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의 ‘잡일’하는 ‘아줌마’들
처음 목공소에서 독립한 즈음 여덟 평 남짓의 식당 인테리어 공사를 했다. 돈은 많지 않지만 멋진 걸 하고 싶다는 클라이언트를 만났다. 난 예산을 맞추겠다며 세 달여의 시간 동안 아등바등 혼자서 가구를 만들고, 페인트를 칠하고, 조명을 설치했다. 이 경험을 통해 나는 내가 일을 한다고 돈을 아끼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공간을 만드는 일에는 다양한 전문적인 지식뿐 아니라 숙달된 노동이 필요하다는 당연한 사실을 깨달았다. 전기, 수도배관, 주방설비, 미장, 페인트 칠, 타일, 금속…. 나 혼자서는 평생을 해도 다 알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다음 현장부터는 다양한 공정을 함께 만들어 줄 사람들을 찾기 시작했다. 재미있는 것은 한 공정에서 적당한 사람을 찾으면, 이 사람을 통해 다른 공정의 전문가를 소개받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내가 혼자서 일을 할 수 없듯이 각 공정에서 난다 긴다 하는 사람들도 똑같은 조건이라서, 여기엔 일종의 거대한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있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나에겐 마치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내가 이 세계에 적응해 갈 즈음, 그러니까 네트워크에서 나도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 일을 ‘물어오는’ 사람으로 한 사람의 몫을 할 즈음부터 나에게는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왜 이 네트워크에는 여성이 없을까? 드물게 있기는 했지만, 주로 장비를 다루지 않아도 되는 페인트나 타일, 미장 등의 공정에 한정적이었고, 그나마도 이른바 ‘대모도’나 ‘시다’라고 불리는, 숙련공의 일을 돕는 조공이나 잔심부름을 맡아서 하는 역할이 전부였다. 현장에 작업자가 10명이라면, 이 중 여성은 1명이 될까 말까였다.
여성 ‘오야’가 없는 이유
왜 여성이 없을까? 이렇게 된 데에는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 온 몇 가지 편견들이 아주 강하게 작용한다. 여자는 힘쓰는 일을 못해. 여자는 위험한 일을 못해…. 이런 편견들은 특히 이 업계에 뿌리 깊게 박혀있다. 그리고 이 굳건한 남성들의 네트워크는 그러한 편견을 다양한 방식으로 강화한다.
단적으로 건축회사들이 저마다 가지고 있는 건설 직종별 단가표(이것은 대외적으로 공개된 공식 문서다!)의 첫 번째 항목은 ‘일반공(잡부)’이다. 여기엔 2017년 기준 ‘남성 120,000원/ 여성 110,000원’이라고 표기되어있다. 실제 내 경험으로도 현장에서 인건비를 책정할 때에 페인트 기준 남성은 220,000원, 여성은 싸게는 180,000원까지 낮게 받는다. 인건비가 더 저렴함에도 불구하고 현장에서 그들을 더 많이 쓰지 않는 것은, 이 네트워크가 ‘오야(작업반장)’의 네트워크이기 때문이다. 이 네트워크는 작업자 개인들로 구성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작업반장들로 구성되어있다. 작업반장들의 역할은 일을 배분하고, 적당한 위치에 사람을 배치하고, 예산을 관리하고, 공사가 끝난 뒤에 하자가 생기면 책임을 지는 것이다. 내가 물으면 대부분이 남성인 ‘오야’들은 “여성들이 그런 일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아서”라고들 말한다. 여성 작업자들은 이 네트워크를 통해 일을 하지만, 이 네트워크에 포함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아이러니 한 것은 현장에 사후적으로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하러 오는 것은 여성 작업자인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그동안 어디 있었는지 모를 여성 작업자들이 공사 후 계절이 바뀌며 페인트가 떨어진다거나, 실리콘이 수축한다거나, 하는 일들이 생기면 등장한다. 인건비가 저렴하기 때문이다. 공사가 끝나고 문제가 생겨서 페인트 반장님에게 전화를 하면 반장님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잡일이지? 아줌마 하나 보낼게.” 차별이라는 것은, 분명 전 사회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거대한 문제일 거다. 성별분업, 감정노동, 임금격차와 같은 복잡한 문제들. 그러나 그런 것을 우리가 피부로 느낄 때, 그건 아주 사소해 보이는 부분에서부터 시작된다. 내 힘으로 이 공고한 네트워크를 부수고, 새로운 네트워크를 구축할 순 없겠으나, 최소한 내 현장에서 이 불편한 두 단어만큼은 고쳐야겠다고 생각했다. ‘잡일’, 그리고 ‘아줌마’
현장에 ‘잡일’은 없다
현장에는 공사 이후에도 그렇지만, 공사 중에도 다양한 문제가 생긴다. 이들 여성들은 때로 이러한 문제의 해결사이기도하다. 커피를 타고 청소를 하는 일, 공구를 정리하고 다음 작업을 위한 밑 작업을 하는 일…여성이 없다면 작업팀의 막내가 인상 찌푸려가며 도맡아 하는 이런 일들은 사실 현장의 흐름을 좌우한다. 감정을 돌보고 작업 외적으로 필요한 것은 없는지를 챙기는 일. 가끔 서로 다른 공정의 작업자들 사이에 기 싸움이 벌어지거나, 자신의 공정에서 더 빠르고 쉽게 일을 처리하기 위해 공정 간에 이견과 갈등이 생길 때(정말 많이 벌어지는 일이다!), 이를 조율하고 감정을 보살피는 일은 현장을 책임지는 나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감정이 상한 당사자를 파악하는 이른바 ‘아줌마’들은 다양한 각도와 방식으로 이들을 달래고 어른다. 이건 하루하루가 비용인 공사 현장에서 아주 중요한 일이다. 그러니까 이들이 하고 있는 이른바 ‘잡일’은 그런 의미에서 결코 잡스러운, 혹은 잡다한 일이 아니다.
이뿐만이 아니다. 내가 보기에 현장에서의 ‘효율’들은 여성들의 신체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이들이 편견에 맞서 발명한 장비들, 예컨대 페인트 고소작업을 사다리나 우마에 오르지 않고서도 하기 위해 만든 길이 조절이 가능한 알루미늄 폴대(가볍기까지 하다), 무릎과 허리가 안 좋아 허리를 덜 굽히고도 미장을 할 수 있도록 손잡이를 길게 늘인 미장 칼…. 이들은 도구를 발명하고, 그러한 도구를 통해 새로운 요령들을 만든다. 이 요령들은 정말 기상천외하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른 채 그것을 한다(실제로 여성들을 위한 작업 공구를 파는 인터넷 쇼핑몰엔 온갖 효율적인 공구들이 넘쳐난다). 내가 도구들과 요령들을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면 그들은 “우리가 사다리를 못 타서…”라고 부끄러워 하지만, 사실은 작업을 위해 괜히 무거운 사다리를 이고지고 다닐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에 비해 위험을 감수하고, 힘을 쓰고, 고집을 부리는 남성 작업자들은, 심지어 자신이 얼마나 위험을 감수했는지, 얼마나 힘이 세고 ‘쪼’가 있는 사람인지를 자랑하는 남성들은, 때로 바보 같아 보인다.
그러나 ‘잡일’이라는 말이 이러한 일들의 우선순위와 가치를 숨긴다. 레베카 솔닛은 그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이것들을 정확한 이름으로 부르면, 그때부터 우리는 비로소 우선순위와 가치에 대해 진정한 대화를 나눌 수 있다. ” (레베카 솔닛, 『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이다』) 우리가 이를 더 이상 ‘잡일’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현장은 분명 많은 것들이 바뀔 테다.
그들은 ‘아줌마’가 아니다
김경배 사장님은 내가 일을 시작한 초기에 만난 여성 페인트 공이다. 김 사장님은 당신 막내아들이 나와 동갑이라며 처음 만난 날부터 나를 아주 예뻐해 주셨다. 일을 시작한지는 40년이 넘었고, 처음엔 페인트 가게를 하는 남편을 따라 일을 다니다가 남편은 몸이 좋지 않아 더 이상 일을 못하고, 혼자서 일을 하러 다니신다. 40년이면, 일을 잘하냐 못하냐 같은 질문은 사실 쓸데가 없다. 사다리와 우마는 ‘남자의 일’이라며 피하시지만, 높은 곳에 올라갈 필요가 있을 때는 아무 말 없이 한 손엔 붓을, 다른 손엔 페인트 깡통을 들고 능숙하게 사다리에 올라 칠을 하는 그를 쉽게 볼 수 있다.
언젠가 전시장에 놓일 아주 많은 양의 가구를 칠 할 일이 있었는데, 기존에 섭외를 했던 페인트 ‘오야’ 박 반장님과 이야기 되었던 것보다 일을 하는 과정에서 칠해야 할 가구의 양이 늘어났다. 다음 일정으로 넘어가야 하는 박 반장님은 함께 일을 하러온 김경배 사장님에게 뒷일을 주고, “아줌마가 잘 마무리 해주실 거”라며 현장을 떠났다. 혼자서 할 일이 아닌데 급하게 사람을 섭외 할 수 없어 이틀에 걸쳐 내가 김 사장님과 붓을 쥐고 일을 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친해졌다. 둘째 날 저녁 아무래도 예정된 시간에 일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김 사장님은 팔을 걷어붙이고 밤늦게까지 일을 도왔다. 밤늦게 현장에 불을 밝히는 것은 휴일이 없고 야간작업만 허용되는, 백화점 같은 특수한 경우가 아니고서 좀처럼 보기 힘든 풍경이다. “실장, 이거 못 끝내면 어쩔 거야. 돈도 못 벌고 사람도 잃는 거지. 내가 그냥 가면 실장 그러라고 두는 거지” 김 사장님은 나와 클라이언트 관계의 신뢰를 걱정했고, 그것이 본인의 신뢰와도 관련되었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주었다. 대부분의 남성 오야들이 술 먹을 때 입버릇처럼 말하는 그 신뢰를, 난 김 사장님과 그날 저녁 보낸 시간을 통해 강하게 느꼈다.
그래서 나는 어쩐지 나와 함께 신뢰를 가지고 일하는 동료를 ‘아줌마’라고 부른다는 것이 영 꺼림칙했다. 내가 ‘사장님’이라고 부르면 김 사장님도, 현장에 있는 다른 노동자들도 나를 힐끔힐끔 쳐다봤다. 심지어 식사시간에 다른 페인트공이 김경배 사장님을 ‘김 사장~’하며 불렀는데, 모두가 웃었고, 김 사장님은 창피한 얼굴을 했다. 이건 그 날 오전 내가 김경배라는 사람을 사장님이라고 부른 것을 농 삼는 것이었다. 레베카 솔닛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명명은 해방의 첫 단계다. …새 이름이나 용어나 표현을 지어내고 퍼뜨리는 일은 세상을 바꾸려 할 때 핵심적인 작업이다.” 그러나 우리에겐 흔한 기존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에도 어려움이 따른다. ‘사장님’, ‘반장님’이라는 호칭은 현장에서 상대방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을 표하며, 공적으로 한 사람을 명명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런 공적인 명명이 농거리가 된다는 것은 그들이 레베카 솔닛이 말하는 ‘해방’, 아니 거기까지 갈 필요도 없이 최소한의 존중의 대상도 못 된다는 식이다. 이 어려움이 그들을 ‘아줌마’로 만든다.
근데 김 실장!
“근데 김 실장, 뭐라고 부르는 게 뭐가 중요해~ 내 나이면 할머니라고 안 부르는 게 다행이지 안 그래?” 언젠가 나와 비슷한 또래의 페인트 팀 막내가 김 사장님을 “아줌마~”하며 부르는 것을 듣고 내가 김 사장님에게 씩씩거리자 김 사장님이 여유롭게 웃으며 던진 말이다. 솔닛의 말처럼 명명은 분명 해방의 첫 단계지만, 명명이 관계의 전부를 이야기한다고 미리 판단해 버리는 것 역시 곤란하다. 몇 마디 말에 분노하고 과민하게 반응하기보다, 김 사장님이 보여준 것과 같은 신뢰를 다른 작업자들에게도 보여주는 것이 우리 현장에 더 필요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나 역시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관리자라는 이름으로, 내 ‘쪼’로, 그들을 깎아 내리고 있는지도 모르므로.
글_김지원(길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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