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개정판 『조선에서 백수로 살기』_ 밑줄긋기

 

 

삶은 ‘레알’이다. ‘레알’에 충실하려면 디테일에 강해야 한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하지 않던가. 그 말은 디테일의 파워가 그만큼 강력하다는 뜻일 터, 일상의 악마는 소비와 부채다. 그 악마에게 낚이지 않으려면 생활의 전 과정에서 거품을 걷어 내야 한다. 치밀하게 단호하게!  (1장 ‘조선’에서 ‘백수’로 살기 — 밥벌이와 자존감 중에서, 66쪽)


이 구절을 읽고 생각해 보았다. ‘소비와 부채’, ‘소비’는 ‘벌집’이고 ‘부채’는 더울 때 부치는 그 ‘부채’면 좋겠지만, 전혀 그런 뜻은 아니고, 모두가 알고 있는 그 뜻이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껏 살면서 ‘부채’가 없었던 적은 단 한순간도 없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런 중에도 ‘소비’에는 환장하며 살아왔다. 이것은, ‘1억 빚지고 100만 원쯤 더 빚지는 건 일도 아니’라는 합리화의 결과인 셈이다. 빚이 있으니 자유롭지 않다. 그래서 더 쓴다. 쓸 때만큼은 해방감을 느끼니 말이다. 이 회로를 몇 번 돌고난 다음에 남는 것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이다. 아, 그렇다. 내가 평생 불안을 떨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요컨대 ‘자유’는 ‘절제’와 한 몸이다. 


이런 식의 ‘자기애’는 내적 성찰과는 방향이 정반대다. … 결국 이 자의식은 인정욕망과 깊이 연동되어 있다. 나, 나, 나를 외치지만 그 ‘나’는 결국 타인의 시선에 투영되는 ‘나’인 것. 해서 자존감이 높아지기는커녕 자꾸만 자신이 ‘부족해’ 보이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그럴수록 타자와의 교감은 어려워진다. 온통 마음에 자기밖에 없고, 타인은 나를 인정해 주는 도구일 뿐인데, 그런 사람을 대체 누가 좋아하겠는가? 역지사지 해보면 바로 알 수 있다. 하긴 현대인한테 역지사지는 가장 어려운 행위에 속한다. 그만큼 자기 안에 갇혀서 살고 있다는 뜻이다. (2장 우정, 백수 최고의 자산—친구는 제2의 나, 121쪽)


현대는 온통 ‘나’를 위해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나’를 위해 맛집을 가고, ‘나’를 위해 쇼핑을 하고…. 하지만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고 멋진 물건을 사더라도 SNS를 통해 자랑을 하고 ‘좋아요’를 받지 않으면 의미가 없죠. 하지만 고미숙 선생님은 이런 ‘나’를 위해 살수록 자기 자신과는 점점 멀어진다고 하시네요. 그렇게 살다 보면, 그 ‘나’가 자기 자신을 물어뜯고, 죽이고, 베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자의식이라는 쇠창살’을 부수고 ‘타자와 외부를 내 안에 들여야’ 합니다. 온갖 탐욕들을 내려놓고 ‘나’라는 감옥에서 탈출을 감행해야 한다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지성과 유머를 나눌 수 있는 친구들과 접속하기. 동서양의 지혜를 함께 공부하면서, 함께 놀고 먹기. 한마디로 함께 ‘백수 되기’! 


그러면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 간단하다. 지나간 것에 매이지 않고, 오지 않은 것에 떨지 않으면 된다. 그러면 ‘지금, 여기’를 살아갈 수 있다. 삶은 오직 현재뿐이다. 현재 안에 과거와 미래가 동시적으로 구현되기는 하지만, 결국 삶의 현장은 오늘이다. 그 누구도 어제를 살 수 없고, 내일을 살 수 없다. 태어나는 것도 그 어느 ‘오늘’이고, 죽는 것도 그 어느 ‘오늘’이다.

그 하루들이 모여 일생이 된다. 백수는 노는 사람이다. 동시에 배우는 사람이다. 배우는 게 즐겁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하여 놀면서 배우고 배우면서 논다. 뭘 배우냐고? 인생을 배우고 세상을 탐구한다. 세상이 스승이고 인생이 학교다. 네버엔딩 쿵푸! 하여, 이 앎의 지평선은 무한하다. 결코 끝나는 법이 없다. 그 지평선을 향해 나아가다 보면, 마침내 알게 되리라. 삶은 삶 그 자체로 충분하다는 것을. 오늘 하루가 곧 일생이라는 것을. 
(4장 배움에는 끝이 없다-네버엔딩 쿵푸!, 267~268쪽)



이 책은 기존과는 다른 관점에서 백수를 바라봅니다. 주어진 오늘에 충실하되, 지나간 어제에 얽매이지 않고, 다가올 내일에 연연해하지 않는 사람, 매일을 놀며 즐기지만, 그 놀이 자체가 배움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정규직이라는 안정과 성공의 가치, 이를 위한 관계 맺음으로부터 늘 자유롭지만, 끊임없이 인생을 배우고 세상을 탐구하는 사람, 그저 타인의 노동에 의존하여 놀고먹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오롯이 집중하고 배움으로 충만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백수로서의 삶. 백수 시대의 주인공들로 재조명되어야 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가장 시급한 일은 이런 전도망상 자체를 뒤엎는 일이다. 꿈이나 목표 따위는 필요 없다. 반드시 이루어야 할 사명 따위란 없다. 삶에는 본디 어떤 의미도 없다. 삶은 오직 사는 것 그 자체만이 목표다. 살다 보니 돈도 벌고 만나고 헤어지고 창작도 하고 정치도 하는 것이지. 그 반대는 절대 아니다. 돈을 벌기 위해! 사랑을 위해! 예술을 위해! 정치적 이념을 위해! 그렇게 목표 지향적으로 살다 보면 결론은 허무다. (......)
2,500년 전 공자, 부처, 노자는 이미 그런 경계에 도달했다. 이 현자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성취하라고 하지 않았다. 목표를 향해 달려가라고 하지 않았다. 세상을 구하겠다며 목숨을 바치라고 하지 않았다. 역사에 이름을 남기기 위해 지금의 삶을 희생시키라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모든 가치(표상)들로부터 벗어나라고 말했다. 그들이 말한 바 진리는 자유와 해방이다. 그것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타자를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교감함으로써. 자연을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공존을 모색함으로써. 적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를 해체하는 것으로써. 그러기 위해서 비우고, 버리고, 내려놓아야 한다. 모든 가치와 표상을.
(4장 배움에는 끝이 없다 — 네버엔딩 쿵푸! 중에서, 264~265쪽)


산다는 건, 결국 '허무'와 마주하면서 이것을 넘어가는 일이다, 라는 말을 들었을 때 청년기였다면 '그런가?' 싶었겠지만, 인생 후반기에 들어선 때 듣자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통의 삶도 이런데 하물며 '무엇을 위해' 매진하는 삶이었다면... 그 뒤는 감당하기 어려운 '허무'와 마주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삶을 삶으로' 온전히 살기 위해서는 "모든 가치와 표상"을 내려놓아야 하는데, 이 길을 갈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다. 이 책에 나와 있는 표현으로 "지혜의 파동에 접속하기". 세상의 모두를 공부하며 가는 삶 속에서만, 우리는 겨우 '허무' 위를 나아갈 수 있을 테다. 내일의 불안과 오늘의 허무, 어제의 환희를 모두 내려놓고, 나갈 수 있는 길이 있다. 『조선에서 백수로 살기』에는 그 길을 걸을 수 있게 해주는 기예가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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