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돌고 돌아 루크레티우스를 만나다

돌고 돌아 루크레티우스를 만나다


그깟 과학 나부랭이?
그놈은 무용할 뿐 아니라 해롭다! 학교를 그만둘 즈음부터 지금까지, 환경공학에 대한 내 입장은 변함없이 단호했다. 그동안 ‘전공에 회의를 느꼈다’고 점잔빼며 말해왔지만 실은 삐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엥? 아무리 삐돌이라 해도 학문에 삐질 수가 있다니? 가능하다. 기대가 컸다면. 우리는 심지어 날씨나 운명에까지도 성을 내지 않는가.

 


그때나 지금이나 환경공학에 대한 내 판단은 이렇다. 이 학문의 취지도, 구체적 커리큘럼도, 거기 종사하는 사람들도 환경에는 별 관심이 없구나. 아, 이걸로는 사슴벌레 한 마리도 살릴 수 없겠구나. 학부 건물 현관에 언제나 어지럽게 솟아있던 분리수거통의 모습이 선명하다. 오염물질을 없애고 수치를 낮추고 안 보이게 만드는 일에 자부심을 느낄지는 모르지만, 환경문제를 밥줄로 여기고 신기술개발을 해답으로 여기는 이상 환경공학에 출구는 없다. 지구를 구하는 공학자들? 천만의 말씀. 그 화려한 기술들이 지키는 건 결국 우리의 안락함, 우리의 쾌적함과 편안함, 아무것도 다르게 하지 않아도 됨, 쓰던 대로 쓰고 먹던 대로 먹고 누리던 대로 누려도 무방함, 마지막으로 그러한 공학의 필요성 자체, 그뿐이다. 풍요와 편리를 담보로 한 발전의 자기정당화. 보라, 이것이 바로 그 아름다운 ‘지속가능한 발전’의 반생태적 민낯이다!

환경공학에 실망감이 컸던 건 거기에 불어넣은 희망과 기대 때문이다. 이것이 정말 생태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 그러기 위해 필요한 지식과 행동들을 알려줄 거라고, 이것을 배우면 보다 생태적으로 살게 될 거라고, 적어도 전공자들이라면 차이가 있을 거라고. 하지만 다를 게 없었다. 약간의 거드름이 추가되었다는 것 외에는. 하지만 생각해보면, 애초에 환경공학 자체가 환경을 바꾸겠다는 학문이지 사람을 바꾸겠다는 학문은 아니지 않은가. 그것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우리의 생활습관과 소비패턴을 지적하거나 자본주의적 욕망과 기업의 생산구조를 고발한다면 주제넘는 짓일지도 모른다. 삶에 관여하는 것은 공학의 임무가 아니다. 나아가 과학의 임무도 아니다. 생각을 돌이키게 하거나 우리의 생활 방식을 바꾸게 할 책임은 과학에 없다. 학문이 윤리적이지 못하다고 비방하는 것은 부당하다. 이처럼 나의 실망과 배신감은 과학을 삶과 고립시켜 생각하는 태도로 이어졌다.

‘문송합니다’라는 말이 있다. 취업과 관련해서 문과생들이 농담하듯 스스로를 폄하하는 말인데, 볼 때마다 난 괜한 자격지심을 감출 수 없다. 그럼 이과생은? 이과생이야말로 무식이 깜깜이 아닌가? 정작 삶에서 중요한 문제들인 정치적 현실이나 역사적 사건들에 대해 까막눈인데 뭐가 잘났다는 걸까? 철학이나 예술에 대한 감각은 말할 것도 없다. 도대체 소양이란 걸 결여한 공학이나 과학 나부랭이가 뭘 해줄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스펙과 밥벌이 면에서는 유용할지 모른다. 하지만 수학, 화학, 물리학, 토질역학, 생명공학 자체가 일상의 문제들에 무슨 도움을 주겠는가? 정치적으로 진지해지는 것도 아니고, 인간관계에서의 지혜가 생기는 것도, 살림의 노하우를 얻는 것도 아니다. 번뇌가 들끓는 마음의 소란에 잘 대처하게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사실상 우리 자신과 직접적 관련이 없는, 저 멀리의 팩트들을 쌓는 것이 과학 아니던가. 과학은 무책임하다. 이건 실망할 게 아니라 당연한 거다. 정서적이고 사적인 문제와 별개로 물질적이고 객관적인 자연의 현상을 다루는 것이 과학의 소임이다. 과학은 과학이다. 철학이나 종교나 문학도 아닌데 거기서 윤리나 비전 같은 것을 기대하는 것은 파울이다.

과학에 대한 체념과 과학이 줄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갈증. 이런 생각이 내가 학교 밖을 기웃거리게 된 중요한 이유였던 것 같다. 내가 ‘인문학을 공부하는 이과생’ 이미지에 끌렸던 것도 단지 허세만은 아니었다(!). 무엇이 생태적인 삶인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등 이과생으로서는 좀처럼 하지 않고 하지 않아도 되는 고민들에 일말의 힌트를 얻고 싶었던 것 아닐까? ‘과학 나부랭이’가 어찌할 수 없는, 쉽게 잦아들지 않는 마음속 소란들을 어찌해보려고 말이다.


과학은 그런 게 아니었어!
그래, 환경공학이 결코 생태적이지 않다는 건 알겠다. 그렇다고 ‘북극곰을 위해’ 기부하거나 피켓을 드는 것도 뭔가를 놓치고 있는 것 같았다. 전공도 NGO도 생태적 삶은 아니라고 생각한 나는 우선 기초부터 배워보려 세미나를 시작했다. 그 이름은 함께 생태를 공부한다는 의미의 ‘코코 세미나’! 단촐한 시작이었지만 두근두근했다. 드디어 기회가 왔구나. 이제 과학 나부랭이가 아니라 진짜 생태적 삶을 알려주는 사유를 배워보자. 시즌1에는 여러 생태주의 관련 텍스트를 읽었다. 처음 접해보는 생생한 논의들은 어려웠지만 매력적이었다. 특히 근대 과학과 인간주의를 향한 비판들은 무척 통쾌했다. 나는 열심히 비전이나 윤리가 될만한 것들을 찾아보려 했다. 하지만 ‘이건 내 영역이야’ 하는 자의식이 너무 강해서였는지 금방 지쳐버렸고, 함께 시도했던 <민생담> 글쓰기도 몇 회 만에 흐지부지되어버렸다. 주로 환경담론이나 과학주의를 어줍잖게 비판하는 내용이었는데, 문장마다 힘이 꽉 들어가 있어서 쓰기도 읽기도 힘겨웠다. 내가 읽은 훌륭한 텍스트들의 저자들처럼 뭔가 비장하고 중대한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달랑 책 몇 권 겉핥기식으로 읽은 주제에 말이다.

그때 어렴풋이 느꼈다. 나는 과학을 폄하해왔지만 정작 내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나 나 자신에 대해서 ‘과학적으로조차’ 무지하다는 것을. 과학이 줄 수 없는 실질적 윤리를 고민하기 위해서라도 과학에서 말하는 지식들을 알아야 할 것 아닌가? 사실 말이 좋아 이과생이지, 교과서에 나오는 기초상식 몇 조각만을 기억할 뿐이었다. 심지어 그마저도 엉성했다. 그러니까 나는 생태적 삶이나 성찰 같은 것에 대해 떠들어대면서도 정작 나를 둘러싼 물질세계의 운동들은 보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무엇이 환경이고 무엇이 생태인가? 그것이 땅인지 하늘인지, 도시인지, 아니면 우리 몸인지 마음인지, 또 그것들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부터 우선 배워야 했다.

 


이런 반성으로 나는 과학공부를 시작했다. 작년 한 해 동안 원자, 세포, 유전자, 지질 등을 다룬 기초과학서적을 읽어가면서 과학에 대해 가졌던 반감 혹은 체념이 조금 달라졌다. 과학은 내가 생각해왔던 것만큼 오만하지도 독단적이지도 않았다. 따끈따끈한 과학 지식을 모은 <거의 모든 것의 역사>에 가장 많이 나오는 문구는 (제목이 무색하게도) “우리는 놀라울 정도로 모른다”는 말이었다. 내게 과학은 언제나 우리가 궁금해하기도 전에 태양계나 지구나 인체가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를 알려주는 팩트 전달자였다. 우리로서는 숫자와 실험 등의 증명으로 무장한 그 지식들을 군말 없이 그러나 별 감동도 없이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세미나를 하다 보니, 막상 과학은 자신의 성과를 팩트나 진실로서 강요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에 권위를 부여한 것은 교육자나 사업가나 정치가이지 과학자는 아니었다. 우리가 읽은 책의 그 어떤 과학자도 자신들을 ‘뭘 좀 아는 놈’으로 규정하지 않았다. 그 반대였다. 정말 과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해결되지 않은 새로운 수수께끼 속에 있었다. 어쩌면 그들이야말로 인간이 아는 것이 정말 작음을, 또한 그것마저 임시적이고 수정되어야 할 것임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앎을 공고히 하고 주입하고 확신시키는 것은 과학과 가장 먼 일인지도 모른다. 오히려 과학은 정반대의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니체는 말한다. “과학은 우리가 바보처럼 외관만 보고 모든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건에서 [복잡한 인과관계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단순한 인과관계에 대한 믿음을 버리게 한다”고.(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2』, 6절) 가만 생각해보면 우리의 모든 편견, 오해, 기대, 실망 등의 뿌리는 바로 ‘단순한 인과관계에 대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안다고 의식하기도 전에 이미 알고 있고 믿고 있는 상식과 표상이다. 이건 좋고 저건 나쁘고, 이건 저것 때문이고 저건 이것 때문이라는, 빈약한 경험에 근거한 빼곡한 앎들. 우릴 배반하고 번뇌에 빠뜨리는 것은 이처럼 편협하지만 확신에 찬 앎이다. 하지만 니체가 말하듯, 과학 혹은 과학의 방법은 사물들이 우리가 아는 대로 존재하지 않음을 말해준다. 이로부터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 세계를 실체화하기를 멈출 수 있고, 그럴 때 과학은 우리 자신의 경험과 습관을 되물을 수 있는 도구가 된다. 진리를 굳히는 것이 아니라 의심하기. 진리를 흔들다리 위에 놓기로서의 과학공부라면 어떨까!

하지만 여기까지 가기는 어렵다. 보통 내공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과학책을 읽고 자기 인식의 부적합성을 통찰하는 데까지 이르겠는가? 좋든 싫든 과학은 입증될 수 있는 객관적 사실들을 다룬다. 측정할 수 없고 실험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말할 수는 없다. 인간의 기쁨과 슬픔, 욕망과 두려움 같은 정서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 과학에 대해 조금 겸손해지기는 했지만 과학은 여전히 아침부터 밤까지 피어오르는 내 마음의 소란들을 풀어가기에는, 나아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를 고민하기에는 부적절했다.

과학의 완전히 다른 형태와 능력을 보게 된 것은 작년 여름 고대 원자론을 배우면서부터였다. 기초를 훑었으니 우리는 가장 작은 세계부터 공부해보기로 했다. 우주가 쪼갤 수 없는 최소 입자인 원자로 되어있다는 생각은 언제 왜 시작되었을까? 원자의 기원으로 올라가 고대 그리스를 공부하다 보니 특이하게도 거기에는 내가 아는 것과는 딴판인 과학이 있었다. 자연을 탐구하는 일 자체에 이미 ‘어떻게 잘(=올바르게=아름답게=행복하게) 살 것인가’하는 물음이 내재해 있었던 것이다. 삶의 변화와 행복을 전제하지 않은 탐구는 없었고, 탐구 활동을 수반하지 않은 채 올바르게 살기란 불가능했다. 어떤 학파나 마찬가지였다. 하늘, 땅, 도시, 동물, 몸, 영혼이 무엇으로 되어있고 어떻게 운동하는가에 대한 지식은 다이렉트로 삶의 방향 설정에 연결되었다. 즉 과학은 윤리와 한 몸이었다. 그것은 내가 알고 있는 ‘과학science’이라는 말로 규정하기에는 너무 풍요로웠다. 탐구는 탐구하는 자를 바꿔놓는다. 자연학(physics)이라고 불린 고대의 탐구는 그런 점에서 모두 철학에 속했다. 이거야말로 내가 찾던 것이었다! 자연학을 배우자!

물론 고대의 자연학은 종류가 많을 뿐 아니라 그 오래된 개념들이 현재 우리 세계를 타당하게 설명해주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고대에는 자연의 이치나 사물의 근본적 원인들을 아는 것이 모든 철학에서 필수적이었다. 왜일까? 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 같은 윤리의 문제가 자연학적 앎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걸까? 사회의 룰이나 도덕규범들,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이런저런 지혜와 노하우로는 부족했을까? 확실한 건, 지금껏 내가 중요하다고 여겨온 것은 과학이 결여한 윤리나 비전인데, 고대인들에게 그 윤리나 비전은 과학 즉 물질세계에 대한 탐구 없이는 갖춰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걸 알고 나니 질문이 바뀌기 시작했다. 왜 지금까지 ‘착하게 살아야지’, ‘열심히 해야지’와 같은 나의 다짐들과 결의들은 번번이 실패했는가? 살아감에 있어서 우리의 도덕과 의지는 왜 늘 실패하는 걸까? 그건 아마 ‘이렇게 살자’라는 결의가 우리 몸과 마음의 구성이나 운동방식을 무시한 채 이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약한 의지를 탓하거나 뜻대로 되지 않는 몸뚱이 혹은 세상을 탓한다. 이렇게 정신과 신체는 분리된다. 그게 아니라고 그토록 배워왔지만, 몸과 마음과 사물들의 운동방식과 그 원리로부터 출발하지 않는 이상, ‘정신만 차리면’, ‘마음만 먹으면’ 잘 살 수 있다는 정신주의로 또 다시 돌아가게 된다. 왜 윤리의 문제가 ‘사물의 본성’에 대한 근원적 탐구에서 시작되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내 다름의 답변은 이렇다. 그것이 우리 자신과 우리가 겪는 사건들을 ‘내가 잘하면’, ‘저놈 때문이다’, ‘신의 벌이다’라는 판단들로 환원하지 않을 수 있는 길이기에. 그래서 자책하거나 원망하거나 심판하지 않을 수 있는 길이기에. 이 길을 루크레티우스의 안내를 따라 가보려 한다. 아, 우스형!

 

마침내, 루크레티우스를 만나다
무엇보다도 내가 루크레티우스에게 반한 이유는 그가 노래하는 ‘사물의 본성’이 전적으로 우리의 지복(至福)을 향하기 때문이다. 물론 지복과 무관한 자연학은 없지만, 루크레티우스의 경우는 우리를 뒤흔들고 옭아매는 두려움과 욕망이라는 정서의 치유에 초점을 맞춘다. 우리를 짓누르는 두려움은 어디서 오는가? 우리는 왜 그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가? 자연의 이치를 설명하는 그의 방대한 시(<사물의 본성에 대하여>는 6편으로 이루어진 웅장한 詩다.)에는 이 두 질문이 메아리치고 있다. 우주의 운동을 설명할 때도, 신이나 영혼의 구조, 죽음과 운명을 설명할 때도 마찬가지다. 문제가 되는 것은 오직 불안과 공포와 탐욕을 떨쳐내는 일이다.

루크레티우스는 말한다. 진정으로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히드라나 사자나 멧돼지 같은 숲속의 야수들이 아니라고. 그 시기 로마는 이미 도시가 완비되었고 숲은 개간되었으며, 사람들은 결코 자연의 괴물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해결해야 할 재난은 오히려 ‘안쪽’에 있었다.

반면에 가슴 속이 정화되지 않았다면, 그때 우리는 어떠한 전투와 위험 속으로 내키지 않으면서도 들어가야만 하는가? 그때는 욕망에서 비롯된 얼마나 날카로운 근심이 인간을 뒤흔들어 찢는가, 그리고 얼마나 큰 두려움이? 혹은 오만함, 비열함과 방자함은 어떠한가? 이들은 얼마나 큰 재난을 일으키는가?(루크레티우스, 강대진 옮김,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아카넷, 5:43-48)

이 대목에서 그의 문제의식과 철학이 나와 우리 시대가 겪고 있는 문제를 풀어가는 데 무척 유용하겠다는 ‘필’이 왔다.

사실 루크레티우스에 대해 알려진 자료는 전무하다고 볼 수 있어서(유일한 정보는 그의 시집과 불확실한 생몰년대 뿐), 그가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문제의식을 품었는가는 추측의 영역이다. 그럼 한번 추측해보자. 그가 살았던 기원전 1세기 로마는 향락과 불안이 공존했다. 당시 로마는 아직 황제만 없었지 사실상 제국으로서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고 정복국가들로부터 무지막지한 전리품과 부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팍스로마나’ 직전의 고도성장기라고 할까. 수도관이 깔리고 목욕탕이 세워졌고, 극장과 체육관이 붐볐으며, 부역과 병역은 노예가 대신했다. 그런 와중에도 원로원에서는 정쟁이 계속되었고 이민족의 침입 및 반란으로 사회는 늘 전시상태였다. 사치와 더불어 불안이 만연했고, 오락과 동시에 미신이 유행했다. 각종 구원종교와 이교 신앙이 전례 없이 증가했다. 니체는 이미 이때부터 그리스도교적인 제의 혹은 그 교리를 원하는 심리가 퍼져 있었다고 말한다. 루크레티우스는 바로 이런 번다한 시기에 인간의 번뇌를 진단한 것이다.

어쩐지 저 이천 년 전 풍경이 우리 시대와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다르다면 너무나 많이 다르다. 하지만 끊임없는 컨텐츠와 오락 속에 살아간다는 점에서는, 그래서 눈과 귀와 입이 자극에 내맡겨지는 와중에도 불안 속에 있다는 점에서는 닮았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극을 투여받고 또 그것이 끊이지 않기를 추구한다. 한시도 멈추지 않고 주의를 분산시키지 않으면 벌이라도 받는 것처럼. 그토록 많은 것을 먹고, 마시고, 보고, 사고, 듣고, 갖고, 버리면서 우리는 대체 무엇을 갈구하고 있는 걸까? 마치 아무것도 하지 않음, 멈춰있음 자체를 병적으로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욕망의 확장, 분산, 전이, 갈구. 자극 자극 자극.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더 큰 공허뿐이다. 우리는 마음의 공허를 직시하지도 붙들지도 못하고 끊임없이 회피하거나 환상들로 덮으려 한다. 나름의 미신들을 만들어가면서 말이다. 굳이 종교들을 언급하지 않아도 우리가 의존하는 주식, 보험, 백신, 의료서비스 등에 대한 맹목적 믿음을 보라. 그러나 우리는 동요하는 우리 마음 하나를 어쩔 줄 모른다. 바로 그게 나다. 그래서 루크레티우스는 말한 것이다. 가슴속을 정화해야 한다고. 어떻게?

 

땅과 하늘의 이치가 포착되어야 한다, 폭풍들과 눈부신 번개들이 노래되어야 한다,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대체 어떤 원인에서 생겨나는지. 그대가 정신 놓고 두려워하지 않도록 말이다.”(루크레티우스, 강대진 옮김,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아카넷, 6:83-86)

 

중요한 점은 그가 가슴속을 정화시키는 이 작업의 수단, 다시 말해 우리가 사로잡힌 정념과 탐진치 번뇌와 싸우는 무기를 종교적 위안이나 형이상학적 사변이 아니라 자연의 이치에서 찾고 있다는 것이다. 루크레티우스는 스승 에피쿠로스를 본받아 이 자연학의 토대에 우선 원자를 놓는다. 우리의 몸도, 영혼도, 신도, 우주도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설정. 이러한 설정으로부터 사유를 펼치면서 루크레티우스는 우리를 지복에 이르는 길로 인도한다. 어떻게 세계를 원자로 보는 관점으로부터 영혼의 평정에 도달할 수 있을까. 나는 이제 내가 가보지 않은 그 길을 따라가보려 한다.

 

글_성민호(고전비평공간 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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