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동화인류학] 숲의 죽음을 넘보지 마라

숲의 죽음을 넘보지 마라



숲은 카오스다. 왕은 거지가 되고 공주는 재투성이가 된다. 엄마는 마녀가 되고 인간은 까마귀가 된다. 이처럼 숲은 만물이 제 자리에서 벗어나는 유동적 에너지의 장이므로 여기에서는 까딱하다가는 정신줄 놓게 되거나 아예 목숨을 버릴 수도 있다. 숲에는 죽음이 지척에서 차가운 입김을 뿜고 있다. 

   

그림 형제는 동화가 어린이와 가족을 위한 것이라고 했지만 실제로 이야기는 죽음의 이미지를 대단히 많이 보여준다. 차마 가족을 위한 이야기로 넣을 수 없는 민담 중에는 「아이들의 돼지 잡기 놀이」라는 것도 있는데, 아버지가 돼지를 잡는 것을 본 뒤에, 그것을 흉내내려고 푸주한 역할을 한 아이가 돼지 역할을 한 아이를 칼로 목을 쳐 죽게 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끔찍한 가족의 비극을 아이들이 봐서는 안 되겠지! 참, 혹시 이 사실도 아시는지? 원래 백설공주를 죽음으로 내몬 것은 친엄마였다고 한다. 워낙 독자들의 원성이 대단해서 그림 형제가 살짝 계모로 바꿀 수밖에 없었다고. 이처럼 사람이 어처구니없는 실수나, 어찌할 수 없는 운명으로 죽을 수 있다는 것은 동화가 줄기차게 말하고 있는 바다. 죽음은 바로 네 곁에 있단다, 아무런 이유 없이! 



삶과 죽음은 맞물려 있다 :「노간주나무」


그렇다면 동화는 이 지척의 죽음에 대해 어떻게 사유했을까? 첫째, 죽음은 일상적이고 우연적이다. 죽고 사는 데 필연적인 이유는 없다. 「죽음의 기별」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저승사자의 수난기이자, 도처에서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저승문턱에 관한 이야기이다. 참 웃기는 이야기인데, 왜냐하면 여기서는 저승사자로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가 나오기 때문이다. 숲에서 산다는 것의 지난함에 저승사자도 예외가 아니다. 

    

한 거인이 길을 가고 있는데 저승사자가 나타나 “멈춰! 한 발짝도 더 가지 마!”라고 말하자, ‘뭐? 네가 뭔데 이래라 저래랴야? 저승사자면 다냐?’라고 콧방귀를 뿡 뀐 뒤 저승사자에게 달려들었다. 거인과 저승사자는 긴 시간을 격렬하게 몸싸움을 했는데 결국 거인이 주먹으로 한 방 내갈기니까 저승사자는 다시 일어날 기력도 없을 정도로 꼬꾸라지고 만다. 어디 까만 모자 쓰고 까만 양복 입고 고상하게 돌아다닐 것 같은 저승사자인데 몸싸움 하다가 나동그라지다니. 거인은 인간이 아니지 않느냐? 라고 누가 딴지를 건다면 할 말은 없지만, 어쨌든 살아있는 존재와 죽음의 대결에서 생명이 승리를 거둘 여지는 얼마든지 있는 셈이다.

    



저승사자는 구석에 누워 있다가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여기서 고꾸라져 있으면 어떻게 되지? 죽는 사람이 없어지면 온 세상이 사람들로 가득 찰 테고, 나란히 서 있기도 어려워지지 않겠어?’ 사람이 죽는 데에는 세상이 비좁아진다는 것 외에 다른 이유가 없다. 죽음은 인구밀집도를 걱정한 저승사자의 배려다. 저승사자는 숲의 생태계를 위해 죽음의 낫을 휘두른다. 그래서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동화 속 저승사자가 생명연장의 꿈으로 가득 찬 우리 시대를 보면 뭐라고 할까? 

    

아무튼 문제는 그 다음이다. 쓰러진 한 젊은이가 다가와 불쌍하게 쓰러져 있는 저승사자를 돕는다. 그리고는 저승사자에게서 ‘알람기능’을 선물 받는다. 저승사자가 다가올 때 미리 연락을 주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젊은이는 승승장구 잘 살 줄 알았는데, 곧 병과 고통이 찾아와 낮에도 괴롭고 밤에도 시달리게 된다. 하지만 젊은이는 안심하고 계속 원래 살던 방식을 고수하면서 살아갔다. 아직 알람이 울리지 않았다며. 그런데 어느날 누군가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는 것이 아닌가? 보니까 저승사자였다. 놀란 젊은이는 왜 소식을 미리 알려주지 않았냐고 화를 냈는데, 저승사자의 대답이 이렇다. 


“내가 기별을 보내지 않았다고? 열병이 찾아와 자네를 툭툭 차고 뒤흔들고 자리에 드러눕게 하지 않던가? 현기증이 자네 머리를 멍하게 만들지 않던가? 팔다리가 마디마디 쿡쿡 쑤시지 않던가? 귀가 울지 않던가? 치통 때문에 볼이 아프지 않던가? 눈이 어두워지지 않던가? 이 모든 걸 떠나서 형제여, 매일 밤이면 잠이 나를 생각나게 해주지 않던가? 밤에 누워 있노라면 마치 죽은 듯이 느껴진 적이 없었나?”(『그림 형제 민담집』, 811쪽)

  

우리는 이렇게 죽음을 느끼며 산다. 그것이 보내오는 소식에 ‘아, 몰라도 돼! 나는 안죽을 거야!’ 같은 오만을 부리면서 자기가 살고 있는 방식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정말 큰일이 난다. 숲에 잠을 자지 않는 존재도 있는가? 밤에 누워 있노라면 죽은 듯이 느껴진다니. 우리는 매일 밤 죽음을 느끼고, 다시 또 눈을 뜬다. 이 동화가 말하고 있는 바는 문명하다. 늘 죽음을 명상할 일이다! 그렇다고 너무 무거워지지는 말자. 저승사자도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으니까. ^^  


동화가 생각하는 죽음의 두 번째 특징은 ‘죽어도 죽는 게 아니다’이다. 「노간주나무」동화를 읽어보자. 이야기는 그림 동화가 채집되던 때로부터 이천 년도 더 전에 있었던 사건이라며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어떤 부자에게 아름답고 경건한 부인이 있었는데 오래도록 아이가 없었다. 아이를 얻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해도 아이는 생기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겨울, 부인은 노간주 나무 아래에서 사과를 깎다가 손가락을 베었는데 눈 위에 떨어지는 피를 보다가 슬프게 탄식했다. ‘아, 피처럼 빨갛고 눈처럼 새하얀 아이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탄식은 사실 저주나 다름없는 말이 된다. 백설공주도 이런 탄식을 받고 태어났는데, 덕분에 계모의 빈충을 사고 학대를 받아 죽음에 내몰리게 되니까 말이다. 


어쨌든 봄, 여름, 가을까지 살이 오르는 노간주 밑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부인은 마침내 아기를 낳게 된다. 자기의 욕망을 투사해서 자신과 똑같은 아이를 보려하는 모든 엄마가 죽는다는 동화의 명제에 따라 이 부인도 즉시 죽고 만다. 자신을 노간주나무 밑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서. 남편은 곧 새장가를 들고, 새 부인 사이에서 딸을 얻는다. 계모는 이 예쁜 아들을 증오하여 어느날 사과 궤짝에 사과를 집으려고 고개 숙인 아들을 궤짝 뚜껑으로 내리 쳐 목이 달아나게 한다. 남편에게 원망을 들을까 두려워 한 계모는 자기 딸에게 죄를 덮어씌우고, 그것도 모자라 아들을 끓여 남편과 함께 맛있게 먹는다. 이 작품은 종이책을 읽고 있어도 페이지 넘기기가 두려울 만큼 끔찍하다. 영문을 모르는 아버지가 국이 맛있다며 그 안에 들어 있는 뼈를 하나하나 빨아서 집어 던지면서 싹 다 먹어치우기 모습을 보고 있으면 ‘부자간의 정’이라는 명제가 도무지 들어설 여지가 없다는 데에 깜놀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난다. 계모의 딸이지만 계모와는 달리 너무나도 착했던 딸 마들렌이 오빠를 잊지 못해서 그 뼈들을 비단 손수건에 모아 노간주나무 아래 푸른 풀밭 위에 갖다 놓은 것이다. 그러자 노간주나무가 기뻐하며 연기를 피우고, 나무 안에서 불길 같은 것이 솟아오르더니 새 한 마리가 날아오르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 엄마는 나를 죽였고

우리 아빠는 나를 먹었네.

누이동생 마들렌은

내 뼈를 모두 찾아

비단 천에 곱게 감싸

누간주나무 아래 놓아 주었네.

삐릿, 삐릿, 난 정말 예쁜 새야!”


이 노래는 그림동화 명곡 탑 쓰리 안에 들어갈 만하다. 우리 엄마가 나를 죽이고 아빠는 나를 먹는다는 것이 동화가 내포하는 가장 중요한 진실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 노래를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동화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가족애가 아니다. ‘가족이니까 서로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이 공동체에 속해 있으니까 마을이나 도시의 상식이 옳다’와 같은 사회의 도덕들은 모두 부차적인 주제가 된다. 동화는 가족이나 국가에 주의를 두기보다는 인간 자체의 본성과 욕망의 고유함을 냉정하게 직시하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래서 동화는 ‘숲’이라고 하는 차원을 강조한다. 가족이나 사회 이전에 만물이 존재하는 자연의 지평 전체에서 한번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숲 안의 모든 존재에게 가장 중요한 임무는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노간주나무」도 계모를 벌주지만 이 못된 아주머니는 반성을 모른다. ‘그 아이가 싫었을 뿐이었어!’ 아버지도 똑같다. 아들을 씹어 드셨다는 것을 알고서도 비통해하지 않는다. ‘그때는 배가 고팠지.’ 하지만 우리는 동화의 또 다른 명제를 잊어서는 안 된다. 내가 살려면 남을 살려야 한다!(「헨젤과 그레텔」) 계모가 벌 받는 이유는 악행을 저질러서가 아니라 남의 죽음과 나의 삶, 나의 죽음과 남의 삶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통찰하지 못해서다. 다시 말해 그녀는 지혜가 없어서 죽음을 맞는다. 

    



다시 죽음 이야기로 돌아오자. 뼈가 바스라지고 살도 녹아 없어졌건만 소년은 새로 부활한다. 그리고 새는 아름다운 노래로 금세공사, 구두장이, 방앗간 일꾼 등 마을의 모든 사람들을 감동시킨 뒤 다시 집으로 돌아와 노래를 부르며 계모를 죽음으로 몰고 간다. 이 엄마는 노래 소리가 듣기 괴로워 “땅속 깊이 들어가 저 소리를 안들었으면!”하고 소망하다가 죽는다. 새가 맷돌을 머리 위에 떨어뜨려서 죽는다고 되어 있지만, 돌에 맞기 전부터 계모는 죽음을 욕망했다. 계모가 죽자 그 자리에서 연기와 불길이 치솟았는데 불길이 사라지자 오빠가 다시 나타났다. 그리하여 아버지와 여동생, 환생한 오빠는 행복하게 밥을 먹으면서 오래오래 살게 된다. 아내와 엄마가 죽었는데도 이 아버지와 여동생은 아무렇지가 않다. 그저 오빠가 돌아온 것이 좋다. 아들이 죽어야 계모가 살고, 계모가 죽으니 아들이 죽는다, 그뿐! 

    

죽어도 죽는 게 아니기 때문에 죽음은 존재 방식의 전환이 된다. 「논간주나무」는 생과 사의 차이란 인간이 새가 되는 것처럼 존재의 상태가 달라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새에서 인간으로 다시 상태를 바꾸는 것도 자연스럽다. 일곱 오라버니가 갑자기 까마귀가 된다든가, 인간이 개구리가 된다든가 하는 이야기들은 죽음을 이런 종적 전환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충성스런 요하네스」에서 왕의 결혼을 돕던 요하네스는 저주에 걸려 돌이 되었다가 다시 사람으로 돌아오는데, 가끔은 이 전환이 생물과 무생물 사이에서도 일어난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긴 잠을 자는 경우도 죽음을 비유한다고 할 수 있다. 

    

신체는 나라고 하는 존재가 잠깐 머무는 집이다. 지금 어쩌다 이 육신에 들어와 살게 되었지만 언제 저 몸으로 들어가 살게 될지는 나도 모르지. 놀랍다! 이런 세계관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공장에서 제품이 찍어 나오듯 사육되는 소, 돼지, 닭을 다른 나를 보듯 볼 수밖에 없지 않을까? 대형마트에서 손쉽게 구매하는 과일이나 채소도 값에 따라 평가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반듯하고 윤기 나는 사과도 쥐어 막혀 멍이 든 사과도 다 제 사연을 갖고 여기까지 와서 나와 마주하고 있는 귀한 존재로 보일 것이다. 지금은 내가 고기나 사과를 사는 존재이지만 언젠가 나의 육신도 자연으로 돌아가 소와 사과를 살찌워야 하지 않겠는가.

         

이처럼 죽음을 상태의 변화라고 생각하면서 세상을 바라보면 만물 중에 인간이 최고다라고 하는 상식 하나가 무너진다. 사실 그림동화는 인간이 숲의 주인이라고 보지 않는다. 고양이가 장화를 신고 돌아다니면서 돕지 않았다면 그 무능력한 주인의 목숨은 어떻게 되었겠는가? 브레멘의 도적떼들을 퇴치한 것은 늙은 당나귀, 사냥개, 고양이, 수탉 등이었다. 개구리와 물고기가 인간사에 간섭하고, 인간도 인간 나름으로 마녀와 악마의 사업장을 드나든다. 인간은 돌멩이와 수탉과 까마귀와 함께 숲에서 산다. 

    

우리 몸에서 혀의 욕망과 위장의 욕망은 고유하다. 때로는 서로 모순을 일으킨다. 혀는 기름진 것을 계속 맛보고 싶어하지만 위장은 소화시키기 어렵다며 그것을 거부하는 때가 있다. 이처럼 욕망은 내 한 몸 안에서도 모순을 일으키면서 서로 충돌한다. 하지만 혀의 욕망과 위장의 욕망 중 어떤 것이 더 옳다, 더 우선한다고 할 수는 없다. 뇌의 욕망(‘나는 기름진 것을 좋아하는 취향이 있어!’라고 주장하고 싶은)과 발의 욕망(그런데 고깃집까지 걷기가 너무 피곤해) 등 이 몸을 구성하는 온갖 욕망들은 이렇게 저렇게 계속 의견을 주고 받으면서 최종적으로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한다. 내 몸이 이런 온갖 욕망들의 투쟁 장소인 것처럼 숲도 그런 욕망들의 투쟁처다. 동화는 그 모든 욕망을 긍정하며 그 안에서 위계를 설정하기를 거부한다.      

    

그래서 이런 동화가 나온다. 「들쭉날쭉한 이브의 자식들」이다. 「노간주나무」에 따르면 동화는 19세기로부터도 이천년이 더 된 이야기이지만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도 가끔 출현하신다. 그렇지만 동화는 기독교식 교리를 전달하지는 않는다. 숲에는 악마도 있으니까 하느님도 있을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할 뿐이다. 

    

이 이야기에서 아담이랑 이브는 진즉 낙원에서 쫓겨났는데 황무지에 집짓고 살면서 많은 아이들을 낳았다. 잘난 녀석도 있고 못난 녀석도 있었다. 어느 날 하느님이 가정방문을 오신다기에 이브는 못난이들은 좀 숨겨 놓았는데, 하느님이 잘난이들에게 너무 많은 축복을 해주자 못난이들도 슬쩍 데리고 와서는 축복을 부탁드렸다. 그런데 하느님은 잘난이들에게는 왕이나 영주, 백작이나 기사, 학자가 되라고 하시고서는 못난이들에게는 농부나 대장장이, 우편배달부나 마부, 머슴이 되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이브는 불공평하다며 발끈했다. 그러자 하느님은 대답하셨다. ‘너는 잘못 생각한 것이다. 모두 다 왕이 된다면 빵은 누가 굽느냐? 누가 쇠로 기구를 만드느냐? 풀은 누가 베느냐?’ “누구나 각자 자기 자리를 차지하고 서로 지탱해 주며 서로 먹여 살려야 하느니라. 사람의 몸을 보면 알 것이다.” 

    

왕은 왕의 일을 하고 무두질장이는 그의 일을 한다. 언뜻 보면 신분제 사회의 병폐를 교묘히 위장한 말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핵심은 우리 각자는 서로를 지탱해주는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이다. 눈에 비해 발은 열등하다고 할 수 있는가? 소장과 대장 중 누가 더 중한가? 신체의 각 기관을 비교할 척도란 어디에도 없다. 인간이 자유의지를 발휘해서 자기 신체나 주변 상황을 자유자재로 취사선택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것은 모두 ‘자유, 평등, 박애’라는 가치를 체현하는 인간을 전제로 했을 때 가능한 상상이다. 새끼손가락 하나만 베여보라, 머린들 편하게 있을 수 있는지. 

    

「들쭉날쭉한 이브의 자식들」에 나오는 하느님은 만물 중 인간을, 인간 중 그의 머리에 최우선권을 부여하는 상식을 거절한다. 죽음 앞에서 우리는 평등하다. 이것을 들쭉날쭉 이브의 하느님 버전으로 바꾸면 생명인 이상 우리는 평등하다가 된다. 이 평등은 너와 내가 똑같이 일인 일표를 가진다의 의미는 아니다. 우편배달부가 없으면 왕명이 전달되지 않듯 어느 하나만 빠져도 이 세계는 돌아가지 않는 다는 의미에서다. 너와 나는 각기 다른 자리에서 나눌 수 없이 전혀 다른 짐을 지지만 그 비교불가능한 존재감은 숲에서 똑같이 중요하다.  



생과 사, 모순은 공존한다 :「트루데 부인」,「푸른 수염」


동화는 죽음이라고 하는 문턱을 무시하지 않는다. 죽음을 도외시하지 않고 대신 어떻게 하면 지혜를 구해 그것을 피할 것인가를 이야기한다. 그래서 사랑하는 연인이 영원을 맹세하는 일은 없다. 어쩐 저주라도 언젠가는 풀린다. 결론에서 ‘오래오래 행복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 동화에서 행복이란 ‘길을 떠날 수 있음’이기 때문에 백설공주도 신데렐라도 결국은 토끼 같은 자식 낳고 죽게 되거나 자기가 계모가 되어 집구석을 박차고 나올 것이 뻔하다. 정말이지 동화는 행복한 상태를 따로 설정하지 않는다. 알콩달콩 따뜻한 집에 모여 앉아 가족끼리 저녁밥 먹는 그림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다. 이야기는 언제든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있는 그 조건만을 계속 다루고 검토한다.

    

그런데 하나 대단히 인상적인 점이 있다. 동화는 죽음이라고 하는 문턱을 강조하기는 하지만 죽음 자체에 대해서는 알 수도 없고 알아서도 안 되는 일이라고 강조하기 때문이다. 「트루데 부인」과 「푸른 수염」을 읽어보자. 

    



먼저 「트루데 부인」이다. 옛날에 고집도 세고 주제넘게 참견을 잘하는 소녀가 있었다. 부모님의 말은 일단 안 듣고 보았다. 어느 날 사람들이 하도 이야기하는 트루데 부인을 직접 만나 보아야겠다고 집을 나섰다. 부모가 ‘트루데 부인을 만나러 간다면 우리 자식이 아니다!’ 라고 엄하게 말해도 듣지를 않았다. 소녀는 트루데 부인의 집에 들어서자마자 무서운 것을 본다. 새까만 남자. 그는 숯장이다. 초록색 남자. 그는 사냥꾼이다. 새빨간 남자. 그는 백정이다. 마지막으로 소녀는 트루데 부인마저 본다. ‘트루데 부인, 제가 밖에서 보니까 당신은 없고 불같은 머리를 한 악마가 있더라고요.’ 결국 트루데 부인은 소녀를 장작으로 바꾸어 불 속에 던져버렸다.

    

동화는 호기심 많은 존재를 싫어하지 않는다. 금은보화를 깔고 잘 수 있는데도 엄지 소년은 세상 구경을 하러 길을 나섰다. 「트루데 부인」이 지적하는 점은 소녀가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보았다는 데에 있다. 숯장이, 사냥꾼, 백정 즉 악마는 숲의 주인공들이다. 그림동화에서 이들은 그 자체로 나쁜 존재는 아니다. 숮장이는 난쟁이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땅에 딱 붙어서 죽은 나무를 불쏘시개로 만들고, 불로 쇠를 달구는 일을 한다. 숲의 물, 불, 나무, 흙 등을 자유자재로 요리할 수 있는 존재다. 중세 유럽 민담에 많이 나오는 연금술사가 바로 숯장이의 후손이다. 

    

사냥꾼도 숯장이처럼 자유자재로 자기 능력을 발휘한다. 백설공주가 숲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힘을 써 준 이는, 왕국에서는 마녀의 부하였지만 숲에서는 착한 아저씨로 돌아온 사냥꾼이었다. 빨간 모자네 할머니를 살려준 것도 사냥꾼이다. 수렵시대의 향취 뿜뿜 풍기는 사냥꾼들은 많은 경우 곤란에 처한 주인공을 돕는다. 동화에서 생물을 죽일 수 있는 이 존재는 자기의 죽이는 능력을 살리는 데에도 많이 쓴다. 악마는 저승사자와 같은 계열의 존재이다. 하지만 악마도 시종일관 나쁘지만은 않고 가끔은 제 꾀에 빠져 어쩔 수 없이 남을 돕는다. 그러니까 트루데 부인의 집은 숲의 카오스적인 힘이 증폭되는 장이라고 할 수 있다. 「트루데 부인」은 부인의 집 안에 빨간 불이 활활 타는 것처럼 보이게 하여 이 점을 설명한다. 

    

소녀는 장작이 되어 바로 이 불을 키우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그녀의 죽음도 안 좋은 일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핵심은 왜 죽느냐? 이다. 트루데 부인은 이렇게 말한다. ‘네가 나를 비춰주기 때문이다.’ 「트루데 부인」에 따르면 죽음이 무엇인지를 직시하는 일은 위험하다. 죽음은 알아야 되는 일이 아니다. 우리는 ‘어떻게 죽을까’를 옆에 두고서 ‘어떻게 살까?’를 생각해야 한다. 

   

「푸른 수염」도 마찬가지다. 푸른 수염에게 시집을 간 소녀는 단 하나의 금기를 받는다. 오랫동안 여행을 떠난 푸른 수염의 저택에서 황금 열쇠가 속하는 방만은 절대 열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소녀는 그의 말을 어기고 문을 여는데, 그 안에서는 문을 열자마자 피가 강물처럼 흘러나왔고 벽에는 죽은 여자들의 시체가 걸려 있었다. 어떤 시체는 뼈밖에 남지 않아 있었다. 황급히 그 문을 닫고 나왔지만 열쇠와 몸에 묻은 핏자국은 지워지지 않았다. 결국 소녀는 오빠들의 도움으로 푸른 수염의 위협으로부터 살아나게는 된다. 그런데 그 많은 소녀들은 도대체 왜 죽은 것일까? 그들도 최후의 금기에 대한 호기심을 누르지 못해서 죽은 것이 아닐까? 죽음이란, 모든 것을 알고자 해도 되지만 이것만은 안 된다, 라고 하는 최후의 금기였던 것이다.

    

동화는 왜 죽음을 알 수 없는 것이라고 못박을까? 동화는 생과 사를 명확하게 구분하려고 한다. 죽음은 이해의 대상도 극복의 대상도 아니다.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내가 알만한 것으로 대상을 번역해버리는 일이다. 동화가 죽음의 자리를 보전하려고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 누구도 죽음의 세계에서 되돌아오지 못했다. 인류는 저 너머의 소식에 관해서는 들은 바가 없다. 현세가 이러하니 저세상도 이러하지 않을까, 하는 상식적 추론만 가능하다. 

    

그런데 동화는 이런 상식에 머무르지 않는다. 동화가 죽음의 자리를 확실히 못박는 이유는 생과 완전히 구별되는 어떤 상태의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서다. 동화는 변증법을 싫어한다. 나와 너의 차이를 종합해서 ‘우리’라고 하는 화해의 장 같은 것을 만들지도 않을뿐더러, 집과 숲의 구별 자체를 무화시키지도 않는다. 숲으로 모험을 떠난 자들의 최종 목적지는 집이어야 한다. 숲에서 배운 지혜를 집으로 가지고 와야 한다. 중요한 것은 집을 숲의 생기로 되살리는 것이지, 집을 숲처럼 만드는 일도 아니고 숲을 집처럼 만드는 일도 아니다. 

    

생과 사를 연결시킨다? 생과 사는 절대적 차이이기 때문에 연결이 불가능하다. 살면서 죽은 자, 죽었는데도 산 자, 이런 중간적 존재란 없다. 동화에도 안 나온다. 동화는 아예 까마귀가 되거나 개구리가 된다거나 해서 존재의 성질을 바꾼다. 그리고 까마귀가 된 인간은 반드시 다시 인간으로 되돌아와야 한다. 계속 까마귀로 살 수는 없다. 개구리도 마찬가지다. 원래 인간이었다면 반드시 다시 인간으로 돌아와야 한다. 좀 세속적인 예가 되겠지만 떡볶이를 좋아하는 사람과 파스타를 좋아하는 사람이 함께 식사를 한다고 가정해보자. 떡볶이와 파스타 사이에 중간항은 없다. 음식을 공유해야 한다고 할 때, 둘은 떡볶이와 파스타를 같이 포기하거나 한 사람이 자기 욕망을 포기하는 길밖에 없다. 모순은 극복되지 않는다, 극복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다면 그것은 오직 한 항의 포기에서만이다. 

    

그렇다면 동화는 모순의 공존을 좋아한다고 할 수 있다. 한 아들은 창을 팔고 다른 아들은 방패를 처지의 어머니가 있다고 할 때 동화는 그 어머니의 곤란한 사정을 즐기는 것이다. 왜? 창을 파는 아들과 방패를 파는 아들이 사는 세계는 아들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욕망으로 다 수렴되지 않기 때문이다. ‘형제는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 ‘엄마는 자식을 걱정하는 존재이다’ 이런 전제가 작동할 때에만 창과 방패의 모순은 곤란이 된다. 그런데 아들들이 처음부터 ‘나는 창만 팔거야, 너는 방패만 팔아라!’ 라는 식으로 결심하고 장사를 시작했겠는가? 살다보니 각자 그런 지점에 이르게 된 것이다. 어쨌든 창도 팔고 방패도 팔아, 둘 중에 하나 망하는 일 없이 어머니를 모실 수 있으니 나쁜 사이라고 할 수도 없다. 

    

동화 속 주인공들은 죽음이라고 하는 암흑이 설정됨으로써 살 길의 모색이라는 본래의 과제를 보다 다양하게 수행할 수 있게 된다. 죽음은 지금 여기에서 아등바등 일희일비하지 않는 거대한 조망권을 제공한다. ‘오늘은 내가  못 뚫을 것이 없는 창을 팔지만 아우는 못 막을 것이 없는 방패를 팔고 있겠구나. 세상은 합의점을 찾을 수 없는 모순의 장이다.’ 이런 광대한 시선을 가질 때에만 선택된 떡볶이와 함께 포기된 파스타의 가능성을 자기 삶 안에 품고 갈 수가 있다.  



우주의 신비




동화가 죽음을 알 수 없는 것이라고 설정한 점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하나 더 생각해보고 싶다. 세계를 ‘알 수 있는 것’으로 바라보는 것과 ‘알 수 없는 것’으로 바라보는 것은 각각 삶을 어떤 태도를 살게 할까? 코로나가 창궐하여 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못하게 되면서 정말 많은 시간을 온라인 학습으로 보내게 되었다. 광대한 인터넷의 바다에서 여기저기 접속하면서 다양한 정보를 채취해서 돌아오는 아이들의 표정의 의기양양했는데, 마치 큰 바다에서 거대한 물고기라도 잡은 듯했다. 그런데 접속만 하면 알 수 있다고 하는 이 생각에 어떤 함정은 없을까? 내가 돌아다니면서 채집한 것은 정보이다. 앎이 정보를 긁어 모으는 일과 같을 수는 없지 않은가? 손쉽게 알 수 있는데, 뭐하려 머리를 쓰겠는가? ‘언제라도 알 수 있다’라는 생각은 오히려 스스로 공부를 찾아서 할 의욕을 잃게 만든다. 아이들의 검색은 방탄소년단으로 편향되게 이어져, 봤던 동영상 보고 또 보는 일로 전개되었다. 남태평양 어디어디에 사는 물고기는 내일, 내일, 내일 계속 미루어졌다. 세계가 알만한 것으로 다 바뀌면 우리에게 펼쳐지는 것은 앎의 무한한 바다가 아니라 갑갑한 정보의 방이다.  

    

동화는 ‘내가 다 알 수가 없다, 세상에는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이 있다’ 라고 해야 지성이 작동한다고 본다. ‘모름’이라고 하는 한계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앎의 욕망은 싹트지 않는다. 그때 비로소 인간은 앎의 위험에 몸을 맡기게 된다. 트루데 부인에 나오는 소녀는 자신이 모를 수는 없다는 오만을 부렸기에 벌을 받았다. 트루데 부인은 자신을 비춰주는 거울을 불에 녹여버렸다. 나는 이 ‘거울’이 근대과학의 비유 같다. 트루데 부인은 자연의 이치를 있는 그대로 다 밝히는 과학은 결국 자연의 불꽃 안에 녹아내릴 것이라고 한다. 정말 인간이 생로병사의 거대한 순환인 이 자연의 온갖 생멸을 다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자연의 산물인 인간이? 트루데 부인은 이런 인간의 어리석음을 혼낸다.  

    

뉴스에는 종종 냉동인간 이야기가 나온다. 지금 치료 불가능한 어떤 병이 미래의 어느 순간에는 고쳐질 것이므로 이 육신을 지금 얼려 미래로 보내겠다는 뜻이다. 일종의 영생의 꿈이다. 저승사자가 끊임없이 보내고 있는 알람인 가끔의 편두통, 시체처럼 침대에 눌러 있게 하는 피로가 언젠가는 정말 정복될까? 두통에 시달리는 사람은 두통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삶을 살고 있다. 내 죽음의 모습을 결정하는 것은 지금 내가 살아가는 모습인데, 내 육신을 미래로 보낸 들 그 지점에서의 내 태도가 또 내 죽음을 결정할 수밖에. 왜 죽음을 극복하려 하는가? 지금 이렇게밖에 못사는 내 생활을 극복하면 될 것을.        

 

글_오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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