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비평공간 규문에서 활동 중인 민호님의 [청년, 루크레티우스를 만나다] 연재를 시작합니다. 맑스부터 들뢰즈까지 '대항 사유'를 고민했던 많은 사상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루크레티우스와 21세기 한국의 청년은 어떻게 접속했을지 궁금합니다. 많은 기대와 관심 부탁드립니다.
민호의 규문 상륙기
소란소란
아침부터 요란하다. 시끄러운 알람에 오만상을 하고서 몸을 뒤틀어 잠을 쫓고 나면, 일단 이불 위에 반가부좌를 하고 앉는다. 뜬금없지만 나름의 루틴이다. 그렇게 약 십분간 마음을 가라앉히는 명상을 한다. 공(空)에 대해서, 보리심에 대해서 생각해보려는 어설픈 시도가 졸음과 잡념에 묻혀 흔적도 안 남았을 때쯤 시계를 보고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간다. 거울 앞에서 간밤에 새로 난 여드름을 비춰보며 한숨을 한번 쉬고, 깡마른 몸을 보고는 ‘운동을 좀 해야 하는데’라고 어젯밤에도 한 말을 또 되뇐다. 팔굽혀펴기라도 할까 하는 마음과 동시에 오늘 해야 할 것들(주로 어제 못한 과제들)이 떠올라 그만둔다. 할 일이 많다. 대충 씻고 가방을 싸서 집을 나온다. 걸으면서 만트라를 외거나 호흡에 집중해보려 하지만 머릿속은 이미 이런저런 상념과 근심들로 소란스럽다. 만원 버스에 올라 그 근심에 조금 위안이 될까 싶어 어제 읽다 만 책을 꺼내보지만 영 능률은 오르지 않고, 핸드폰을 집어 들고 손흥민이 골을 넣었는지 확인해 본다. 겉으론 매일매일 다를 게 없는 아침이지만 마음은 어쩜 이리 분열적이고 어수선한지.
마음이 소란스러운 것은 어릴 때부터 늘 그래온 익숙한 상태다. 그런 점에서 나는 꼬맹이 시절이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번잡함의 내용은 제법 바뀌었다. 내 고민은 한편으로 무척 평범하다. 이제 그만 피부 트러블이 나아졌으면 좋겠고(이마는 왜 올라가는지!), 살도 그만 빠지고 근육이 붙었으면 좋겠고, 하루빨리 연애도 하고 싶다. 이 모든 게 잘 안 되고 있으니 글이라도 잘 썼으면! 적고 보니 고민이라기보다는 바람이다. 예뻐지고 싶고 능력 있고 싶은, 아주 보편적인 욕망들. 그것들이 매일같이 꿈틀댄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내게는 뭔가 특이하고 반세속적인(?) 바람들도 함께 있다. 가령 외모나 능력 같은 것에 휘둘리지 않고 그것들에 초연한 경지에 이르고 싶은 마음, 혹은 그런 욕망과 감정이 일어나는 메커니즘과 조건들을 이해해보고 싶은 마음이 그것이다. 조금 거창하게 말하면, 우리의 집착과 정념의 기원을 알고 싶다! 이런 바람들이 구체화되어 불교나 고대 철학, 니체, 푸코, 들뢰즈 등 연구실에서 접할 수 있는 가르침들을 오래도록 그리고 찐하게 배우고 싶다는 발심(무려 불교적 의미의!)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나도 그들처럼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질문하고 탐구하는 삶을 살고 싶다. 이런 바람은 그들의 텍스트를 얼른 읽어야 한다는 조바심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관련 세미나 과제를 시간 안에 해야 한다는 근심으로까지 번진다. 거기에 좋은 평가를 기대하는 허영심도 종종 끼어든다. 念念念. 내 마음 속에서는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은 이런 바람들이 뒤엉켜 소란을 이룬다.
이처럼 이상한 아침을 보내게 된 데에는, 다시 말해 다소 평범한 바람들 옆에 다소 사대부스러운 바람을 갖게 된 데에는 규문에서의 생활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272번 버스를 몇 번이나 탔을까. 벌써 3년째 나는 회기의 단칸방에서 혜화동의 연구실을 오가고 있다. 연구실에서 나는 친구들과 아침 점심 저녁을 해 먹고, 글도 쓰고 책도 읽고 세미나도 하고 청소도 하고 탁구도 치고 뜸도 뜬다. 산책도 혜화에서 한다. 이런 생활은 내가 고민하는 문제나 가치를 따지는 기준들을 바꿔놓았다. 일상 전반이 달라졌으니 당연하다. 나에게 가치 있는 것은 이제 더 이상 토익 점수나 프레젠테이션 능력이 아니다. 연봉이 어떤지, 자동차가 있는지, 주량이 얼마인지 등은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 책을 꼼꼼하게 읽고 사람들과 나누는 능력이나 개념을 소화하는 수준, 지난번보다 촘촘해진 문제의식이 중요하다. 부엌을 정리하고 척척 반찬을 만드는 일머리가 더 필요하다. 무엇보다 마음이 좁아지거나 들뜨지 않고 고요하게 닦는 기술이 핵심이다. 규문이라는 공간에서 나는 이런 방식으로, 아마 규문이 아닌 곳에서는 보편적이었을 욕망과는 다소 상반되는 욕망과 가치를 형성하고 있다. 그렇게 훈련하고 훈련되고 있다. 아침저녁으로 요란해지는 것은 그 때문일 거라 생각하고 있다.
어쩌다 규문에?
어쩌다가 나는 이런 곳에서 엉뚱한 생활을 하며 해보지 않은 고민들을 하고, 안중에도 없던 요상한 목표들을 갖게 되었을까? 함께 공부하는 선생님들께 종종 왜 공부하게 되었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어쩔 때는 거창하게 이유를 댄다. 대학 공부에 회의를 느끼고 정말 중요한 가르침을 배우러 왔다고. 뻥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사실도 아니다. 훨씬 더 많은 동기와 계산과 우연이 있었다. 그리고 순서를 바꿔야 한다. 엄밀히 말하면 연구실에 드나들다 보니 대학 공부가 달리 보인 것이다. 물론 '중요한 가르침'이라고 했지만, 사실 돼지 목에 진주처럼 잘 어울리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때는 2015년 여름. 나는 보통 이때를 시작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렇게 치면 햇수로는 꽤 오래되었음에도 별 성과가 없어 부끄럽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때 스무 살 성민호는 첫 방학으로 시간이 남아돌았고 새로운 ‘인연’을 찾고 싶었다. 겨우내 썸(짝사랑)에 허우적거렸고, 봄바람 부는 캠퍼스에서의 사업은 잘 풀리지 않았다(그땐 몰랐지, 그 잘 풀리지 않음이 이렇게 오래갈 줄...). 학교 밖으로 나가보자! 그런 와중에 뭔가 지적인 활동을 하고 싶었다. 책이라곤 권장도서 몇 권을 읽었을 뿐이지만 ‘인문학을 공부하는 이과생’이라는 이미지에 대한 환상은 가득했다. 고등학교 선생님께 책 읽을 곳 없냐고 했더니 알려주신 곳이 규문이었다. 지금은 사라진 대담함으로 덥석 등록하고 찾아가 봤다. 역시나 짝은 기대할 수 없었지만 환영은 받았기에, 인문학 공학도라는 플랜B는 지켜낼 수 있었다.
결석과 지각을 일삼는 와중에도 그럭저럭 다녔다. 별로 공부에 진심도 아니었던 터라 글을 엉망으로 쓰거나 맥락 없는 말을 해서 혼나는 일 정도는 별로 타격도 아니었고 자존심이 상하거나 하지도 않았다. 그냥 내가 대단한 책을 읽고 대단한 강의를 듣고 있다는 사실이 만족스러웠을 뿐이다. 공부가 내 생활의 중심이 아니었으므로 규문 방문은 일주일에 한 번 있는 난해하고도 특이한 행사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공부에 아예 관심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거의 대부분은 못 알아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름 진지했다. 그 당시 나는 뭔가를 열심히 노트하고 시간을 들여 책을 읽고 과제를 써 갔다. 지금 시선에서는 엉터리였지만 그때는 열심이었고 뭔가 매력을 느꼈던 것 같다. 꾸중을 들으면서도 어찌어찌 일 년을 붙어있게 되었고, 군대를 앞두고는 글을 써보라는 미션을 받았다. 읽을 책도 한 박스 보내주셨다. 그 중 두 권 읽었다. 그러면서 참 뻔뻔하게도 ‘나는 다른 녀석들과 달리 책 읽는 놈이다!’라는, 바보같지만 결과적으로는 꽤 중요한 생각도 했다. 그렇게 쓴 <난중일기>(규문 홈피 참고)는 중2병스런 허세와 자의식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글이었지만, 군대에서 그 글을 쓴다고 머리를 싸맨 경험은 전역 후에도 계속 공부를 해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이어졌다. 휴가 때 찾아오면 반겨주셨던 기억도 한몫했다.
전역 후 복학을 앞두고 규문에 더 자주 드나들었다. 마침 공간도 넓어지고, 밥도 얻어먹을 수 있었고, (당시 내 눈에) 예쁜 누나들도 있었으며, 분위기가 막 재밌거나 신나진 않았지만 서먹해진 학교 친구들보다 편안했다. 피부가 너무 안 좋아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했다. 또 같은 수업을 듣던 모 선생님으로부터 알바 자리도 얻을 수 있었다. 그런 아주 많은 이유들 때문에 규문에 더 찰싹 달라붙게 되었다. 물론 이런 외부적인 이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외부 조건이 맞아떨어진 와중에, 뭔지도 모르고 듣고 있던 돼지 목의 진주들도 조금씩 빛을 발했다. 하지만 마냥 기분 좋기만 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괴로웠다.
규문에서의 공부가 취미 수준을 넘어가면서, 연구실 식구들의 생활방식과 수업에서 배우는 가치들은 지금까지 너무 당연시되던 가치나 욕망과 부딪혔다. 아주 많은 부분이 걸렸으나 그중에서도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 현실적 고민은 대학과 관련된 문제였다. 점점 더 학교 졸업과 규문 공부가 양립할 수 없음을 느끼게 되었다. 시간적인 면에서도 양심적인 면에서도 둘 다 가져갈 수는 없었다. 그러던 중, 돈이나 명성이나 교양과 같은 소지(小知)를 비웃는 장자의 글귀나, 우선 성공해 돈을 벌겠다는 젊은 제자에게 철학은 당장 시작해야 하는 거라 말하는 세네카의 일침들이 온몸에 콕콕 박혔다. 물론 평상시라면 이것들을 그저 추상적이거나 현실성 없는 말이라고 치부했을 것이다. 이천 년 전 할아버지들의 말이 21세기를 사는 내게 무슨 소용이람? 어떻게 온 대학인데, 졸업은 해야지. 암, 먹고 살려면 당연하지. 충분히 이렇게 말하고 넘어갈 수 있었을 문제였던 것을 ‘정말 그래?’하고 의문을 놓지 못하게 만든 계기는 아마도 <슬기로운 복학생활>(규문 홈피 참조) 연재였지 싶다. 복학 후의 미션은 대학일기였다. 텍스트를 해석한 것도 개념을 풀어 쓴 것도 아닌 일기에 가까운 글이었지만, 그것들을 쓰면서 대학에서의 놀이, 연애, 여행, 밤, 주거, 전공 등 사소하지만 비근한 문제들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 덕에 내가 뭉뚱그려 ‘대학’이라고 여기던 것에 대해 이전부터 희미하게 가져왔던 의문점들을 솔직하게 문제시할 수 있었다. 없어선 안 되는 당연한 과정이자 청춘과 명예와 밥벌이의 다른 이름이라 여겼던 대학에 대해서.
그때는 정말 대학과 규문을 두고 나 자신에게 치열하게 캐물었다. 졸업-취업이라는 정규 코스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고, 대학이란 것이 내게 어떤 가치고 어떤 의미인지 묻게 되었다. 당시 내게 그것은 ‘먹고 산다는 것’, ‘공부한다는 것’, ‘공동체에서 주고받는다는 것’, ‘환경을 위한다는 것’과 같은 총체적이고 막중한 관념들을 되묻고 뒤집어야 하는 문제였다. 방향을 완전히 틀고 많은 것을 고쳐 생각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휴학을 하고 자퇴를 하기까지 꽤 긴 시간이 걸렸고 아주 많은 요소들이 원인이 되었다. 맛있는 밥, 장자 공부와 에세이, 규문 형누나들의 생활방식, 알바하던 회사 직원들의 찌든 모습들, 이란 여행, 이반 일리치의 책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피부 트러블, 대학 친구들과의 소원해짐, ‘환경공학’에 대한 회의 등. 이런 소란 속에서 나는 본격적으로 연구실 생활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이건 아니다’
어쩌면 내 짧은 인생에서 일종의 변곡점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결심에는 수많은 고민과 망설임, 그에 따른 수많은 동기들과 우연과 조건이 있었다. 그럼에도 나를 마지막까지도 그리고 최근까지도 불안하게 했던 실존적 문제는 ‘어떻게 먹고살 것인가’였다. 다 떠나서, 학교를 그만두면 뭘로 벌어먹고 살거냐는 질문에 뾰족한 답을 댈 수가 없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때처럼 머리를 꽁꽁 싸맬 만큼 심각하게 여겨지진 않는다는 것이다. 아마도 '먹고 산다'는 것에 대한 생각이 조금 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 나는 밥벌이에 대해 아주 상식적이고 추상적인 이미지 외에는 다른 상상력이 없었다. 월세가 얼마고 식비가 얼마며, 생활비와 학비와 저축으로 얼마가 필요한지 등을 고려하고 있자니 멀쩡한 곳에 취직해서 월급을 받는 것이 너무 당연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기에는 혼자 산다는 전제, 혼자 밥을 해결하고 혼자 미래를 준비한다는 전제가 깔려있었다. 그런데 만약 밥을 함께 해 먹는다면? 함께 생활하고 함께 공부를 하는 과정 자체가 사람들과 배움을 나누는 것으로 이어진다면? 그렇게 된다면 졸업-취직이라는 구도는 딱히 필수적이지 않을 수 있게 된다. 실제로 그렇게 살고있는 형님누님들이 있는 연구실을 오가는 동안, 내 머릿속의 ‘먹고산다’는 관념은 이런저런 질문에 부딪혔고, 무척 더뎠지만 생각이 조금씩 움직였다.
하지만 연구실을 그만두게 될 경우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어렵게 학교를 그만뒀는데 어떤 이유로든 공부를 못하게 되면? 여기가 계약직도 아니고, 앞서 그런 사람들이 많지 않았던가? 그럴 가능성을 생각하면, 아무리 공부가 좋더라도 졸업이라도 해두는 게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도리가 아닐까? 제정신이라면 우선 졸업장을 따두는 게 맞다. 이런 뻔한 계산에도 불구하고 내가 연구실이라는 다소 불안한 생활을 택할 수 있었던 데에는 다름 아닌 나의 전공, 환경공학에 대한 회의가 결정적이었던 것 같다. 이 얘기는 다음 화에서 더 자세히 하겠지만 그 무렵 나는 대학수업을 들으며 ‘이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우지 못했다. 단순히 그 수업이 시험이나 취직을 위한 공허한 지식이어서만은 아니다. 그런 거야 고딩 때부터 잘 참아왔다. 문제는, 지속가능성을 말하는 이 ‘환경공학’이라는 것이 환경을 치유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망가뜨리는 데 일조하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대체 무엇을 지속시킨다는 건가? 아무것도 바꾸지 않아도 되는 맘 편한 소비를, 편리함을, 더 많은 탐욕을, 더 많은 신기술로 더 많은 낭비와 소비를 정당화한다는 것 아닌가? 환경공학에 붙어 있는 한, 꼭대기에 가든 말단에 가든 이 길이 결국 이르게 되고 부추기게 되는 것은 그런 것들이겠구나 생각하니, 정이 떨어졌다. 이건 내가 어릴 적 사슴벌레를 보고 품었던 그런 다짐과는 반대에 있었다. 그때서야 나는 대학에 붙은 미련을 떨어낼 수 있었다. 그렇게 먹고살고 싶진 않다. 나는 환경공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환경을 생각하겠다. 연구실에서 배울 것이 무척 많다. 그리고 혹시 연구실과 인연이 다하더라도, 알바를 전전하며 살게 되더라도 좋다. 우선은 이 공동체에서 시작해보자. 결단이라고 하기엔 결연하지 못하고 더뎠지만, 치열했던 마음의 소란은 이렇게 일단락되었다.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학교를 나오고 2년이 흐른 지금 그때의 고민들은 일단락되었지만 모양을 바꾸어 다시 나타나고 있다. 다만 먹고산다는 문제가 어떻게 이 공동체의 살림을 꾸려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바뀌었다. 사람들이 오가는 곳에선 배를 곯지 않는다는 말은 백 번 옳은 것 같다. 이렇게 많은 과일과 제철 반찬을 내가 무슨 수로 먹을 수 있단 말인가? 연구실에서 나는 어떻게 선물로 공동체가 꾸려지는지를 보았고, 내가 할 수 있는 보시는 무엇일지 고민하는 법을 배웠다. 그것은 어쩌면 공간을 청소하는 일에, 밥을 짓고 차를 우리는 일에 있을지도 모르고, 텍스트를 읽고, 새로 하게 된 생각을 나누고, 이야기들을 듣고, 수업 후기나 규문톡톡을 쓰는 일에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먹고 살 수 있음에 대한 보답이나 대가는 아니다. 이렇게 내가 여기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즐겁게 또는 힘겹게 해가는 와중에 먹고 또 살게 되는 것 같다.
하지만 누구나 알고 있듯 잘 먹고 잘 산다고 해서 마음이 평온한 것은 아니다. 소란은 여전하다. 우선 늘 문제시되는 것은 나 자신의 마음의 문제다. 종잡을 수 없는 정념과 표상, 기억, 평가, 욕망(성욕?) 등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마음장을 어떻게 닦고 조율할 것인가? 어떻게 이런 것들을 공부에 방해된다고 배척하지 않고 도리어 공부의 재료로 삼을 수 있을까? 그동안 감정의 찌꺼기로 치부해왔던 두려움, 미움, 원한, 평가, 자만 등의 심리를 묻고 이해해서 그런 것들에 휘둘리지 않는 혹은 휘둘리더라도 자책하지 않는 수행이 내 일상과 공부의 관심사다.
또 다른 고민은 환경을 위한다는 것, 생태적으로 산다는 것이 뭔가 하는 문제의 연장이다. 이 도시에 살아가면서, 어떻게 업을 짓지 않고,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누리는 것들에 일방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생활을 이어갈 수 있을까. 그것은 우리가 사회적으로나 산업적으로 어떻게 음식과 이동수단과 에너지와 테크놀로지와 관계 맺고 살아가는가를 이해하는 과정과 연관되어 있다.
이런 고민들 속에서 나는 올해 정말 솔직한 문제들, 내 마음에 파도를 일으키며 지나가는 소란들을 붙들고 글을 써보려 한다. 그 실타래를 풀어가는 일이 맨손으로는 힘들 터이니 하나의 도구를 손에 들어보자. 그것은 바로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책이다. 엄청난 반시대성으로 인해 기이한 운명을 겪은 금서! 왜 이 책인가? (2화를 기대하시라)
글_민호(고전비평공간 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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