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프롤로그 : 저는 만드는 사람입니다

청년인문학스타트업 '길드다'에서 활동하는 목수 김지원의 '작업-에세이' [저는 만드는 사람입니다]를 연재합니다. '만드는 이'가 겪은 일들 속에서 성찰한 것들이 무엇인지, 관심있게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프롤로그 : 저는 만드는 사람입니다

 

아니고…아니고….
 
나는 보통 다음 두 문장 중 하나로 나를 소개한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목수입니다.”
 “가구를 만들며, 인문학을 공부합니다.”
 
이 문장들에 대해 사람들은 보통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아, 목공으로 밥벌이를 하고, [조금 진지한] 취미로 인문학 공부를 하는구나?”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한편으로 이 두 가지 활동이 하나는 몸을 쓰는 일, 다른 하나는 머리를 쓰는 일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다른 한편 많은 사람들에게 일과 여가가 분리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데 나에겐 그렇지가 않다. 우선 나는 함께 인문학을 공부하는 친구들과 ‘길드다’라는 인문학 스타트업을 만들어, 적은 돈이긴 해도 본격적으로 인문학 세미나와 강의를 진행하며 돈을 번다. 그것을 준비하는 시간은 가구를 만드는 것만큼이나 고되고 지난하다. 심지어 어떤 때에는 수업이나 글쓰기 준비를 위해 주문 건을 줄이거나 받지 않는 경우도 많다. 반대로 목공도 때때로 그 즐거움에 비춰볼 때 밥벌이처럼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다. 물론 그렇다고 인문학 공부가 밥벌이이고 목공이 취미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이처럼 상식적인 궁금증들에 나는 조금 소심한 목소리로 “그건 아니고….”라고 말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전공자도 아니고, 목수가 직업인 것만도 아니고, 공부가 취미도 아니고, 아니고…아니고…. “그럼 집에 돈이 많은 거야?”…그건 진짜 아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혼란을 빚게 만들면서도 내가 굳이 목공과 인문학을 붙여서 말하는 이유는, 나에게 이 두 가지가 서로 분리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들을 통해 설명을 더한다.
 


나무를 다룬다는 것
 
내가 처음 목공소에 취직했을 때, 첫 한 달간 했던 일은 자투리 나무로 만든 냄비받침을 칠하는 일이었다. 나를 고용한 목수님이 나를 교육하기 위해 냄비받침을 만들어 두셨던 건지, 일이 없어서였는지,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백 개 정도 되는 손바닥만 한 냄비받침을 하루는 오일을 칠하고, 마르면 다음 하루는 사포질 했다. 지루할 법한 일이 재미있었던 것은 하루하루 칠을 먹어 변화하는 나무의 색깔과 감촉 때문이었다.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목재로 만들어진 물건들은 건조된 상태에서 제작에 사용된다. 때문에 목공소에서 처음에 받는 목재는 건조된 생선이나 건조한 겨울에 일어나는 우리 피부처럼 희끗한 색깔을 가지고 있다. 이 희끗하고 냉랭한 색깔 위에 오일을 펴 바르면 나무는 살아있을 때의 따뜻한 색깔을 회복한다. 반듯하게 대패질 되었던 건조목은 다시 생기를 머금으며 놀라기라도 한 듯 그 원래의 결이 우둘투둘 일어난다. 칠이 마르면 사포는 모래알이 굵은 것에서부터 고운 것으로 바꿔가며 사용한다. 모래알이 굵은 것으로 일어난 결을 정리하고, 고운 것으로는 칠이 된 나무의 표면에 점점 더 작은 스크래치를 내며 여전히 칠이 붙을 수 있는 자리를 만든다. 결이 정리되고, 작은 스크래치들에 촘촘하게 칠이 들어가면 비로소 취약하고 거칠던 표면은 단단하고 부드러워진다.
 
나무는 수축팽창을 거듭한다. 휘어지고, 갈라지고, 곰팡이가 피고, 벌레가 생기고, 썩는다. 정성스런 칠은 [이어질 글에서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단순히 색깔, 감촉의 개선을 넘어서 이런 나무의 변화들을 억제하거나 완화해 인간이 사용하는 데에 무리가 없도록 한다. 그것을 완전히 제어할 도리는 없지만, 최소한 우리와 잘 어울려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일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천 원짜리 냄비받침치고는 꽤 과도한 정성이 들어갔다. 그러나 수지타산과 상관없이 이 작은 경험은 나에게 목공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수많은 가구들이, 하물며 냄비받침과 같은 하찮은 물건들이 이렇게 지난한 공정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작은 물건에도 아직 끝나지 않은 나무의 생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 무엇보다 목공은 다른 것들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고민하는 일이라는 점이었다.
 

공부를 한다는 것
 
난 군대에서 난생 처음으로 책을 읽었다. 너무 힘들어서인지,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을 한 거다. 그런데 그 짧은 우연이 책을 읽는 일이 주는 기쁨을 알게 했다. 난 그 길로, 인문학 공동체에 가보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공동체에서 처음 접한 인문학 공부는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이었다. 학창시절 학교수업은 물론 책 한권도 제대로 읽어본 적 없는 나에게, 처음에 이 책은 흰색 종이와 검정색 글씨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단 한 문장도 온전히 이해되는 것이 없었다. ‘내가 무슨 생각으로 공부를 하겠다고 했을까.’ 그러나 사람들과 함께 하는 세미나에서, 난 조금씩 검은 글씨가 단어로, 그리고 이야기로 바뀌어가는 것을 느꼈다. 나와 달리 사람들은 책에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읽어냈고, 그것을 말했다. 그들의 이야기가 검은 글씨에 투영되기 시작했다.
 
우리와 함께 세미나를 하는 사람들 중엔 현직 교사도 있었다. “푸코가 감옥의 일람표를 예로 들 때, 깜짝 놀랐어요. 내가 학교를 다니며 요구받아왔던 것, 내가 좋은 의도를 가지고 내 학생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 실은 권력을 정당화 하고, 재생산 하는 데에 기여하고 있었다는 것이….” 『감시와 처벌』은 권력에 대한 이야기다. 푸코는 시대에 따라 변하는 감시와 처벌의 형식들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 어떤 종류의 권력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는가를 분석한다. 이를 통해 그는 오늘 날 우리가 권력이라고 표상하는 것들, 예컨대 정치인이나 대기업과 같은 거대권력이 아닌 규율, 일람표와 같은 보다 일상적이고 미시적인 권력의 작용이 우리의 삶과 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런 권력의 분석, 그리고 그것과 연관된 다양한 이야기들은, 곧 바로 나 자신의 삶과 책을 연결시켰다. 내가 학교에서, 군대에서 행했던 수많은 실천들이 사실은 내가 나쁘다고 믿어왔던 그것과 얼마나 가까이에 있었는지. 군대만 벗어나면 될 거라고, 자유로울 거라고 믿어왔던 나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단순한 것이었는지를. 푸코는 17세기 이후 감옥에서의 감시와 처벌[판옵티콘]이 하나의 모델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학교, 병원, 군대, 공장을 막론하고 이러한 모델이 전 사회에 적용된다고 말이다. 이는 군대와 소위 군대에서 ‘사회’라고 부르는 바깥세상과의 경계가 사라짐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더 이상 장소가 아니라, 나 자신의 특정한 실천이 된다. 책을 읽는 일은 이처럼 삶을 바라보는 눈을 바꾸고, 더 이상 이전까지와 같은 방식으로 살 수 없도록 한다.
 


만드는 이가 된다는 것
 
위와 같은 경험들은 나로 하여금 인문학 공부에 목공의 경험들을 녹이고, 가구를 만들며 세상에 대한 고민들을 녹일 수밖에 없도록 했다. 그리하여 두 활동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로 하나가 된다. ‘우리가 지금 너무나 당연하게 가구를 소비하는 방식: 싼 가구를 사서 채 몇 년을 안 쓰고 버리는 것이 당연하게 이루어져도 괜찮은 걸까?’ 혹은 ‘가구 산업이 가구를 만드는 방식: 이를테면 지난한 칠의 과정을 인건비의 문제로 다루며 마감에 화학적인 성분을 섞는 일이 괜찮은가?’ ‘저렴한 목재를 위해 가난한 국가의 숲을 없애는 등의 일들이 과연 신중하게 나무를 고르고, 정성들여 마감하던 과거로부터 차례로 발전한 결과일까?’ 아니라면, ‘나는 어떻게 공부하고, 또 어떻게 가구를 만들어야 하는 걸까?’

내가 공부를 하면서 좋아하게 된―역사학자, 때로는 페미니스트, 르포 작가, 또 철학자로도 불리는―레베카 솔닛은 그의 책 『멀고도 가까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드는 이가 된다는 것은, 다른 이를 위한 세상을 만드는 일, 그저 물질적 세상뿐 아니라 그 물질적 세상을 지배하는 이념의 세계, 우리가 희망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꿈까지 만드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흔히 물질적인 일이라 생각하는, 무언가를 만드는 일은 사실 무언가를 사유하고, 공부하는 일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사유와 공부가 부재하는 만들기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오직 가격이라는 단일한 가치로 보이도록 만든다. 이것이 초래하는 결과는 우리가 다 책임질 수 없는 것들이다. 또한 우리가 [물질적이지 않은] 머리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유와 공부도 결국엔 무언가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념과 꿈 또한 우리가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다면 세상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때 만들기는 질문이, 질문은 만들기가 된다.
 
이런 그의 정의를 빌려 조금이나마 혼란을 피해보자면, 나는 ‘만드는 이’가 되고 싶은 게 아닐까 싶다. 직업이나 취미가 아니라 다른 이를 위한 세상을 만드는 것. 우리가 희망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꿈까지 만드는 것. 물론, 여전히 충분한 설명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앞으로 내가 여기에서 하게 될 이야기들은 끝나지 않는 내 소개다. 이는 내가 만든, 혹은 만들 것들과, 그것을 통해 내가 만들고자 하는 꿈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래도 일단은 이렇게 시작해보겠다.
 
“저는 만드는 사람입니다.”

 

글_김지원(길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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