 불연속적 운동. 이 말 자체가 하나의 스캔들을 일으킨다. 그 당시에는 물론 현대까지도, 자연학자에게 있어서 어떤 사태가 아무 원인 없이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것보다 더 수치스러운 일은 없기 때문이다. 어떤 신비스러워 보이는 일이라도 거기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변수가 숨어 있을 거라는 믿음은, 양자역학에 의해 불확정성의 원리가 발견된 후에도 잘 사라지지 않는 것이었다. 현대물리학에서 입자의 운동량과 위치가 결정되어 있지 않고 확률로 존재하듯, 루크레티우스의 원자도 그 자체에 언제라도 흐름을 이탈할 잠재성, 결코 결정되지 않는 여백을 내장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이미 이천 년 전에 루크레티우스는 클리나멘 개념으로 세계의 불확정성을 선포한 셈이다.
사실 원자의 운동에 편위(偏位)가 일어난다는 주장이 스캔들이 된 데에는 고대철학에서의 논쟁이 비실증적이라는 점도 한몫한다. 클리나멘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우리는 원자를 볼 수 없다. 그러므로 당연히 원자의 빗겨남도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시초들의 모든 본성은 우리 감각의 한참 밑에 놓여있기 때문이다.”(2:313) 그러나 우리는 원자를 사유할 수는 있다. 감각할 수 없는 차원이지만 사물들의 운동을 설명함에 있어서 원자와 허공이 요청되었듯이 클리나멘도 하나의 요청된 사유였다. 고대의 자연학은 세계에 대한 해석을 주장하는 것이지 현대의 과학처럼 팩트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몇 가지 근거들을 들어 그 주장을 뒷받침할 뿐이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어떤 원리를 주장하는가는 곧 그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려 하는가이다. 어떤 학파가 주장하는 자연학 자체가 그 학파의 윤리를 반영한다. 따라서 원자의 운동이 일정 부분 불규칙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 사람이 우리의 삶이 그저 강요된 방식으로 쓸려가지만은 않으며 어디든 작은 출구가 마련될 수 있음을 믿는다는 것을 뜻한다. 루크레티우스는 인간을 믿었다. 언제까지나 우리가 강요되는 같은 방식으로 살고 느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음을.
“그러므로 씨앗들에게 있어서도 같은 것이 인정되어야 한다, 운동들에게 타격과 무게 이외의 다른 원인이 있다는 것이. 거기서 이 능력이 우리에게 생겨나는 것이다, 무로부터는 아무것도 만들어질 수 없음을 우리가 아니 말이다. (...) 정신 자체는 모든 일들이 일어나는 데 있어 내적인 강요를 갖지 않으며, 마치 패배한 존재인 듯 견디고 참도록 강제되지 않는다는 사실, 이 사실은 시초의 아주 작은 비껴감이 만든다, 장소에 있어 정해지지 않은 곳에서, 정해지지 않은 순간에.”(2:284-292)
원자들의 경로 이탈은 태초부터(사실 태초는 없지만)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최소 거리 이상은 아니다.”(2:243) 관측 불가능한 정도의, 우리가 사유할 수 있는 최소치보다 더 작은, 미세한, 찰나적인 비껴남이 일어난다. 그런 한에서 전제되어야 할 것은 사물들의 질서에서 불규칙적인 모습이 아주 미미하다는 것이고, 그래서 그로 인해 세상이 ‘무질서한 것’으로 해석될 필요까지는 없다는 사실이다. 세계의 리듬은 유지된다. “생겨나 버릇하던 것들은 같은 여건을 따라 생겨나고 존재하고 성장하고 힘에 있어 왕성할 것이다, 자연의 협정에 의해 각각에게 주어진 만큼.”(2:300) 이것으로 루크레티우스는 사물들의 지속성과 비합목적성을 함께 말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자연은 일련의 연속성을 가지고 운행되는 동시에 변화가능성을 내장하고 있다. 관성의 법칙에 맞게 사물들은 이전의 운동과 경향성을 유지하려 한다. 하지만 모든 사물들을 이루는 원자는 ‘장소에 있어 정해지지 않은 곳에서, 정해지지 않은 순간에’ 그 규칙성을 이탈하고 궤도에 여백을 만들어낸다. 세상이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할 때의 원자는 그 같은 ‘이유 없는 이탈’의 잠재성을 내재한 원자다. 이 발칙한 원자들 이모여 이루고 있는 것이 우리의 몸이자 생각이고,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결정되어 있는 것은 없다. 세계는 아주 깊숙한 곳, 가장 작은 것에서부터 어느 정도 ‘미정’이다. 그렇다면 매번 남는 문제는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다.
4. 틈을 칠하는 문제
클리나멘이라는 개념을 고려했을 때, 내 짧은 인생의 ‘경로 이탈’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지금까지 나는 그 변곡점들에 대해 의아함과 더불어 안도감과 감사함을 갖고 있었다. 새벽녘의 센치함으로, 이것은 내게 행운이었구나, 참 다행이구나 하며 감상에 젖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단지 그때의 기분과 컨디션에서 나온 일시적 평가에 불과하다. 다음 순간에는 전혀 좋지 않은 이탈로 보일 수도 있고, 또 예기치 않은 순간에 삶이 또 다른 경로로 나아가 버릴 수도 있다. 클리나멘은 우리 몸과 정신에서도 일어나지만 당연하게도 우리 바깥에서 더 많이 일어난다. 사고가 나거나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서 지금과 같이 공부하는 삶을 살지 못하게 된다면 어쩔 건가? 그렇다면 그런 이탈을 불운이라며 미워할 것인가? 루크레티우스는 클리나멘이 일어난다고 했지 그것이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원자는 좋음이나 나쁨을 모른다. 사건들을 우발적으로 발생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에 전적으로 좌우되는 무력하기만 한 존재는 아니기에, 그 틈새를 기쁨으로 채색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그렇다면 지나온 변곡점들을 바라보며 내가 새겨야 할 한 가지는, 무엇도 정해져 있지 않고 무엇도 강요받는 대로만 흘러가지는 않는다는 사실일 것이다. 나는 하느님의 종이 되지 않았고 환경공학도가 되지도 않았다. 그것이 좋다 나쁘다는 부수적인 문제다. 또 앞으로 무엇이 될지도 결정되어 있지 않으니까. 중요한 것은 이 자리에서 내게 어떤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어떤 생각들을 할 수 있는가를 곰곰이 묻는 일이다. 그러면서 즐거울 수 있는 사려 깊은 선택들을 해가기. 똑같은 궤도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결정되지 않을 여지는 여기에 있다. 이것이 클리나멘과 더불어 매 순간을 기쁨의 우연으로 만드는 일 아닐까.
글_성민호(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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