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로 환원될 수 없는 관계
관계라는 것은 결코 숫자로 환원되지 않는다. 돈으로도, 힘으로도, 계급으로도, 성욕으로도, 어떤 단일한 척도로도 일방적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물론 이런 거대한 힘들은 관계를 단번에 침투하여 박살내거나 변형시킬 수 있을 만큼 강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말하면서 방향을 틀 수 있는 공간은 그 속에 늘 남아 있다. 쿠바 관료주의 시스템처럼 거대한 바둑판으로 짜인 사회에도, 또 시급을 분 단위로 계산하면서 숨 막히게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도 늘 미시적으로 변화를 꿰할 수 있는 약간의 여지가 있다. 이 미묘한 ‘자유의 공간’은 어떤 인간관계를 맺느냐에 따라서 배치가 달라진다. 이 미시적인 관계를 배제하고는 어떤 거시적인 조직도 세워질 수 없다. 어떤 나무에서도 리좀이 뻗어나오고, 그렇게 뻗어나온 리좀이 나중에 나무가 되는 것처럼.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쿠바
지금 한국에서 관계가 화두가 된다는 것은 이 자유의 공간이 점점 좁아지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인간관계는 여전히 우리의 삶을 떠받드는 근간으로서 존재하지만, 관계의 공간이 가질 수 있는 폭과 넓이와 깊이는 다양한 상품을 통해서 매일 정교하게 교정당한다. 그 교정력이 너무 섬세한 까닭에, 우리는 그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말하는 법을 까먹기도 한다. 관계를 맺긴 맺는데 늘 샘플이 비슷하고, 그러니 관계 속에서 자라는 내공도 늘 거기서 거기인 거다. 그렇게 사람들 사이에 둘러쌓여도 외롭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응답하라 1988> 같은 복고풍 드라마가 나오는 거겠지. 이 드라마에 나온 것처럼 끈끈한 소꿉친구를 가진 사람들이 지금 얼마나 되겠는가.
정신 차렸을 때는 이미 21세기에 살고 있었던 나 또한 별 반 다르지 않았다. 물질만능주의가 관계를 얄팍하게 만든다는 담론에 공감하면서도, 드라마를 재미있게 감상하면서도, 당장 내가 지금 여기서 딱히 뭘 할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보고 시간을 거슬러서 살란 말인가?
아, 그런데 방법이 하나 있었다. 바로 쿠바에 오는 것이다. (시간을 거스를 수 없다면 공간을 바꾸면 된다.) 쿠바를 한국보다 인간적인 곳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더도 덜도 말고 관계의 공간이 넓다는 점 때문이다. 여기는 이 공간이 넓어도 너무 넓다는 게 문제다! 돈도 법도 일관된 척도로 작동하지 못하는 이곳에서 문제의 열의 아홉은 ‘인간관계’를 통해서 다 해결된다. 그만큼 관계의 스펙트럼도 태평양만큼 넓어진다. 샘플의 개수와 내공의 깊이가 늘어나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리고 분명하게 말하건대, 이 스펙타클한 관계의 현장에는 재미지는 <응답하라 1988>도 없고, 가슴 따뜻한 <TV 행복한 동화>도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한도 없는 부조리와 뜬끔 없는 인정(人情)과 선을 넘는 관심이 정신없이 뒤섞여 있다. 뒷목 잡게 만드는 뻔뻔한 태도부터 대가 없는 친절이 불쑥불쑥 들이닥친다. 이 난장판 같은 모습은 물론 ‘인간’의 성정을 고스란히 닮았다. 이 판을 굴러다니다보면 어느 순간 인간이란 불가사의할만큼 유치찬란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물론 나 또한 인간이므로, 여기서 예외가 될 수는 없다.
그래서 쿠바는 참된 의미에서 ‘인간적이다.’ 여기서 살다보면 니체가 어떤 마음으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썼을지 어렴풋이 상상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인간을 향한 뿌리 깊은 경멸과 그 뒤에 짙게 깔려있는 긍정의 사랑을 말이다. 언젠가 내가 쿠바에서 도통하는 날이 온다면 니체의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사람을 진심으로 믿으려고 하는 찰나에 번번이 배신당하고, 또 불신과 냉소로 무장하기 직전에 만난 진심 한 조각에 또 마음이 흔들리는 중이다. 이곳의 사람들을 완전히 좋아할 수도, 또 완전히 싫어할 수도 없다. 아, 쿠바! 제기랄!
결국 냉탕과 온탕을 번갈아가며 들끓던 감정은 한 가지 깨달음으로 승화된다. 관계가 무엇으로도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은 당위가 아니라 그냥 ‘팩트(Fact)’라는 것. 무슨 일을 하든, 누구를 만나든, 관계가 정해진 법도 안에서 ‘스무스하게’ 진행될 것이라는 기대를 애초부터 비워야 한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이 관계의 성격을 결정짓게 될 ‘자유의 공간’을 내가 어떻게 채울 것인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더 간단히 말하면 결국에는 나하기에 달렸다는 말이다. 꼰대 같은 말투라 하고 싶지는 않은 말이지만 사실 이것 밖에는 답이 없다.
친구에게 돈을 받지 않으면 난 어떻게 살란 말인가?
내가 겪은 관계 사례집을 조금 공유해보겠다. 쿠바에서 명실상부한 중상류층인 택시 기사들은 자기 취향대로 차를 꾸민다. 가족사진을 올려놓기도 하고, 스피커로 레게똥(남미 팝)을 빵빵하게 틀기도 한다. 그 중 하나는 재미있는 문구가 박힌 스티커를 붙이는 것이다. 주로 젊은 택시 기사들이 택하는 데코레이션 기법인데, 누가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문구들이 되게 웃긴다. 쿠바 사회의 맥락에 딱 들어맞기 때문이다. 최근에 택시를 탔다가 본 스티커 문구는 다음과 같았다. “아미고(amigo : 친구라는 뜻)에게 돈을 받지 않으면 나는 어떻게 살란 말인가?”
오호라, 이 얼마나 신박한가. 나는 이것보다 쿠바인들의 삶의 태도를 더 잘 표현해주는 문장은 없다고 생각한다. 쿠바에서는 모두가 아미고다. 처음 본 사람들도 서로 뭔가를 물어볼 때 ‘아미고’라고 부르고, 기분이 내키면 길거리에 있는 모두를 아미고라고 부를 수도 있다. 서로를 거리낌 없이 받아주는 열린 마음의 쿠바 사회를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볼 수 있겠다. (반면 진짜로 오랫동안 우정을 나눈 사이는 아미고를 뛰어넘어 ‘에르마노(Hermano: 형제)’라고 부른다.) 그런데 문제는 이 모든 아미고들이 ‘잠재적 수입처’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시장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고 또 국가가 주는 기본 월급이 아주 낮은 쿠바에서는 공식적인 취직으로 먹고 살 수 없다. 다들 어떻게든 비공식적인 지하 시장과 연관되어야만 생계를 꾸릴 수 있다. 그러니 인간관계는 당연히 내게 돈이 흘러들어올 수 있는 잠재적 네트워크를 의미한다. 친구 좋다는 게 뭔가? 나를 먹고 살게 해줄 수 있는 것보다 더 좋은 우정이 있는가?
교환 관계와 진짜 소중한 인간관계를 웬만하면 섞지 않으려고 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사람들로서는 이런 관계법이 좀 당황스러울 수도 있다. 그러나 쿠바인들 입장에서는 여기에 하등 문제가 없다. 가령, 나와 ‘친구’로 지내는 쿠바인이 있다고 해보자. 어느 날 그는 내가 집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자기 친구네 집이 싸고 좋다면서 강력하게 추천해준다. 쿠바에 대해 잘 모르는 나는 그의 안목을 믿고 따르기로 한다. 그리고 나중에 알고 보면 십중팔구 그 집은 별로 좋지도 않은데다가 시세보다 비싸며, 내 쿠바 친구는 내가 그 집에 머무는 동안 자기 친구로부터 매달 소개비로서 얼마씩 따로 돈을 받고 있다. 내 입장에서는 그가 나를 통해 이득을 취하고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상할 것이다. 그가 단지 ‘친구인 척’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쿠바인 입장에서 보았을 때, 우리의 우정이 상할만한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최상의 상황이다. 자기 친구는 월세를 받고 있고, 나는 집을 찾았고, 자기는 소개비까지 얻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도랑 치고 가재 잡는 우정인 것이다.
이중적인 의미의 ‘아미고’는 외국인이 끼어드는 순간 좀 더 위태로운 관계가 된다. 외국인은 늘 쿠바인들보다 돈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국인들은 쿠바인들에게 ‘최고의 아미고’이자 걸어다니는 ATM이다. 그래서 그 ‘우정의 방법’이 좀 공격적일 수도 있다. 물론 쿠바인들도 이것이 부조리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외국인을 등쳐먹고 수입을 올리는 자국인들을 경멸하며 (너무 당당하게, 너무 자주 벌어지긴 하지만) 일부러 외국인과 우정을 맺지 않으려고 하는 건전한 쿠바인들도 존재한다. 그렇지만 그런 쿠바인들은 당연히 내 주변에 없고, 대신 많은 쿠바인들이 호기심 30%, 선의 20%, 그리고 이익을 보려는 50%의 마음을 품고 내게 접근한다.
여전히 호갱이지만, 그냥 호갱은 아니다
이런 접근이 매일 매 순간 끊이질 않으면, 어느 순간 익숙함을 넘어서 지치게 된다. 특히 시장을 볼 때 심하다. 내가 등장하는 순간 시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나를 ‘아미가’라고 부르며 환영한다. 그리고 시장의 셈법은 일반 수학을 초월하여 새로운 영역에 들어선다. 45 곱하기 4가 270이 되고, 1kg에 35페소가 1개에 35페소가 되며, 450g의 저울추의 질량이 갑자기 절반으로 뚝 떨어진다. 무게를 속이고 가격을 속이는 방법이 얼마나 다양한지 모른다.
한 번은 시장에서 주먹보다 더 작은 과야바(열대과일) 두 개를 집었더니 아주머니가 총 1kg의 값을 달라고 답한 적이 있었다. 내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고 하니, 너는 외국인이라서 이런 걸 잘 모르는 거라고 천연덕스럽게 답하신다. 오호라, 그렇단 말인가? 외국인은 눈이 없고 머리가 없단 말인가? 평소 같으면 역시 쿠바라고 웃고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4시간의 수업과 4시간의 병원 당직을 끝내고 이 가난한 나라에서 비타민 좀 충전해보겠다고 발 질질 끌며 시장에 들렸던 상황이었던지라 원래 많지도 않았던 내 인내심은 금세 바닥났다. 아주머니, 그만하세요……^^
친구가 곧 손님이 되고, 손님이 곧 ‘호갱’이 되는 이 일상의 관계 속에서 내가 택한 태도는 다음과 같다. 우선 시세보다 30% 더 높은 가격까지는 정상이라고 여기고 받아들인다. 내가 이들보다 돈이 많다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므로, 생활의 논리에 의거하여 이 정도의 돈은 더 낼 수 있다. 이를 ‘삥 뜯긴다’고 생각하지 말고, 쿠바의 경제 발전에 이바지하는 투자금으로 생각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선제 조건이 있다. 나와 관계 맺은 쿠바인이 가격 이외의 부분에 있어서는 반드시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 그리고 자신만의 노동의 윤리를 가지고 또 실천할 것. 집주인이라면 제때 제때 집수리를 해주고, 청소부라면 약속한 시간에 청소를 하러 오고, 과일 장수라면 상하지 않은 과일을 팔 것. 그들이 떳떳해야 나 역시 100% 나의 의지로 돈을 지불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쿠바에서 공식적 호갱(외국인)으로 살지만, 나의 의지로 조건부 호갱이 된다. 만약 엄마가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외국인에게 사기 쳐서 팔자 펴보려는 놈팡이 쿠바 청년이 접근한다면? 과야바를 얼굴에 냅다 던져줄 것이다. 공부에 미친 의대생이 다른 데에서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이 놈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기생이 아니라 상생을 만드는 길
사실 내가 이렇게 확실하게 태도를 세울 수 있는 이유는 내가 내 돈으로 직업 창출을 성공적으로 해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 집에서 살 때부터 나는 나 대신 빨래를 해줄 아주머니를 찾아야 했다. 집에 세탁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러 아주머니를 거치면서 ‘빨래를 맡긴다’는 단순한 행위에도 다양한 경우의 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선심 쓰듯이 빨래를 해줬다가 안 해줬다가 반복하는 아주머니, 빨래를 개지도 않고 돌돌 구겨서 돌려준 후에 돈만 더 받으려는 아주머니, 아저씨가 담배를 피셨는지 담배 연기가 흠뻑 배어 있는 빨래를 돌려준 아주머니, 기타 등등.
나는 쿠바에서는 빨래 한 번을 하는 것도 도대체 쉬운 일이라면서 한탄했었다. 하지만 그때 나는 사실 내가 돈을 지불하면 당연히 그에 합당한 ‘서비스’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전제했었다. ‘서비스’란 내가 돈을 지불하는 순간 아무 문제없이 당연히 내게 되돌아와야 할 노동이었다. 그러나 쿠바에 서비스란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일대일 인간관계를 통해서 벌어진다. 내가 이 아주머니에게 3쿡을 지불할 때와 저 아주머니에게 3쿡을 지불할 때 일의 관계가 달라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사실 이 상황에서 을은 나였다. 아주머니들이 내 돈을 필요로 하는 것보다, 내가 그들의 노동을 더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영화 <기생충>에서 박 사장이 김 기사에게 “가정부 아주머니가 없으면 우리 집은 하루만 지나도 돼지우리가 될 거에요”라고 말하던 부분에서 갑자기 그 당시 나의 상황이 오버랩되었다. 이 관계 속에서 기생을 하고 있는 자는 과연 누구인가? 가정부 아주머니에게 돈을 줌으로써 그녀의 생계를 좌지우지하는 것은 분명 박 사장의 능력이지만, 아주머니의 노동이 없다면 이들은 하루도 깨끗한 집을 유지할 수 없을 만큼 무능력하다. 그럼에도 <기생충>에서 박 사장이 갑의 자리에 머무를 수 있는 것은, 그런 가정부 자리라도 절박하게 찾는 사람들이 ‘쌔고 쌨기’ 때문이다. 쿠바에서는 그렇지 않다. 이들은 언제나 돈이 부족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자리를 잃는 것과 동시에 목숨을 위협받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들은 일자리에 자존심을 갈아 넣지 않아도 된다. 내가 돈을 주기 때문에 갑이고, 아주머니가 돈을 받기 때문에 을이 되는 게 아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일대일 관계는 더욱 소중해진다. 나는 마침내 빨래를 제대로 해줄 수 있는 아주머니를 찾게 되었다. 그녀는 내 빨래를 자신의 빨래처럼 정성스럽게 해주고, 이불 빨 때가 안 되었느냐면서 필요한 간섭도 때때로 해주신다. 그리고 나는 아주머니에게 시세보다 조금 더 많은 돈을 기꺼이 드리면서, 언제나 공손하게 감사의 인사를 표한다. 아주머니는 내가 돈을 냈으니 당연한 거라면서 웃으시지만, 이제 나는 이게 더 이상 당연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 만큼 쿠바 물이 들었다. 돈은 돈이고, 관계는 관계다. 나는 내 생활유지를 위해 집안일을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고 아주머니는 생활을 유지할 돈이 필요하니, 이 점에서 우리는 완벽하게 동등하다. 그리고 서로의 필요를 충족시켜주기 위해 생존 조건을 공유할 때는, 쌍방으로 존중의 태도를 보이는 것처럼 중요한 것은 없다. 이 존중과 함께 우리는 현명하게 관계의 공간을 형성할 수 있다.
말이 필요 없는 우정
그리고 관계를 한층 더 깊게 파고 들면, 당연한 말이지만, 이곳에도 우정이 존재한다. 쿠바는 내게 우정의 성질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더 고심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다양성과 그 다양성을 어떻게 내 신체 속에 녹일지에 대한 고민이다. 뉴욕에서나 쿠바에서나 나는 다종다양한 사람들에 둘러쌓여 있다. 그리고 뉴욕에서 내가 다양성을 끌어안기 위해 익혔던 관계의 기술은 언어의 힘이었다. 말을 잘 들어주는 것, 열린 귀를 갖는 것, 필요하다면 자신의 이야기를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었다. 이는 영어라는 제2외국어를 쓸 때 모든 외국인들이 느낄 수밖에 없는 절망감에 기반해 있었다.
그러나 쿠바에서 나는 새로운 고민의 지점에 도달해있다. 쿠바인들은, 그리고 쿠바에서 만나는 외국인들은 언어와 인종만 다른 게 아니라 ‘존재의 형식’이 달랐다. 이 낯선 기운과 소통 방식은 스페인어를 익힌다고 해서 그 간극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때서야 나는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언어에 의지하여 소통해왔는지를 깨달았다. 내가 언어를 잘 다룬다는 것을 앞세워 소통하면서, 거꾸로 놓쳐버린 게 얼마나 많았는지를 보게 되었다. 말하지 않으면 끝내 알 수 없는 것들이 많다. 그러나 말하지 않는 것 속에 숨어 있는 정보가 훨씬 더 많다.
이 비언어적인 존재의 흔적을 읽어내는 것은 철저하게 내 의지의 문제이자, 능력의 문제다. ‘이 사람’을 통째로 느끼기 위해서 온 힘을 다 써야 하는 것이다. 오감을 모두 써야 하는 것이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판단하기 이전에, 단지 나와 함께 학교에 다니고 또 내 옆집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우선 느껴보는 것이다.
물론 이런 노력이 꼭 깊은 우정으로 보상받는 것은 아니다. 그 사람과 가까워질 수 없다면 그냥 내버려둔다. 또 그 사람이 나와 가까워지고 싶다면 역시 내버려둔다. 단지, 내가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지친다는 이유로 마음을 여는데 게을러질까봐 주의를 기울일 뿐이다. 마음의 문을 꽁꽁 닫느니, 약간 어리숙한 호갱이 되는 편이 낫다. 쿠바살이 끝에서 내가 관계에 있어서 조금은 더 성숙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글_김해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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