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시작도 끝도 없는 모험, 그림 동화의 인류학』- 밑줄긋기

셋째아들의 미션에는 인과가 없다. 각각의 시험은 서로가 서로를 보충하는 전개과정이 아니다. 즉 승급심사가 아니다. 각 단계는 누군가로부터의 인정이나 승인을 꼭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실패했다고 해서 좌절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 동화 속에서는 허다하게 미션에 실패하는 아이들이 나오지만 그들은 개의치 않는다. 길 위에는 미션이 널려 있으니까. 
게다가 미션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은 내가 아니다. 내가 열심히 한다고 해서 일이 되어 가는 것이 아니다. 삶은 내 길에 여우가 나타나느냐 아니냐, 등이 굽어 밭일을 못하는 할아버지와 빨랫감이 쌓인 할머니를 만나느냐 못 만나느냐에 달려 있다. 「황금 새」의 첫째형은 여우의 조언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니 다시 말하자면 동화의 메시지는 이렇게 된다. 네가 세상에서 얼마나 다양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느냐에 따라 네 운명이 결정된다! 

「황금 새」는 「개구리 왕자」에서처럼 황금 성의 왕자가 어떻게 여우가 되었는지 그 저주의 이유를 말해 주지는 않는다. 내가 지금 왜 이런 국면에 처해 있는지 그 원인 파악에 힘을 쏟지 않는 것이다. 내가 어떤 조건에 있건 간에 그것은 출발점으로서의 의미만 있다. 왜 지금, 여기에, 이 모습으로 있어야 하는지 그 원인을 하나하나 다 찾아 밝힌들 무슨 의미가 있으랴? 중
요한 것은 ‘어떻게 이 문턱을 돌파할까’이다. 삶은 그런 식으로 매번 다른 문턱을 제시할 뿐이다. (121쪽) 


“‘어떻게 이 문턱을 돌파할까’, 삶은 그런 식으로 매번 다른 문턱을 제시할 뿐이다.” 그렇다. 별일없이 살려고 애쓰지만, 오늘 하루도 쉽게 끊는 법이 없다. 오늘이라는 시간이, 삶이라는 것이 나를 둘러싼 관계에서 벌어지는 미션(사건?)의 연속임을. 이처럼 연속된 미션에 지혜롭게 대처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끊임없이 미션이 주어지는 원인을 힘들여 파악하는 대신, 「황금 새」에서 말하는 지혜처럼, 그냥 하면 된다는 것, 누군가의 승인(인정이거나)을 필요로 하지 않아도 되는 마음, 태도로 충분하다고 했다. 삶은 “네가 세상에서 얼마나 다양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느냐에 따라 네 운명이 결정된다”고 했다. 내가 지금 왜 이런 국면에 처해 있는지 그 원인 파악에 힘을 쏟다가 정작 중요한 ‘여우’의 목소리를 놓쳐서는 안될 터다. 혹 주변의 목소리를 놓쳤더라도,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다시금 찾아 온 미션을 수행하다보면 내가 놓친 여우를 다시 만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레텔은 어른이 된다는 것이 인간이라는 자기 집에 갇혀 있지 않고 숲 전체를 보는 일임을 알려 준다. 동화가 보여 주는 숲의 카오스는 인간이 혼동 속에 산다는 것만 강조하지 않는다. 동화는 안 사람의 운명이란 종잡을 수 없다는 점을 체념하듯 말하고 있지 않다. 과자 집의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은 그분이 나빠서가 아니다. 내가 살려면 누군가는 죽어야 하니까 서로서로 어쩔 수가 없다. 그런데 이러한 현실 조건에만 매달려서 안달 복달하는 존재는 죽는다. 마녀 할머니처럼. 『헨젤과 그레텔』 이야기는 장황하게 그레텔의 심리묘사를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레텔이 오리와 대화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가졌다는 점은 그녀의 시야가 인간의 삶에 머물지 않고 숲의 다른 차원을 요모조모 주시하면서 공생의 원리를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158-159쪽)

인간의 현대적 삶을 생각해 본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온갖 도구들로, 또는 우리가 만든 규칙들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일견 온 세계가 특정한 법칙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는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그렇게 보이는 면에서 한 층만 아래로 내려가 보면 규칙을 부수는 온갖 혼란들이 우글거린다. '규칙'은 그런 혼란을 뚫고 솟아나는 것이다. 가령 우리 집 아이가 성장해 온 과정을 떠올려봐도 그렇다. '말'이 되지 못하는 '소리'들만을 내다가 어느 순간 소리를 조정해서 '말'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짧게 잘린 말들을 이어 붙여 문장을 만들기도 한다. 말하자면, 코스모스의 바탕에는 카오스가 있는 셈이다. '동화'는 우리의 고향이 바로 그 '카오스' 였음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그로부터, 말하는 사람 모두가 언젠가 예전에는 말을 '배워야만' 했듯이, 눈 앞에 닥친 혼란스러운 삶의 난관도 그와 같은 원리로 극복될 수 있음을 상기할 수 있다.


‘건강하고 팔팔한’ 한 젊은이가 다가와 불쌍하게 쓰러져 있는 저승사자를 돕는다. 그러고는 저승사자에게서 ‘알람기능’을 선물 받는다. 저승사자가 다가올 때 미리 연락을 주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젊은이는 승승장구 잘살 줄 알았는데, 곧 병과 고통이 찾아와 낮밤으로 괴로운 처지가 된다. 하지만 젊은이는 안심하고 계속 원래 살던 방식을 고수하면서 살아갔다. 아직 알람이 울리지 않았다며. 그런데 어느날 누군가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는 것이 아닌가? 보니까 저승사자다.(162~163쪽)

어느 날 저승사자에게 도움을 준 젊은이는 ‘알람’을 선물받는다.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 주는 알람을. 하지만 저승사자의 알람은 화들짝 놀라게 하는 대신, 열병으로, 현기증으로, 두통과 치통으로 몸을 서서히 잠식하면서 다가온다. 지금까지 살던 대로 살아간다면, 결코 이 알람을 알아챌 수도 없고 건강하게 살 수도 죽음을 현명하게 맞이할 수도 없다는 교훈. 이렇게 『그림 동화』에는 어린 아이들은 읽어도 알 수 없는 교훈들이 즐비하다. 그래서 이 책은, 알람이 수도 없이 울리고 있지만 못 들은 체하며 선잠을 자고 있는 어른들이 저승사자가 도착하기 전에 펼쳐야 할 책일지도 모르겠다~


숲을 공유하는 인간과 곰, 인간과 비둘기는 각자 처한 문제 상황이 다를 수밖에 없다. 때로는 인간과 곰이 서로를 먹는다. 동화는 그런 비정한 포식관계 안에서 숲 전체의 먹이고 살림을 생각하라고 말한다. 내가 먹음으로써 그가 죽고 내가 죽음으로써 그가 산다. 나를 다른 자리에 두는 것이 동화의 변신이고 동화의 저주이다. 하지만 그 저주를 풀 때, 즉 내가 바로 그런 숲의 일원임을 강력하게 의식할 때, 나는 더욱더 강하고 생명력 넘치는 존재가 된다. 나의 개성, 나의 직업, 나의 꿈 — 동화는 이 모두가 ‘다른 삶’에 절대적으로 의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 가면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를 생각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241~242쪽) 

『그림 동화』를 통해 인류학을 시도하는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와닿는 것은, 이 책에서도 여러 번 변주되고 있는 이 테마다. "남을 살려야 기회가 온다, 내가 살 기회가."  
이른바 '발달된' 사회에 살수록 '고립'이 심해진다. 원시시대, 중세시대, 전근대시대에야 혼자 있으면 여러 위협에 노출되고 식량 구하기도 어려워 죽는 경우가 많았지만, 요즘이야 어디 그런가. 오죽하면 "타인은 지옥"이라는 말까지 있을까. 이런 시대에 이 책은 동화에서 길어 낸 지혜로 바로 그 타인이 나를 살린다고 말한다. 심지어 그 타인은 내게 친절하지도 않고, 내가 좋아하는 타입도 아니지만, 그를 도울 때 그와 함께할 때 나도 살 기회가 있다고.  
아무리 우리가 '고립'되어 스마트폰을 통해 먹(을 걸 시키)고, 세계를 보고, 대화를 입력해도, 우리는 그것이 부족하다는 걸, 마음 저 깊은 곳에서 느낀다고, 나는 생각한다. '연결되고' 싶은 건 우리 유전자에 각인되어 있는 수준의 어떤 것라고. '타인은 살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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