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더라도, 끝까지 가라
澤地 萃 ䷬
萃, 亨王假有廟, 利見大人, 亨, 利貞, 用大牲吉, 利有攸往.
췌괘는 왕이 종묘를 세우는 것이 지극하다. 대인을 만나는 것이 이로우니 형통하고 올바름을 굳게 지키는 것이 이롭다. 큰 희생을 쓰는 것이 길하니 나아갈 바를 두는 것이 이롭다.
初六, 有孚 不終, 乃亂乃萃, 若號, 一握爲笑, 勿恤, 往 无咎.
초육효, (구사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나 끝까지 가지 못하면 마음이 혼란해지고 같은 부류가 모여들 것이다. 만일 크게 울부짖으면 한 줌의 무리가 비웃을 것이나 이를 걱정하지 말고 나아가면 허물이 없다.
六二, 引吉, 无咎, 孚乃利用禴.
육이효, (구오와) 끌어당기면 길하여 허물이 없을 것이니, 진실한 믿음으로 소박한 제사를 드리는 것이 이롭다.
六三, 萃如嗟如, 无攸利, 往无咎, 小吝.
육삼효, 모이게 하려다가 탄식하니 이로울 바가 없다. 나아가면 허물이 없지만 다소 부끄럽다.
九四, 大吉, 无咎.
구사효, (치우침 없이 두루 행해서) 길하게 되어야 허물이 없다.
九五, 萃有位, 无咎, 匪孚, 元永貞, 悔亡.
구오효, 사람들의 마음이 모여서 그 지위에 있게 되니 허물이 없다. 믿지 않는 자가 있거든 우두머리의 덕을 지속적으로 바르게 지켜나가면 후회가 없다.
上六, 齎咨涕洟, 无咎.
상육효, 한탄하며 눈물 콧물 흘리나 탓할 곳이 없다.
3학기가 되자 월강(감이당 월요대중지성의 별칭)에서 공부하는 대여섯 명의 학인들이 이번 학기의 마무리를 하지 못했다. 한 학기만 쉬겠다고 일찌감치 멈춘 사람도 있었고, 부득이 계속 준비해 오던 3학기 발표를 포기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 중 한 학인은 아예 공부를 그만두게 되었다. 중간에 코로나라는 강력한 변수가 있긴 했다. 몇 개월간 지속되어온 코로나19바이러스로 인한 팬데믹의 상황이 더 악화되어 대면 수업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줌’이라는 온라인 수업방식에 따라 집에서 각자 접속하다보니 ‘모여서’ 함께 하는 수업에 비해 긴장도나 밀도가 떨어진 탓도 있었다. 게다가 렉처라는 3학기 미션 또한 결코 만만치 않았던 것도 이유의 하나이기도 했다.(하긴 매학기 글쓰기 역시 힘든 건 마찬가지지만..^^) 그러나 이런 외부의 어떤 이유들이 끝까지 마무리하지 못한 문제의 핵심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보면 포기해야할 이유는 너무나 많고도 많기 때문이다. 중도에서 포기한 이유보다 중요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간 것과 아닌 것의 의미가 무엇인가이다. 이유야 어떻든 공부 과정의 한 마디를 마무리하는 것과 그러지 못한 것은 별 차이가 없는 것일까. 새삼 ‘끝까지 가는 것’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 괘와 효가 있었다. 택지췌괘의 초효가 그것이다.
췌(萃)는 함께 ‘모인다’, 혹은 ‘모은다’는 의미이다. 괘의 모습이 연못이 땅위에 올라가 있어서 물이 모인 모습으로 이제 막 모이는 의미가 된다. ‘모이는 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존재 방식이다. 핏줄로, 같은 직종으로, 같은 취미로, 혹은 어떤 목적으로…등, 어떤 동질감으로 엮인다. 이렇게 동류가 모이는 것 자체는 사물의 속성이다. 「계사전」에서도 “변화의 방향성이 같은 종류끼리 모이고, 모든 사물은 무리에 따라 나뉘어지니, 길흉이 생겨난다.(方以類聚, 物以群分, 吉凶生矣)”고 했다. 사람이 모이고 재물이 모이니 풍성해지고 무슨 일이든 도모할 수 있기도 하지만 또한 온갖 예측하지 못한 일들이 일어나고 다툼과 혼란이 생기는 게 당연지사다. 그래서 모임의 때에 중요한 것이 사람의 마음을 모아 끌고 갈 수 있는 대인(大人)이다. 정이천은 “대인을 만나는 것이 이롭고 형통한 것은 정도(正道)로 사람들을 모으기 때문”(利見大人亨 聚以正也)이라 했다. 왕이 종묘를 세우듯 지극한 마음과 정성으로(王假有廟) 천리를 따르는 자가 대인이다. 사욕이 없으니 사람의 마음이 절로 따르고 모임의 구심점이 된다.
공부공동체인 감이당 또한 사람이 모이는 곳이다. 누가 오라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마음이 향해 찾아온 곳이다. 그 구심점엔 공부가 있다. 천지의 이치를 담은 고전에서 자신이 가야할 길을 찾고 삶의 비전을 찾는 공부다. 앞서 간 성현들의 지혜의 언어와 만나고 깨달음을 향한 탐구와 성찰의 여정에 동참하는 것. 이렇게 공부에 뜻을 두고 모였어도 온갖 사람들의 사심과 욕망이 드러나는 장이기도 하다. 혼란과 다툼이 없을 수 없다. 이럴 때 ‘왕격유묘(王假有廟)’로서 중심을 잡아주는 것이 공부의 비전이요, 진실한 믿음과 정성으로 그 길에 동행하는 스승과 벗들이 곧 올바로 사람의 마음을 모으는 대인이라 할 수 있다.
함께하는 공부에 접속한 이유는 저마다 다르겠지만, 지금까지의 삶의 방향을 돌아보고 무언가 변화를 시도하려는 마음은 비슷할 것이다. 한데 스스로 원해서 시작한 공부라 해도 사람의 마음처럼 변하기 쉬운 게 없다. 그래서 공자는 “잡으면 보존되고 놓으면 잃어서 나가고 들어옴에 일정한 때가 없으며, 그 방향을 알 수 없는 것은 오직 사람의 마음을 두고 한 말이다”(정이천, 『주역』, 916쪽)라고 했다. 언제 어느 때 흔들리고 변할지 알 수 없는 게 사람의 마음이다. 처음 시작을 의미하는 초효에서 ‘끝까지 가는 것’을 강조한 이유도 이 점을 경계한 때문이리라.
초효의 효사를 보자. 初六, 有孚 不終, 乃亂乃萃, 若號, 一握爲笑, 勿恤, 往 无咎.(믿음을 가지고 있으나 끝까지 가지 못하면 마음이 혼란해지고 같은 부류가 모여들 것이다. 만일 크게 울부짖으면 한 줌의 무리가 비웃을 것이나 이를 걱정하지 말고 나아가면 허물이 없다.) 내 눈에 들어와 꽂힌 대목은 ‘믿음을 가지고 있으나 끝까지 가지 못하면’(有孚 不終)이다. 대중지성에 처음 온 사람들은 1년간 이어지는 공부 프로그램을 보고 나름의 믿음이 있어서 선택한 공부일 터이다. 함께 읽을 텍스트들과 글쓰기, 운영 방식, 그리고 무엇보다 공부로서 자기 삶의 변화를 도모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다. 그런데 막상 와보니 생각보다 쫓아가기가 힘든 경우가 대부분이다. 읽어내야 할 책들은 벅차고, 해보지 않은 발제를 해야 하고, 기대했던 바와도 다를 수 있다. 게다가 너무나 힘든 글쓰기까지 해야 한다. 글쓰기 앞에서 포기한 사람이 부지기수다. 애초 생각한 것과 다르니 마음에 틈새가 벌어지고 흔들린다. 공부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도 멈추고 싶은 마음이 든다(有孚 不終). 그러면 당연히 마음이 혼란해지고 이전의 편한 관계나 익숙한 동류들과 어울리게 된다(乃亂乃萃). 같은 부류가 모인다는 건 과거 그대로의 습관적 삶을 의미한다. 공부에 뜻을 두었던 마음이 어지러워지고(象曰, 乃亂乃萃 其志亂也) 다시 공부하기 이전의 삶의 패턴으로 돌아가 버리는 건 순식간이다. 우리는 흔히 무언가 마음을 혼란하게 하는 다른 원인이 있어서 공부를 멈춘다고 말한다. 그러나 공부를 멈추고 싶은 마음, 이렇게까지 힘들게 해야 해? 라는 마음이 그런 외부의 원인을 불러오는 게 아닐까. 다행히 주역은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해법까지 알려준다.
초육은 시작하는 자리다. 굳건한 심지를 가진 양(陽)이 와야 할 자리에 유약한 자질을 가진 음(陰)이 와 있다. 흔들리는 게 당연하다. 이제 막 공부를 시작하면서 흔들리지 않으리라 여기는 것도 교만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믿음을 가지고 있는 정응(正應)의 관계인 구사효를 부르라 한다(若號). 모임(췌)의 때에 중요한 건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이다. 구사효는 처음 자신이 믿음을 내었던 공부 프로그램의 과정이자 그 과정을 함께하는 동료이고 스승이라 할 수 있다. 힘들면 힘들다고 크게 울부짖으며 그 짝을 부른다(若號)는 건 함께 끝까지 가겠다는 믿음과 의지의 표현이자 약속이다. 그 마음이 1년의 과정동안 자신을 지켜주고 끌어간다. 그것만이 유약한 초효가 살 길이다. 초효는 순종을 의미하는 곤괘(地)의 맨 아래에 처해있다. 기쁨으로 순종하는 마음은 있지만 오래도록 지속하는 강건함이 부족한 자질이다. 그러니 초육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초발심을 굳건히 지켜 끝까지 가져가는 것이다(利永貞).
그러면 이전에 어울리던 소인배 동류들이 가지 못하게 비웃고 낄낄거린단다(一握爲笑). 힘든 공부하지 말고 우리랑 즐겁게 놀자고, 아니 이전의 편한 습관대로 살아가라고, 갖가지 불안이나 유혹, 쓸데없는 자의식 등으로 발목을 붙드는 것들이 바로 이 한줌의 무리(一握)를 의미한다. 하지만 그따위 한 줌의 무리를 걱정하지도 두려워하지도 말고 무조건 가라! 그래야 허물이 없다!(勿恤, 往 无咎) 초효에게 가장 큰 허물은 끝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게 세상 만물의 이치다. 아침부터 밤까지 다 지나보아야 하루를 알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다 겪어야 한 해를 안다. 하나의 괘는 초효로부터 여섯 효를 다 통과해야 새롭게 변한다. 공부의 과정에도 마디가 있다. 짧으면 짧은 대로 길면 긴대로 그때그때 한 마디를 끝내는 것, 바로 그것이 공부다. 끝이 있다는 것, 그 자체로 하나의 성취이자 완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흔들리면 어떤가. 흔들리더라도, 그냥 끝까지만 가라! 끝나면 좋은 거니까.^^
글_안혜숙(감이당 금요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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