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세키를 넘어선 소세키
소세키는 만년에 이르도록 ‘자기본위’라는 네 글자를 손에서 내려놓지 않았다. 그 점에서 그는 자기본위의 사상가이기도 했다. 하지만 소세키가 몇 군데 강연에서만 드물게 자기본위를 다루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 전모를 파악하기란 그리 쉽진 않다. 그래서 자기본위를 ‘주관이 뚜렷해야 한다’는 식의 교장선생님 훈시처럼 이해하거나, 근대 일본을 구성한 강력한 국가 이데올로기로 분석하고 그치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소세키의 자기본위’안에 숨겨져 있는 어떤 힘이 사라져 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더군다나 그의 ‘어두운’ 후기 작품들과 연결하지 못하고, 초기 몇 작품만을 근거로 자기본위가 해석되는 것이 아쉽기만 하였다. 그래서 나는 소세키의 주요 작품들에서 자기본위의 사유들을 찾아내서 하나로 꿰어본다면 자기본위 안에 있는 박진감 넘치는 힘을 드러낼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아마도 소세키는 그 힘과 함께 막 당도한 ‘근대’라는 괴물과 대결하였을 것이다. 자, 소세키 작품들 속으로 들어가서 그 대결들을 들여다보자.
신경쇠약을 만드는 세계
소세키에게 신경쇠약은 전 생애에 걸쳐 드리워진 그림자다. 영국 유학시절에는 소세키가 노이로제에 걸려 ‘정신이 이상해졌다, 발광했다’는 근거 없는 소문이 날 정도였다. 또 실제 이 때문에 “나쓰메, 정신에 이상 있음. 보호해서 귀국시킬 것”이라는 명령 전보를 받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서양인에 대한 신체적인 열등감, 부족한 유학비, 소화기관 쇠약에 따른 소화불량, 언어 장벽 등에 시달리며 두문불출 연구에 몰두한데서 나온 뜬소문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일화조차 신경쇠약에 관련된다는 점에서, 소세키가 얼마나 신경쇠약과 떨어질 수 없는 인연인지를 우회적으로 보여 줄뿐이다. 심지어 나이가 들어서는 아내 나쓰메 쿄코의 빈번한 발작이 그의 신경쇠약을 더 깊게 하였다. 하지만 이런 증상을 소세키 개인 기질 탓만으로 돌릴 수는 없어 보인다.
뭉크, <뱀파이어>
이 격렬한 활동 그 자체가 결국 현실세계라고 한다면 자신의 오늘날까지의 생활은 현실세계에 추호도 접촉하지 않은 것이 된다. 호라가토오게에서 낮잠을 잔 것과 똑같다. (…) 자신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는 하나의 평면에 나란히 있으면서 아무데도 접촉하고 있지 않다. 그리하여 현실의 세계는 저와 같이 동요하며 자신을 남겨두고 가 버린다. 몹시 불안하다.
─나쓰메 소세키, 『산시로』 중
큐슈에서 산요선으로 바꿔 타고 쿄토, 오사카를 거쳐 ‘하얀 여자들’이 있는 도쿄로 들어온 산시로. 세계는 철도의 격자처럼 정교하게 연결된 지 오래지만, 현실세계는 그와 도무지 연결되지 않은 채 낯설기만 하다. 지금 펼쳐진 현실세계는 앞선 세대들이 뛰어들어 모험을 감행했던 그런 세계와는 아주 다르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이하 『고양이』)의 메이테이 큰아버님이나 『그 후』에서의 다이스케 아버님 같은 세대에게는 ‘성실과 열의’만 있으면 나라를 세우겠다고 앞장서도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소세키 세대가 만난 ‘현실세계’는 ‘나’와는 도무지 연결되지 않은 채 전적으로 독립하여 존재한다. ‘나’는 기차에 타는 것이 아니라 실리는 것이고, 기차로 가는 것이 아니라 운반되는 것이다.(『풀베개』) 그 세계는 거대하고 무지막지하고 독립적이며, 한 마디로 인정사정 보지 않는다. 마치 ‘돌고 있는 팽이와 같고’, 그것을 계속 멈춰 세우려다 보면 ‘평생 잠들 수 없을 것만 같은’(『그 후』) 그런 세계인 것이다. 이런 세계 앞에서 다음과 같은 메이테이의 진단은 전적으로 옳다.
적극적이라는 게 우선 한계가 없는 얘기 아닌가. 적극적으로 아무리 해봐야 만족이란 영역과 완전이란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지. 저기 노송나무가 있는데, 나무가 시야를 가린다고 베어 버리면, 그 너머에 있는 하숙집이 눈에 거슬리겠지. 그래서 하숙집을 철거하면 그 다음 집이 또 눈에 거슬리고. 그런 식으로 확대해 나가다 보면 끝이 없어. 서양식이라는 게 다 그렇지 않은가. (…) 그래 봐야 인간인데, 얼마나 적극적으로 자기 뜻을 관철할 수 있겠는가. 서양 문명은 적극적이고 진취적일지는 모르겠으나, 결국 평생 만족을 모르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문명이야.(『고양이』)
그러나 이 문명은 분명히 ‘세계’를 움직이는 현실적인 힘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매혹적이기까지 하다. 미네코가 산시로를 단번에 사로잡아 버렸던 것처럼, 이 문명이 다가가기만 하면 사람들을 사로잡아 놓아주질 않는다. 서양문물이 확고히 지배하고 있어서 상대가 서양 사람이라면 그에 맞춰 발음하느라고 ‘안뇽가세요’라고 해야 하고, 옛날에는 운동을 하면 상놈이라고 손가락질 당했는데, 요즘은 세인의 평가가 180도 뒤집혀 운동을 하지 않으면 상놈이라고 간주된다(『고양이』). 영문도 모른 채 세상에 사로잡힌 대가로 ‘똑똑한 바보’가 된 셈이다. 우스꽝스럽지만 할 수 없는 일이다. 소세키는 산시로가 미네코에게 속마음을 간파당하고 굴욕감을 느끼듯 서구 근대 문물 앞에서, “늦었다”는 생각에 부끄럽고 초조하기만 했다. 이런 점에서 소세키의 신경쇠약은 압도적인 서양 문물에 대한 정신적 예속의 대응물로 보아도 크게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해체로서의 자기본위
영문학 공부를 위해 소세키가 들어선 런던은 이런 세계의 최대치였다. 그는 대학 청강을 그만두면서까지 제목만 알고 실제 읽지 못했던 작품들을 찾아 홀로 독파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1년 후 독서량이 생각보다 너무 적자, 엄청난 상심에 빠지고 만다. 영문학 책 더미 속에서 서양에 양자(養子)로 보내진 느낌이 들었다. 모든 것이 부평초처럼 근본에서 멀어져 이리저리 표류하고 있었다. 결국 예정된 기한 내에 좋은 결과를 얻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더군다나 대학을 졸업한 후 “왠지 모르게 영문학에 속았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어왔던 터였다. 이런 의문에다, 도저히 기한 내에는 달성하기 힘들다는 절망감이 더해지면서 소세키는 자신을 ‘마치 자루 속에 갇혀서 나올 수 없게 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할 수 없는 것 때문에 실감나는 세계에서 멀어진 것이다.
존 앳킨슨 그림쇼, <런던의 블랙먼 거리>
그런데 여기서 소세키는 뜻밖에 대범해지는데, 문부성이 당초 명령한 범위를 벗어나 연구 방법을 바꾸지 않고서는 이 상황에서 전진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그것은 막다른 골목에서 출구를 찾는 일이였다.
[영문학과 한문학에 대한-인용자] 학력은 동일한 정도인데 대상에 대해서 느끼는 태도가 이렇게까지 차이가 나는 것은 양자의 성질이 그 정도로 다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으며, 달리 말해서 한학에서 이른바 문학이라고 하는 것과 영어에서의 이른바 문학이라고 하는 것이 도저히 동일한 정의로 포괄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 다른 종류라고 할 수밖에 없다.(『문학론 서』)
서양문물은 모든 것을 양적인 것으로 전치시킨다. 그것을 습득하는 방법도 마찬가지로 양적으로 구성되었다. 따라서 일정한 양 이상을 공부한다면 영문학이 무엇인지를 당연히 알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소세키는 한문학과 동일한 공부량을 투여했는데도 영문학 수준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영문학만의 독특한 특성은 양적인 지식에 있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양적으로 동일한 수준의 학력을 요구하는데도 어떤 것은 획득가능하고 다른 어떤 것은 습득 불가능한 것이라면, 그것들은 분명 양적 차이가 아닐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영문학과 한문학은 본성상 차이가 있는 것이다. 어느 문학이 더 우위에 있다거나, 보다 높은 학력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영문학은 다른 문학일 뿐이며, 문학 중에 단지 하나의 문학일 뿐이다. 따라서 “영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부분에 대한 질문에 불과하다. 따라서 지엽적인 질문에 머뭇거리기보다 차라리 이것을 포괄하는 질문, 즉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투신하는 것이 더욱 근본적일 것 같다. 더군다나 이 지엽적인 문제(영문학)가 결코 대답할 수 없는 문제라면 더 말해 무엇 하랴. 문학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파고들어야만 영문학이라는 특수한 대상을 보다 잘 정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제 영문학은 유일한 문학으로서 대상화될게 아니라, 한문학[左國史漢]과의 비교 속에서 그 차이가 연구되어야 했다. 또한 한문학 수련을 받아온 나로서는 도저히 도달하기 힘든 영문학의 좁은 틀에서만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이 어떻게 문학일 수 있는지를 다른 학문과의 관련 속에서 연구하여야 했다. 인간은 자기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만 만난다! 놀랍게도 근본적인 방향으로 질문을 변형시키자,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방법들이 구성되고, 목표가 재산출된다. 따라서 소세키는 자신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한문학의 입장에서 영문학을 비교하면 되고, 자신의 시도가 유일했기 때문에 자신이 스스로 목표를 설정하면 될 것이었다. 이제 소세키는 문제를 뒤집어 새로운 문제를 생산하여 그것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었다.
이렇게 새롭게 문제가 구성되자, 영문학은 다른 문학일 뿐 최고이자 유일한 문학이라는 근거 없는 강박이 사라진다. 소세키의 신경쇠약은 서구문물이나 영문학에 대한 근거 없는 위계와 기만적이고 가망 없는 목표로부터 더 강화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소세키가 새롭게 구성한 문제는 뒤집혀 있던 것을 바로 잡는 하나의 전복이다. 그것은 현재의 ‘위계’에 대해 거꾸로 뒤집어 허물어뜨린다는 점에서 반시대적 전복이다. 더군다나 자신의 존재 기반인 한문학이나 유학생활의 존재 기반인 영문학 모두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불온한 전복이다. 이런 소세키의 사유는 『고양이』 곳곳에서 고양이의 시선을 통해 드러나는데, 특히 신의 전능함을 한순간에 무능함으로 뒤집는 장면은 단연 압권이다.
신이 인간의 수만큼 많은 얼굴을 제조했다고 하는데 [그래서 신을 전지전능하다고 숭배하는데-인용자] 과연 처음처럼 흉중에 무슨 계산이 있어 그런 변화를 꾀했는지, 아니면 고양이든 주걱이든 모두 같은 얼굴로 만들려고 시도했는데 뜻하는 바대로 잘되지 않아 이렇게 혼란스러운 상태에 빠졌는지 알 수 없지 않은가. 그러니 전능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 반대인 무능이라고 해도 별 지장은 없다..(중략)....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면 그들 사회에서 이렇게 단순한 일 정도야 밤낮으로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텐데, 신의 솜씨에만 홀려 헤어나지 못하니 깨우치지도 못하는 것이다. 제작 과정에서 변화를 주기 곤란하다면 마찬가지로 철두철미한 모방도 곤란한 일이라 할 수 있다.(『고양이』)
이 위트와 아이러니 기저에는 가시적인 위계 밑에 숨어 있던 질문[“어떻게 이렇게 모두 다르게 만들었을까?”]을 찾아내 뒤집고, 새로운 질문[“왜 똑같이 만들지 못했을까?-신이 무능하기 때문이지!]으로 바꾸는 전복이 도사리고 있다. 그 전복은 당초에 신이 전능하다는 답변이 나올 수밖에 없도록 했던 구조 자체를 해체함으로써 프로그래밍된 답변을 뒤집어버리는 전복이다. 이런 전복 위에서 비로소 신은 절대적으로 전능한 자에서, 무능할지도 모르는 자로 변형되어 나의 지평 안으로 들어온다. 질문 자체를 거꾸로 뒤집어서 도달할 수 없었던 대상을 나의 지평 안으로 들어오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자기본위의 해체를 통해 소세키는 다음과 같은 빛나는 출발점에 올라선다.
바로 그때 비로소 문학이란 무엇인가 하는 개념을 근본적으로, 그리고 자력으로 만들어내는 방법 외에는 나를 구할 길이 없다고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완전히 타인본위여서 근본이 없는 부평초와 같이 이 근처를 되는 대로 표류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용이 없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 그들은 그들일 뿐이라는 기개가 생겼습니다. 그때까지 망연자실하고 있던 나에게 여기에 서서, 이 길을 따라서 이렇게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지침으로서 주어졌던 것이 바로 이 ‘자기본위’라는 네 글자였습니다. 고백하자면 나는 이 네 글자로부터 새롭게 시작했습니다.(『나의 개인주의』)
결국 ‘자기본위’는 본성상 차이일 뿐인 것을 아무런 근거 없이 ‘위계’로 치환해버리는 것에 대항한다. 그리고 그 위계를 폭로하고, 그 위계로부터 도출된 거짓 문제를 전복함으로써 자신을 보다 근본적인 입장에 서게 하고, 대상들을 나의 지평으로 가져오는 작업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불온하며, 반시대적이며, 해체적이다.
런던 하늘 아래 도저히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문제 앞에서 정처 없이 해매는 소세키. 조금만 참자! 조금만 참아내자고 혼잣말을 해가며 잠자리에 들었다(『런던소식』)는 가련한 소세키. 주류 지식체계에 의문을 제기하고, 왜 영문학을 공부해야 하느냐는 근본적인 의문을 품고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자기본위는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며, 따라서 반시대적인 것이다. 자기본위는 타인으로부터 의심 없이 주어진 상황과 체계에 의문을 제기하고, 투쟁한다.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집요하게 파고들려는 태도 그 자체가 타인본위의 문학을 해체하고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서 자신의 입장을 세우려는 눈물겨운 투쟁이었던 것이다.
<올리버 트위트스>의 한 장면. 영문학 작품에서 만나게 되는 작가 찰스 디킨스, 소세키도 그의 작품을 읽지 않았을까?
'자기', 새로운 자연의 세계
그렇다면 이 해체의 작업을 거쳐 되돌아온 ‘자기’란 과연 어떤 것일까? 왜 근본적인 관점에서 생각하면 모든 문제가 반드시 ‘나’(자기)의 지평으로 되돌아온다고 할 수 있을까? 언뜻 보기에 소세키가 이른바 ‘마음’, 특히 이기적 에고를 깊이 탐구하였다는 점을 들어, 소세키가 실체적인 자아를 인정하고, 그 구성요소들의 변하지 않는 속성, 다시 말하면 ‘마음의 본질’을 찾으려 했다고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자기본위는 그 태생 자체가 해체적이기 때문에 자기본위를 실행하는 ‘자기’가 고정불변으로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해체하고 변화하는 것을 그 존립 근거로 해야 할 거라는 점에서 마음을 ‘에고’라는 단단한 실체로 해석하는 것은 자기본위의 사유와 모순된다. 소세키는 이 마음, 정신을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그는 성실성이든 열의든 간에 어떤 완성된 상태로서 자신의 내면에 간직돼 있는 것이 아니라 돌과 쇠가 부딪치면 불꽃이 튀듯이, 상대에 따라서 마찰이 잘 이루어질 때 당사자들 사이에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에게 내재해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정신의 교환 작용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상대방이 나쁘면 성실성이나 열의가 생길 리 없다고 생각했다.(『그 후』)
그에게 ‘자기’란 타자와 마찰이 일어날 때 발생하는 어떤 정신들의 교환작용이다. 이 관점 하에서는 정신이 실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돌과 쇠가 부딪히면 불꽃이 튀듯이, 각각의 비-주체들이 어떤 사건을 만나면 그 순간 교환 작용이 발생하여 정신이 탄생하고, 그것으로 비로소 주체가 된다는 말이다. 이른바 성실한 사람은 다이스케의 아버지가 생각한 대로 ‘금을 두들겨 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목적이란 태어난 본인 스스로가 만든 것이어야만 한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이라도 그것을 마음대로 만들 수는 없다. 자기의 존재 목적은 자기 존재의 과정을 통해 이미 천하에 발표한 것과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이런 전제에서 출발한 다이스케는 자기 본래의 활동을 자기 본래의 목적으로 삼고 있었다. 걷고 싶으니까 걷는다. 그러면 걷는 것이 목적이 된다. 생각하고 싶으니까 생각한다. 그러면 생각하는 것이 목적이 된다. (…) 자기 본래의 활동 이외에 어떤 목적을 세워서 활동하는 것은 활동의 타락이 된다. 따라서 자기의 모든 활동을 한낱 방편의 도구로 삼는 것은 스스로 자기 존재의 목적을 파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그 후』)
인간이란 애초에 체계적인 목적을 지니고 태어난 것이 아니다. 태어나고 나서야 자신의 목적을 구성하고 실현한다. 본래부터 목적을 지니고 태어났다고 말하는 순간 그는 자유를 상실한 것이 된다. 존재의 목적은 ― 만일 그런 것이 있다면 ― 태어난 후 활동하는 과정에서 활동을 담지하는 존재자가 구성하고 완성해야 한다. 그래서 다이스케는 자기 본래의 활동을 자기 본래의 목적으로 삼고자 한다. 걷고 싶으니까 걷고, 그래서 그것이 목적이 된다. 활동 자체가 목적을 위한 방편이 되어선 안 된다. 그렇게 하면 모든 인간의 존재 목적을 파괴해버린 꼴이 될 것이다. 어쩌면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화가 나면 화를 내고, 울 때는 죽어라 하고 우는 고양이야말로 ‘인간적인’ 것일지 모르겠다. 주인 쿠샤미는 겉과 속이 다르기 때문에, ‘일기’라는 것으로 속내를 풀어내야 하고, 쓴 일기를 보고 무턱대고 짜증을 낸다. 그는 혼자서 ‘있을 수 없는 목적’을 만들어 내고,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면 혼자서 그것과 싸우고, 이어서 스스로 화가 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연출한다.(『고양이』)
다이스케는 이를 자신의 활력에 충실하지 못한 것이라고 본다. 또 단번에 행동하려는 ‘용기와 흥미’가 부족하기 때문에, 행동 중에 스스로 그 행동의 의미를 의심하게 됨으로써 그런 혼란이 발생한다고 지적한다. 이것이 바로 권태이다. 다이스케가 ‘생활의 의의(실감)를 잃어버리고 혼란에 빠진 것’이라고 했던 것이고, 소세키가 런던 유학 시절 부평초처럼 이리 저리 표류하여 근본적이고 실감나는 세계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라고 했던 바로 그것이다. 사실 ‘활동이 곧 목적’이라는 다이스케의 이념은 매순간 존재자 스스로 자신의 삶을 실감나게 구성한다는 이념이기도 하다. 이렇게 소세키는 다이스케를 통해 해체적 자기본위를 ‘활동이 곧 목적’이라는 사유 위에 위치시킴으로써, 친구 히라오카의 아내를 받아들이고 다음과 같은 세계로 들어선다.
‘오늘 비로소 자연의 옛 시절로 돌아가는구나.’...처음부터 왜 자연에 저항을 했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는 비속에서, 백합 속에서, 그리고 재현된 과거 속에서 순수하고 완벽하게 평화로운 생명을 발견했다. 그 생명은 어디에도 욕망이 없고 이해관계를 따지려들지도 않았으며 자기를 압박하는 도덕도 없었다. 구름과 같은 자유와 물과 같은 자연이 있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행복했다. 따라서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그 후』)
다이스케가 돌아간 그 지점, ‘욕망도 없고 이해관계도 없는’ 그 자연은 모든 활동이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지점이다. 그곳은 활동과 목적이 일치하여, 외발적인 어떤 거짓도 개입될 여지가 없는 지대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기본위가 모든 문제를 나의 지평으로 되돌아오게 하는 이유를 알 수 있게 된다. 그것은 타인본위에 입각해서 외발적으로 강박하고 있는 문제들이 애당초 인간의 자연적인 존재방식과 달리, 근거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타인의 목적에 내가 예속되면 타인이 나의 생산물[활동의 결과물]들을 마음대로 강탈하기까지 한다. 실감나는 생활을 위해서 타인본위의 목적은 당연히 폐기해야 마땅하다. 따라서 타인본위의 목적이 사라지면 문제들이 ‘나’의 지평으로 들어오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으로 변화된 문제여야만 나의 삶을 위해 진정으로 의미 있는 문제, 즉 근본적이고 실감나는 문제가 된다. “영문학이란 무엇인가?”는 위계적 질문이었고, 영문학적 권위로 대변되는 근대문물에 무조건적으로 예속시키려는 불순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문학이란 무엇인가?”는 근대문물로서의 영문학뿐만 아니라, 좌국사한으로 대표되는 한문학, 그리고 기타 등등의 모든 문학과 학문을 동일한 지반 위에 올려놓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목표로 활동할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질문이다. 그것이야말로 소세키에게 실감나면서도 근본적인 질문이었던 것이다.
영화 <열흘 밤의 꿈>의 한 장면.
이제 우리의 다이스케는 히라오카를 정점으로 하는 세계에 의문을 제기[미치요에 대한 사랑]하고 그 기원[자기기만으로 사랑을 친구에게 양보]에서 해체[사랑을 고백]하자, 모든 것이 행복해졌다. 그리고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소세키에겐 자유가 바로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아이러니한 자기본위
그렇다면 다이스케가 치열한 투쟁 끝에 들어선 지대는 바로 그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이어야 할 것이었다. 그것은 멀리는 『고양이』에서 메이테이가 ‘안드레아 델 사르토’라는 발음하기도 어려운 가짜 화가의 말을 빌려 “자연 그 자체를 옮겨라”(『고양이』)라고 능청스럽게 너스레를 떨었던 그 ‘자연’일 것이다. 그리고 가까이는 『풀베개』에서 ‘사람을 얕잡아 보고, 이기자 이기자고 초조해하는’ 인정(人情)은 사라지고, 비인정(非人情), 즉 누가 봐도 자연스러움의 세계일 것이다. 그곳에서는 사람에 대한 충만한 사랑의 기쁨, 타인들과의 굳건한 연대로 가득한 땅, 즉 다이스케의 말대로라면 ‘순수하고 완벽하게 평화로운 생명이 발견되는 땅’이여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주류 도덕을 이탈한 이후를 형상화했다고 보이는 『문』과 『마음』에서 소세키가 묘파한 세계의 풍경은 의외일 뿐만 아니라, 기이하기조차 하다.
『문』에서 소스케는 친구였던 야스이를 배신하고, 그의 아내였던 오요네를 아내로 삼지만, 나약함과 죄책감 때문에 항상 극도의 불안 속에 살아간다. 또 『마음』에서는 주인공 ‘선생’이 친구와 삼각관계에 있다가 그 친구를 배신해 자살하게 만든 과거가 있다. 결국 그도 죄의식으로 괴로워하다, 때 마침 순국한 노기대장의 소식을 접하고 같이 자살하고 만다. 정작 사랑을 쟁취하자, 다이스케가 그토록 황홀해 하며 생을 걸고 투신하려 했던 그 ‘아름다운 자연’은 온데간데없고, 황량함과 슬픔, 그리고 불안의 정서로 가득 차 있다. 다이스케가 보았던 그 아름다움은 이 황량함을 대가로 빛났던가 보다.
그들 부부는,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추위에 떨며 서로 부둥켜안고 몸을 녹이듯이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괴로울 때에는 항상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요’하고 오요네가 소스케를 위로했다. 소스케는 오요네에게 ‘참아야지 뭐’라고 대답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포기라든가 인내라는 것이 끊임없이 작용하고 있었지만, 미래라든가 희망이라는 것은 그림자도 비치지 않는 듯이 보였다. 그들은 별로 과거 얘기를 하지 않았다. 때에 따라서는 약속이나 한 듯이 서로 피하기조차 했다.(『문』)
마치 자연은 ‘아름다움’이란 무기로 사람들을 불러 모으지만, 그 유혹에 넘어가기만 하면 황홀함을 송두리째 빼앗아버리고, 황량함과 슬픔, 불안만을 그 사람들 몫으로 남겨 놓는 듯하다. 그 끝을 알 수 없는 적막과 황량함, 항상 주류 사회로부터 소환 받을까 불안해하며 금방이라도 돌덩이가 떨어질 것 같은 절벽 밑 외딴방에서 숨죽여 사는 모습, 밖으로의 출구조차 없어서, 자살을 해야 하는 선생의 모습까지, 황량하기 짝이 없을 뿐 아니라, 하나같이 암담하고 끔찍할 따름이다. 소세키의 표현에 따르면 그 삶은 ‘보이지 않는 결핵성의 무서운 균’이 잠재된 것 같고, 얼핏 보면 유령 같다는 생각을 품게 만든다(『문』). 이런 모습이 정녕 그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이라면 다이스케가 생을 걸고 넘어 가야할 필요가 과연 있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다.
그러나 담벼락 밖에서는 아름다움이 황량함을 숨겼지만, 담벼락 안에서는 불안과 황량함이 그들 부부의 아름다움을 숨긴다. 소세키가 묘사한 그들의 일상생활 그 자체는 황량한 외관과 달리 의외로 소박하고 따뜻하다. 담벼락 밖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소스케 부부는 금실이 너무나 좋다. 함께 살면서 한 번도 서로 반나절 이상을 어색한 기분으로 지내지도 않고, 얼굴을 붉히며 싸운 적도 없다. 미래나 희망이라는 것은 볼 일이 없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서로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산속에 사는 심정으로 도시 속에서 산다. 그들은 주류사회의 접경지대에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성한 것으로 보인다. 마치 그것은 둘이 하나가 되어 만든 새로운 유기체와도 같다.
외부로 성장할 여지를 찾아내지 못한 두 사람은, 내부를 향해 깊숙이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의 생활은 폭이 좁아질수록 깊이를 더해 갔다. 그들은 육 년 동안 세상에서 산만한 교섭을 찾지 않는 대신, 그 육 년이라는 세월을 들여 서로의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들의 생명은 어느 틈엔가 서로의 밑바닥까지 파먹어 들어갔다. 그 두 사람은 세상에서 보면 분명 두 사람이었으나, 서로가 볼 때는 도의상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하나의 유기체였다. 두 사람의 신경을 이루고 있는 신경계는 마지막 섬유질에 이르기까지 서로 부둥켜안도록 만들어져 있었다.(『문』)
이건 아주 기묘한데, 이 유기체는 여러 겹을 벗겨내야만 드러나는 그런 독특한 유기체이다. 주류로부터 낙인찍혔으니, 조마조마하고 쓸쓸하지만, 불가피하기에 주류에 대한 기대감 자체가 사라져버리고 없는 지대. 그들에게 있어서 주류 사회는 일상생활의 필수품을 공급해 주는 곳 이상이 아니다. 둘이 하나가 되어 있는 모습은 하나의 생명인 듯이 빛난다.
<푸른문학 시리즈>의 <마음> 편
소세키의 자연이 빙빙 돌아가는 근대 문물의 움직임 속으로 몸과 마음을 던져서 그 근대 문물과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반대로 이것저것 다 떠나서 호젓한 산과 들로 찾아 가버리는 것이 아닌 것 또한 분명하다. 왜냐하면 『풀베개』에서 말한 대로 그것은 인정(人情)의 세계에 함몰되어 버리거나, 반대로 초월적인 신의 세계로 도피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세키는 자연을 호젓한 산과 들로서의 자연도 아니고, 선진 문물과 하나가 되는 자연도 아닌 어떤 다른 독특한 지대로서의 새로운 곳을 상상했음이 틀림없어 보인다. 다음과 같은 아이러니로부터 소세키가 상상한 그 지대를 추적해보기로 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옹졸한 사회가 만든 갑갑한 도덕을 벗어던지고 거대한 자연의 법칙을 찬미하는 목소리만이 우리의 귀를 자극하듯 남는 게 아닐까? 하긴 [불륜이 있으면-인용자] 그 당시엔 모두들 도덕에 가담하지. [불륜을 저지른-인용자] 두 사람의 관계를 부정하다며 비난해. 하지만 그건 그런 사정이 생긴 순간을 수습하기 위한 도의적 충동, 다시 말해 잠깐 지나가는 소나기 같은 것이고 나중까지 남는 건 아무래도 청천과 백일, 즉 바울과 프란체스카야. (…) 도덕에 가담하는 자는 일시적 승리자임에 틀림없지만, 영원한 패배자다. 자연을 따르는 건 일시적 패배자이긴 해도 영원한 승리자다.(『행인』)
주류 도덕의 관점에서는 패배자이지만, 사랑의 관점에서는 승리자인 그들에게 이 지대의 황량함이란 사랑을 획득한 기쁨에 비하면 부차적이다. 황량함과 슬픔, 불안 따위는 일시적인 패배의 모습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패배의 흔적 없이는 승리도 없다. 다시 말하면, 주류 도덕의 구속으로부터 이탈은 아름다운 것이지만, 그 때문에 주류 사회로부터 철저히 배제됨으로써 홀로 되는 아픔과 슬픔은 또한 불가피한 것이다. 그 지대는 지금까지 있어왔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을 시도하고, 더군다나 지금까지 있어왔던 것에 적대적이기까지 한 행위(불륜)를 하고서야 건너간 지대이다. 주류의 지형에서 그들 담벼락을 바라볼 때는 혐오스럽고 불행한, 패배의 세계일뿐이지만, 이 지대 안에서 삶을 꾸려가는 사람들에게는 승리의 세계이다.
이곳은 주류 사회에게 끊임없이 위협받기 때문에 불안으로 고통스럽지만, 그래도 조그만 승리를 쟁취한 자들의 ‘경계로서의 자연’이다. 마치 황량함과 쓸쓸함 그리고 불안이 소스케 부부의 따뜻한 유기체를 감싸고 있는 것처럼 이 ‘경계로서의 자연’은 『문』과 『마음』의 지대를 품고 있다. 소세키는 후배 작가 미에키치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저 깨끗하고 아름답게 사는 게 과연 생활의 의의의 몇 분의 일을 차지하겠냐며, 단순한 아름다움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고 큰 세계로 나가면 적극적으로 고통을 찾기 위해 써야 한다고 충고하였다. 그러면서 소세키 자신은 ‘한편으로 하이카이적인 문학에 출입함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목숨을 건 유신(혁명-인용자)의 지사 같은 격렬한 정신으로 문학을 해보고 싶다’(『소가 되어 인간을 밀어라』)고 한다. 소세키는 패배하여야만 승리할 수 있는 것처럼, 큰 세계의 기쁨을 얻기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고통을 찾아야만 한다는 것을 확고히 깨닫고 있었다.
소세키를 넘어선 소세키
그래서 이곳은 아이러니한 지대다. 이런 ‘경계의 자연’에서라면 고통은 일시적인 패배일 뿐이어서, 주류사회로부터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영원한 승리를 가리키고 있는지 모르겠다. 지금 이 순간이 계속 되어 외로움이 끊이지 않을 지도 모르지만, 영원히 승리 속에 있으려면 바로 ‘지금 여기’에서 주류로부터 이탈함으로써 생긴 일시적 고통을 견뎌내야만 한다. 오히려 고통은 소스케 부부의 유기체적 구성을 더욱 단단하게 하고 서로의 기쁨을 배가시키는 동인이 되었다. 그래서 이런 놀라운 반전이 수립된다. 소세키에게 승리한 자는 패배한 자이다. 오히려 패배하니까 승리한 것이 된다. 빙빙 돌아가는 문물에 휩싸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세상을 등지고 산 속으로 들어가지도 않으면서, 자신이 납득하는 삶을 살기위해서 소스케 부부는 주류도덕에 반하여 자신의 자연스런 욕망을 따랐다. 그들은 주류에는 패배하고 자연에서 승리하였다.
이 승리와 패배의 역설적인 모습은 『고양이』에서의 주인이나 메이테이 선생, 그리고 간게쓰 군과 같은 세상을 등진 백수건달들과 고양이의 아이러니한 조롱에서 이미 극적으로 드러난 바 있다. 사회란 서로 물어뜯고 싸우는 미치광이들의 집합소라서, 오히려 세상 이치를 알고 분별력이 있는 자가 걸림돌이 되니까 정신 병원에 가두고, 미치광이들이 단체를 이루어 세력이 생기면 소위 정상적인 인간으로 돌변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신 병원에 갇혀 있는 사람이 정상적이고, 병원 밖에서 난동을 부리는 사람이 미치광이인 것(『고양이』)이라며, 정상과 광기를 뒤집는다. 이 역설은 『도련님』에서 봇짱이 보기에 나쁜 것에 물들지 않으면 이 사회에서 성공할 수 없다고 믿고들 있는 것 같다며, 차라리 학교에서 ‘거짓말하는 법’이라든가 ‘사람을 의심하는 기술’을 가르치는 편이 이 세상을 위해서도, 그 사람을 위해서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거의 비웃음에 가까운 교육비평(『도련님』)으로 변주되기까지 한다. 급기야 이런 아이러니는 『그 후』의 ‘고등유민’ 다이스케에게 이르며 저항의 이념으로까지 발전한다. 전직 은행원 히라오카 앞에서 노동이 다른 것의 간섭을 받게 된다면 그런 노동은 타락한 노동이라면서, 먹고 산다는 목적만으로 맹렬히 일하는 주류의 일본을 극렬하게 조롱하고, 자신은 당당하게 게으름쟁이라 한다. 오히려 그는 남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끼며, 나에게 가장 적합한 것과 접촉하며 지내야 한다고 선언(『그 후』)한다. 결국 『고양이』의 구샤미 일당, 『도련님』의 봇짱, 『그 후』의 다이스케, 『문』의 소스케 부부, 『마음』의 선생, 『행인』의 이치로, 모두의 정신은 희극과 비극으로 다양하게 변주되어 나타날 뿐 모두 ‘경계의 자연’에 사는 사람들의 다른 이름들이다.
그러나 배제된 자들에게 이 지대는 탈출 지대이지만, 그곳은 아직 완전한 해방구는 아닌 불안 지대이다. 마치 영화 『매트릭스』의 ‘시온’과 같은 곳이어서, 주민들은 매트릭스로부터 소환될지 모른다는 불안을 안고 끊임없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아직은 완전하지 않은 조그마한 해방구일 뿐이고, 그래서 끊임없이 주류의 위협으로부터 불안해하며 살아가야 하는 곳이다. 아직은 패배의 흔적으로 황량함과 슬픔 그리고 불안이 상존하는 그런 곳이다. 더군다나 그곳에 갔다고 해서, 모두 주류의 도덕이나, 이기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상황을 더욱 괴롭게 만든다. 고양이는 이것을 예리하게 파악하고, 구샤미 일당이 초연한 척은 하지만, 욕심과 경쟁심이 여전히 숨어 있기 때문에 여차하면 그들이 늘 욕을 해대는 속물과 한통속이 될 우려마저 있다(『고양이』)고 아주 냉정하게 진단한다. 그래서 타인본위로 둘러싸여 있는 터라, 끊임없이 자기본위를 안고 타인본위의 공격을 막아내야 하는 위험스런 곳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영화 『매트릭스』의 사이퍼처럼 다시 주류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때문에 자기본위를 포기하려는 시도가 항상 있게 되는 그런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곳은 런던과 다르다. 이곳에서 소세키는 ‘런던의 소세키’와는 또 다른 싸움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마음』에서 선생은 친구를 배신했다는 죄의식에 시달린다. 그것은 소세키의 친구 마사오카 시키로 대변되는 자신의 뿌리, 한문학의 세계로부터 떠나, 영문학을 지향하게 된 소세키 자신의 모습일 것이다. 그것은 친자를 떠나 양자로 보내진 자신이기도 하다. 그러나 친구를 배신하고 간 영문학의 세계도 자신을 속인 듯하여 의심스럽기만 하다. 영문학으로서의 문학도, 한문학으로서의 문학도 아닌 어떤 곳에 닻을 내리고 자신의 길을 갈 수 밖에 없어 보였다. 그래서 붙잡은 것이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자기본위의 물음이었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 마사오카 시키가 그토록 열망했던 하이쿠적인 세계를 배신했다는 죄의식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친구 K가 나처럼 혼자 남겨진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 결국 마지막 길을 선택하게 된 건 아닐까?’(『마음』) 그렇게 아름다웠던 하이쿠의 세계가 내가 가고자 했던 길들 때문에 몰락하였던 것은 아닐까? 아니 내가 생각했던 그 길이 그 몰락을 재촉하지는 않았는지. 또 그렇게 해서 찾아갔던 영문학의 세계조차 떠나버린 자신이 정말 옳긴 한 걸까? 내가 가려했던 그 길은 불명확하고 불안하고, 도무지 끝이 없어 보인다. 영문학이나 한문학으로 대변되는 주류사회의 방향이 더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고, 더군다나 자신이 혼자 힘으로 세우려 했던 문학이란 것도 도무지 의심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그런 게 있기는 있는 걸까? 결국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자기본위조차 위태롭고, 의문스럽기 그지없다.
내가 사모님을 의심하기 시작한 것은 아주 작은 일 때문이었네....갑자기 사모님이 작은아버지와 같은 속셈으로 자기 딸을 나와 맺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아닌가 의심하게 된 거야......모녀가 내 뒤에서 서로 입을 맞춰 지금까지 모든 일을 진행해왔다고 생각하니 나는 갑자기 숨이 막혀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됐지. 불쾌한 정도가 아니라 이젠 더 이상 발을 내딛을 곳이 없는 벼랑 끝에 몰린 기분이었네. 하지만 나는 마음 한구석에선 그녀를 굳게 믿었네. 그렇기 때문에 믿음과 의혹 중간에서 올바르게 행동할 수가 없었지. 나에겐 어느 쪽이나 진실이고, 또 양쪽 모두 허상이었던 거야.(『마음』)
하이쿠적인 문학에 온 열정을 바쳤던 시키(친구 K), 그러나 그 시키의 세계를 떠나 의지해보려 했던 영문학(사모님), 그리고 내 의문을 풀어 주리라 믿고 파헤쳤던 근본적인 문학에 대한 물음(딸), 그래서 지금까지도 어쨌든 문학이라는 것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도무지 의심스러운 소세키(선생). 그리고 그 소세키를 보고 따라가고 있는 제자들(학생 ‘나’). 더 이상 발을 내딛을 곳이 없는 벼랑 끝에 몰린 이 뜻밖의 순간에 그는 자신을 넘어서고 있었다. 마치 ‘런던의 소세키’가 궁지에 몰린 자신을 넘어섰던 것처럼, ‘『마음』의 소세키’는 또 다시 궁지에 몰린 ‘런던의 소세키’를 극적으로 다시 넘어서고 있다.
"겨울은 너무도 따뜻했다"라는 K의 유언 (<푸른문학 시리즈> 「마음」 편)
어쩌면 자기가 떠나온 영문학과 한문학뿐만 아니라, 자신이 혼자 힘으로 만들려했던 문학 그 자체가 처음부터 없었는지 모른다. 아니, 문학이란 영문학으로, 한문학으로, 기타 등등으로 보이고, 그렇게 지칭되고 있을 뿐, 문학 그 자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닐지 모른다. 사모님이 딸과 결혼하도록 뒤에서 딸과 입을 맞춰 일을 진행했던 것처럼, 영문학이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만들어냈던 것은 아닐까? 이것조차 타인본위의 기만 속에서 구성되어 버린 질문이 아닐까? 영문학이든 한문학이든 어느 쪽이나 진실이고, 또 양쪽 모두 허상이다!
이 순간 우리는 다시 앞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문학에서 영문학으로 갈아 탄 소세키. “영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뒤집었던 소세키. 그래서 영문학과 한문학, 어디에도 돌아가지 않으리라 결심했던 결연한 소세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는 배 안에서 지금까지 내가 얼마나 위대한지 시험할 기회가 없었다며 이제 부터는 어떤 일이 있어도 10년 전의 일은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며, 혼자 힘으로 갈 데까지 가서, 그곳에서 쓰러져 죽을 것(『소가 되어』)이라고 외쳤던 열혈 청년 소세키. 그런 소세키가 이제는 “문학이란 무엇인가?”조차 의심하고 있는 듯하다. 소세키는 ‘런던의 소세키’가 그랬던 것처럼 기존의 질문을 다시 뒤집어야 할 상황에 처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무엇으로 바뀌어야 한단 말인가?
그것은 뜻밖에도 자기가 ‘자기’를 의심하는 것이다. 사모님과 딸과의 공모 속에 그것을 알고서도 자신의 이기심 때문에 친구K를 배신했다. 소세키는 이제 자신을 의심해야 했다. 문학이란 영문학으로, 한문학으로, 기타 등등으로서만 존재하는 문학일 뿐이었다, 그래서 영문학과 문학은 서로 보이지 않는 공모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자신으로 하여금 문학이 무엇인가란 질문을 하게끔 했던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이제 이것을 알아차려 버린 지금에 와서는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생산하게 했던 그 자기본위조차 의심해야 한다. 어쩌면 이제 소세키는 “자기 자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향하고 있는지 모른다. 여태껏 자기본위를 한다고 해왔지만, 그 “자기”가 혹시 ‘근대’라는 타인본위의 또 다른 생산물이었던 것은 아닐까라는 끔찍한 의문 때문에 벼랑 끝에 서있다. 그것은 아마도 『고양이』에서 “눈을 감아도 나,눈을 떠도 나”라고 했던 것으로, 한시도 떨어지지 않는 그 ‘나’가 바로 그런 ”자기“일 것이다. 마치 영문학이 문학을 문학으로서 존재하도록 했던 것처럼, 자기가 믿었던 자기본위의 ‘자기’라는 것조차 타인본위의 세계가 만들어 놓은 기만적인 ‘자기’가 아닌지 의심하게 되었다. 이제 자기본위는 그 먼 길을 우회하여 결국 ‘자기’와의 마지막 싸움 앞에 선다.
이런 과정을 하나하나 밟아오는 동안에 타인에게 짓밟히기보다 내가 나 자신을 짓밟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네. 아니, 내가 나를 학대하기보다 아예 나 자신을 죽여버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그러다가 결국엔 죽었다는 심정으로 살기로 결심했네.(『마음』)
결국 선생은 35년간 죽음을 가슴속에 품고 실행할 날만을 기다려 왔다는, 그러니까 ‘죽었다는 심정으로 살아왔던’ 노기대장의 유언을 보고, 마침내 자결하기로 결심한다. 메이지 시대의 자기본위가 ‘타인본위의 자기’[이기적 에고]로 가고 있다는 항거는 선생의 ‘유신(혁명)의 지사 같은 격렬한’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이 지점에 이르면 드디어 자연도, 자기도 없어지고 만다. 결국 자연의 지대란 끊임없이 되돌아오는 타인본위들과의 싸움뿐인 세상이고, 소세키의 경우 그것은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적인 자기’를 죽이는 것으로 귀결시켰다. 이 삶은 『몽십야』의 쇼다로우의 싸움과 같다. 절벽을 뒤로 두고, 한 마리씩 돌진해 오고 있는 돼지들. 그것들과 영문도 모르고 싸우고 있는 쇼다로우. 그는 씩씩대며 달려오는 돼지들을 몽둥이로 후려치며 버티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종국에는 기력이 다해 손의 힘이 빠지자 쓰러지고 만다.(『몽십야』-제7야) 소세키는 자기본위의 삶이란 바로 이런 싸움이고, 그 싸움 속에서 삶의 실감을 느끼고 있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타인본위와의 싸움 속에서 느끼는 삶의 실감. 그리고 그 싸움이 진행되고 있는 ‘경계로서의 자연’.
"젋다는 것만큼 외로운 일도 없지요."
우리는 먼 길을 걸어 소세키가 말하는 자기본위의 길을 따라 갔다. 그러나 길 끝에는 ‘자기’가 없다. 이제 더 이상의 공허하고 아름답기만 한 자연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더 이상의 혐오스럽거나, 순수한 ‘자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타인본위의 체계들로 둘러싸인 경계지대에만 존재하는 자기본위. 그래서 항상 위태롭고, 뒤집히며, 끊임없이 굴절 속에 있을 수밖에 없는 자기본위. 바로 이 지점에서야 선생의 죽음을 이해하게 된다. 선생은 죽음을 통해 타인본위 앞에서 메이지 유신이라는 혁명이 자기본위로부터 굴절되었음을 강력히 항거하였다. 그리고 거기에 기만적으로 삶을 영위해 왔던 자기 자신을 제거한다. 그것은 타인본위로부터 탄생한 이기적이고 기만적인 ‘자기’였다. 이와 동시에 선생을 따르던 학생, ‘나’는 자기(선생)가 없는 자기본위, 타인들로만 구성된 그런 도쿄로 들어간다. 그도 기만적인 ‘자기’를 품고 있을까? 그것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선생의 죽음으로 새롭게 구성된 자기본위로 무장하고, 새로운 차원의 타인본위가 도사리고 있을 도쿄로 들어가는 것일 터이다. 아마도 ‘쇼다로우’나 ‘선생’과 같은 이들의 끊이지 않는 자기와의 싸움 덕택에, 산시로가 들어갔을 때의 그것과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결국 ‘활동이 목적인 존재로서의 자기’란 ‘자기가 없는 자기’이고, 진정한 자기본위란 ‘자기가 없는 자기본위’이다. 타인들만 있는 곳, 자기가 사라져 버려 자기조차 타인인 곳에서 자기본위로 산다는 것. 그런 삶이 과연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것이 바로 소세키가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 던지는 자기본위의 새로운 질문이다.
_ 약선생(감이당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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