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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인류학

[동화인류학] 변신 이야기 나는 변신한다, 고로 존재한다

by 북드라망 2020. 12. 14.

변신 이야기

나는 변신한다, 고로 존재한다



커서 뭐가 될까?


둥자의 고민이 깊어가는 가을이다. 


둥자 : “엄마, 내가 커서 뭐가 됐으면 좋겠어?” 

母 : “넘어져도 잘 일어나고, 짜증 안내고 씩씩하고 또 …. ”

둥자 : “엄마, 직업말이야, 직업!”

母 : “음. 동물을 좋아하니까 수의사? 아니면 화가? 아니다, 아니야. 빵을 좋아하니까? 제빵사?” 

둥자 : “엄마, 뭐 ‘사’ 자나 ‘가’ 자 들어가는 거 말고. 그건 공부 많이 해야 된다며. 그리고 저번에 내가 빵집 아줌마 되겠다고 발표하니까 모두 웃었어.”

둥순 : “야, 너 특별히 하고 싶은 게 뭐야?” 

둥자 : “그게 없단 말이지.” 


둥자는 자기는 왜 꿈이 없냐며 요즘 직업을 찾기에 바쁘다. 잘하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어서 별로란다. 둥순이는 일찌감치 꽃집을 하기로 결심한 터라 좀 느긋하다. 한때는 다람쥐나 곰이 되고 싶다고 하더니만 벌써부터 취업 고민이라니, 쩝! ‘사’ 자나 ‘가’ 자 들어가는 거는 싫다고 말하는 것도 참 당연하다. 그런 직업을 얻으려면 하루 종일 앉아서 책만 봐야 하는데, 자기는 산책도 해야 하고 BTS 노래도 들어야 하니 바빠서 안 된다는 거다. 맞는 말이다. 왜 굳이 그런 삶을 살아야 하는가?  

   



헤르만 헤세가 1906년에 쓴 『수레바퀴 아래서』에 나오는 한스 기벤라트는 평범한 아버지의 온갖 기대를 다 받으며 최고 기숙학교에서 공부하다가 입신출세의 수레바퀴 아래 깔려서 파괴되고 만다. 상급학교의 상급학교까지를 나와서 모두가 인정할 만한 직업을 가지고 안정적인 삶을 사는 것. 헤르만 헤세는 바로 이런 평범한 상식이 인간의 영혼을 가차 없이 찌그러뜨린다고 보았다. 자기 영혼을 돌볼 수 있는 여유와 감수성을 키울 수 없다면 그는 이미 죽었다!   

    

J.D. 샐린저가 쓴 『호밀밭의 파수꾼』(1951)도 떠오른다. 여기에도 변호사와 정치가 등 미국 최고의 엘리트를 키워내는 동부 최고의 사립학교가 나온다. 주인공 홀든 콜필드는 부지런히 공부하고 친구들보다 앞서 나가면서 상류층의 일원이 되기보다는 인정과 의리를 지키는 어른이 되기 위해 발버둥친다. 순수하고 정직한 영혼이 낭떠러지에 떨어지지 않도록, 자신은 그런 가치들을 지켜주는 파수꾼으로 살고 싶다고 한다. 십대의 기차에 막 올라탄 둥순이와 둥자에게 이런 소설은 어떻게 읽힐까? 한스와 홀든은 자기다움을 자격이나 직업으로 증명하고 싶지 않은 청춘의 몸부림을 보여준다. 너는 누구인가? 라는 세상의 질문 앞에서 ‘글쎄, 나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 걸까?’ 하며 자신의 사람됨을 깊게 응시하는 것이다. 헤세나 샐린저에게 한 사람의 개성은 그가 추구하는 어떤 가치에 관한 문제였다.   

    

둥순이 둥자에게도 자신의 정체성에 관심이 가고 세상 어딘가에 자기를 위치시키고 싶은 마음이 꿈틀대는 때가 왔다. 그 누구와도 다른, 어떤 특별한 ‘자기’를 찾고 싶은 욕망이 불끈불끈이다. 하지만 그런 ‘자기’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렇게 열심히 찾아 다녀야 하다니. 둥자母는 자기만 꿈이 없는 것 같다며 초조해하는 딸을 달래주고 싶다. 둥자야 둥순아, ‘아무나’가 되어도 괜찮아. 



인간의 피부는 너무 얇아서

   

그림 동화에서는 ‘자기’를 정의하는 방식이 완전히 다르다. 동화 속 주인공들은 운명의 습격을 받아 엄마 품에서 쫓겨나고, 왕좌에서 떠밀리고, 쇠 상자에 갇혀 있다. 계발해야 할 개성은 따로 없다. 어쩌다 운이 좋아 공주 옷도 입어보게 되고, 신기한 마법 식탁보를 얻어 한 끼 밥 잘 해결하는 식이다. 가끔은 운좋게 하인들을 많이 부리게 되어 좀 살만해지기도 한다(「여섯 하인」). 그러나 이 하인들도 때가 되면 다 떠나간다. 동화 속 주인공들은 이름이 없다. 뭔가를 소유할 수 있는 그릇으로서의 나, 계발되고 고양될 어떤 원질로서의 나라는 것이 없는 까닭이다. 

    

동화가 ‘자기’를 어떻게 이해하는지는 저 다양한 변신담을 읽어보면 잘 알 수 있다. 인간은 개구리가 되고(「개구리 왕자」), 까마귀가 되고(「열두 오빠」), 때로는 사슴이나(「오누이」) 나귀가 되기도 한다(「신기한 푸성귀」). 심지어 식물이 되기도 한다.(「노간주 나무」) 이런 변신담에 따르면 인간은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서 동물로’ 몸을 옮긴다. 여기에서는 ‘된다’라는 말이 ‘능력이 축적’을 뜻하지 않고 존재의 전환을 의미한다. 동화에서 인간의 피부는 너무나 얇고 입을 수 있는 옷은 너무나 많은 것이다. 

    

주인공들은 대체로 자기 껍데기를 갑갑해 한다. 「오누이」에서는 호랑이가, 늑대가, 사슴이 되지 못해 안달이 난 오빠가 나온다. 물론 오빠는 계모가 샘물마다 마법을 걸어 놓아 목이 마를 때마다 동물이 될 위험에 처해 있다. 그렇지만 이 동화를 따라가다 보면 오빠는 여동생이 아무리 말려도 숲으로, 숲으로 이끌리는 자신이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빠는 저주인줄 알면서도 그 저주에 이끌리는 것이다. 백설공주도 그랬다. 난쟁이들이 제발 집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그렇게 신신당부를 하는데도, 몇 번이나 마녀에게 당하는 데도, 숲으로 한 걸음 내딛고 싶은 자기 욕망을 못 참는다. 동화 속 아이들은 모두 길 위에 있는데, 굳이 따지자면 그것은 팔자 때문이라기보다는 다른 삶을 향한 욕망 때문이라고 해야 한다. 


“참을 수가 없어. 그곳에 가 봐야겠어. 나는 그렇게 쉽게 잡히지 않아.”

누이동생은 울면서 말했다.

“그 사람들이 오빠를 죽일 거야. 그러면 나는 온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채 혼자 숲에 남게 될 거야. 오빠를 내보내지 않겠어.”

사슴이 대답했다.

“그러면 난 여기서 실망하여 죽어 버릴 거야. 사냥 나팔 소리를 들으면, 발굽을 박차고 뛰어가야 할 것 같아!”(「오누이」, 앞의 책, 91쪽)

 

그래서 집을 떠나는 데에, 변신이 이루어지는 데에 별다른 이유가 없다. 「오누이」에서도 계모가 의붓자식을 미워해서 저주를 건다고 하지만, 저주가 왜 내렸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심기 불편한 마녀에게 딱 걸렸을 수도 있고, 자기도 모르게 숲의 금기를 위반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어찌 되었던 그렇게 몸이 바뀌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살다보니 까마귀가 되는 일도 있는 거다. 동화는 이토록 삶의 방식에 있어 여유롭다. 

    

물론 저주라는 점에서 좋지 않은 일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것도 따져볼 필요가 있다. 저주를 받았다지만 뭐 굶으면서 괴롭게 살지 않고, 까마귀로서 사슴으로서 다른 세계 안에서 충분히 생활한다. 까마귀로 변한 일곱 오빠들을 떠올려 보자. 뭐, 동생이랑 하루 종일 인간답게 놀지 못하는 것은 좀 아쉽겠지만 어쨌든 낮 동안 충분히 먹고 마시고 창공을 날며 만족스럽게 살지 않는가? 

    



오히려 변해야지만 더 잘 살게 되는 경우도 있다. 「신기한 푸성귀」에는 이런 저런 푸성귀를 먹고서 나귀도 되었다가 인간도 되었다가 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사냥꾼은 결국 ‘궁하니까 푸성귀 나물이라도 먹어야겠군. 맛이야 별로겠지만 기운을 차리게는 해 주겠지’라고 생각하고는 싱싱한 포기를 골라 깨물어 먹었다. 그런데 몇 입 삼키자마자 기분이 이상해지며 몸이 완전히 달라지는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다리가 네 개가 되고 머리가 굵어지며 두 개의 기다란 귀가 자라났다. 깜짝 놀라 자신을 보니 나귀로 변해 있었다. 배는 점점 저 고파졌고 이제 나귀까지 되고 보니 촉촉한 푸성귀 나물은 더욱 맛이 있었다. 열심히 게걸스럽게 먹다 보니 마침내 다른 종류의 푸성귀 나물은 더욱 맛이 있었다. 열심히 게걸스럽게 먹다 보니 마침내 다른 종류의 푸성귀도 먹게 되었다. 조금 먹자마자 또다시 몸이 변하는 것이 느껴졌다. 다시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었다.(「신기한 푸성귀」,『그림형제 민담집』(현암사, 632쪽)  

 

사냥꾼은 어쩌다 먹은 푸성귀 때문에 나귀가 되었다가 인간이 되었다가 한다. 요리하지 않은 푸성귀를 먹는다는 점에서 그는 인간계를 벗어나 있다. 굶어 죽을 판인데 ‘인간’이면 뭐 하겠는가? 사냥꾼은 자신이 사냥꾼이라는 사실에 연연하지 않는다. 동화에는 ‘공주’니 ‘왕자’니 ‘사냥꾼’이니 하는 식으로 그냥 그 사람의 처지만 언급되기 때문에 개성 있는 인간이 돌아다니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이 존재들은 ‘살아야 한다’는 지상의 과제에 너무나 충실하게 몸을 움직이기 때문에 그 누구와도 다른 독특한 생활 방식을 만든다. 사냥꾼-나귀로 살아보기도 하다니 말이다! 



곰은 알고 있다 


동화에서 인간과 동식물 사이의 막이 이처럼 얇다는 점은 무엇을 의미할까? 「신기한 푸성귀」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지만 내가 인간일 수도 있고 나귀일 수도 있다는 사실은 ‘나’를 보다 확장된 범위에서 생각해보게끔 한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왜 사냥꾼일까? 사냥꾼은 나귀가 되었다가 사냥꾼이 되었다가 한다. 먹히는 존재가 되었다가 먹는 존재가 되었다가 하는 것이다. 「헨젤과 그레텔」에서부터 시작해서 동화 속 숲에서는 먹고 먹히는 일이 빈번하다. 빨간 망토와 백설공주를 구하는 수호천사로 사냥꾼이 나온다는 것도 주의 깊게 생각해볼 만하다. 동화는 자연을 낭만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여기에서 자연은 충성과 예의와 같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가치가 전혀 힘을 못 쓰는 포식과 피식의 살벌한 장이다. 그림 동화는 바로 그런 자연 안에서 인간과 동식물이 서로 옷을 바꿔 입는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먹은 내가 먹히는 나이며, 먹히는 내가 먹은 나가 된다. 

    

그런데 푸성귀를 먹은 사냥꾼의 예에서도 잘 알 수 있지만 그림 동화는 동물 쪽이 훨씬 더 잘 먹고 잘 산다고 본다. 인간은 굶지만 동물은 굶지 않는다. 인간은 죽지만 동물은 살 길을 안다. 형제의 질투로 눈알을 잃은 사나이가 교수대의 까마귀로부터 새눈을 얻을 방법을 엿듣는 등 말이다. 동화에 따르면 잘 먹고 잘 살려는 인간은 동물의 세계로 들어갔다 나오지 않으면 안 된다. 즉 동물의 관점에서 생명의 이치를 느끼고 실감한 다음 인간 세계로 돌아올 필요가 있다. 

    

이것을 명료하게 보여주는 동화가 두 편 있다. 「악마의 때꼽쟁이 동생」과 「곰가죽 사나이」이다. 여기서는 동물로 짠! 하고 몸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안 씻고 안 깎아서 몸이 바뀐다. 「악마의 때꼽쟁이 동생」에서는 악마를 만난 한 퇴역 병사가 나온다. 그는 먹고살 방도가 없어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숲 속에서 작은 난쟁이를 만난다. 실은 악마였던 그 난쟁이는 병사에게 다음을 요구한다. “내 집에서 하인 노릇을 하겠다면 평생 충분히 먹고 살게 해 주겠다. 칠 년 동안 일을 하고 나면 다시 자유의 몸이 될 거야. 하지만 한 가지. 몸을 씻거나 빗질을 하거나 가위를 몸에 대어서는 안 돼. 손톱도 머리카락도 수염도 잘라서는 안 되고. 눈을 물로 씻어서도 안 돼.” 즉 인간으로서 자신을 다듬지 말라는 말이다. 인간이기를 멈추라는 뜻이다. 

    

그런데 악마의 하인 노릇이란 지옥에서 성질이 사나운 자들이 들어 있는 솥 밑에나 불을 때고, 집 안을 깨끗이 청소하고, 비질한 쓰레기를 문 뒤로 치우고, 곳곳이 정리 정돈 잘 되어 있는가를 살피는 것이다. 악마란 숲이라고 하는 거대한 자연이 적당한 리듬을 갖고 계속 활기 있게 순환하도록 도처의 막힌 기운을 뚫는 존재였던 것이다. 악마의 일이란 숲의 그림자 노동이지만, 숲을 살리는 일이라는 점에서 꼭 악마가 나쁘다고 할 수는 없겠다. 병사는 악마의 하인으로 자연의 활력에 기여하는 보이지 않는 일을 함으로써 평생을 굶지 않게 된다. 그는 이 칠 년 동안의 변신 과정을 통해 자연의 본성을 이해할 기회를 얻고 그러면서 어떤 조건에서든 굶지 않을 수 있게 된다. 그가 나중에 악마에게서 배운 음악으로 왕을 만족시켜서 공주와 결혼하고 왕국을 물려받은 것은 자연의 이치를 깨달은 자만이 더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곰 가죽 사나이」도 비슷하다. 군대에 들어가 총알이 비 오듯 쏟아져도 늘 앞장서서 용감하게 싸운 병사가 있었다. 하지만 느닷없는 평화조약 때문에 제대를 명받아 할 일 없이 떠돌아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 굶어 죽기 직전에 커다란 황야에서 낯선 사내를 만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악마다. 여기서 악마는 “초록색 저고를 입고 상당히 위엄이 있어 보였지만 발은 보기 흉한 말발굽이었다”라고 나온다. 악마는 반인반수의 모습으로 이 제대군인을 찾아왔다. 그리고 병사에게 곰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칠 년 동안 자기 하인이 되면 평생 먹고 살 것을 걱정하지 않게 될 거라는 약속을 한다. 군인은 결국 숲 최고의 포식자인 곰이 된다.  


병사는 저고리를 입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자마자 모든 것이 악마의 말 그대로였다. 그는 곰 가죽을 두르고 즐거운 기분으로 세상으로 나아갔다. 돈 걱정은 조금도 없어 즐길 수 있는 일이면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처음 일 년은 그런대로 봐줄 만했다. 그러나 이 년째 되는 해에는 이미 괴물 같은 모습이었다. 머리카락은 거의 얼굴 전체를 뒤덮었고, 수염은 짐승의 거친 털가죽을 붙여 놓은 것 같았으며, 손가락은 독수리 발톱이었다. 얼굴은 얼마나 때가 덕지덕지 끼었던지 씨를 뿌리면 싹이 틀 것 같았다. 그를 보는 사람은 모두 도망을 쳤다.(「곰 가죽 사나이」, 앞의 책, 543쪽)


곰이 된 사나이는 세상 여기저기를 떠돌면서 할 수 있는 한 착한 일을 했다. 악마는 이 병사에게 만약 당신이 겁쟁이라면 큰 화를 입을 거라고 말했지만, 그는 곰으로서 어디서나 가난한 사람을 돕고 자신이 죽지 않도록 기도해달라고 “부탁했다.” 결국 그는 칠년의 선행 끝에 곰 가죽을 벗고 아름다운 아내를 얻어 행복하게 누리면서 살게 된다. 물론 이 사나이가 곰 가죽을 쓰고 갑자기 용감해지거나 착해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곰이 된 그의 눈에 어째서 유독 가난한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던 것일까? 자연은 참으로 만물을 살리려고 한다. 여기에 중요한 존재, 덜 중요한 존재라는 차별은 있을 수 없다. 곰 사나이는 섬세하고도 친절하게 살기 위해 꿈틀대는 아주 미세한 영역에까지 자기 시선을 두면서 그것들이 살 수 있도록 힘을 보태었다. 숲의 모든 존재를 먹어치울 수 있는 곰에 의해 도처의 가난한 자들이 살아나다니. 포식과 피식의 거대한 순환 속에서 우리는 서로서로를 살린다.    

    

그런데 왜 곰일까? 그림 동화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곰이 동화의 주인공인 이야기가 많다. 테디 베어가 이렇게 인기를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1917년 알프스에 있는 높이 2천 수백 미터에 달하는 바위산 ‘드라헨로흐Drachenloch(용의 이빨)’의 정상 부근의 동굴에서 네안데르탈인이 사용했던 초기의 무스테리안Mousterian 석기와 함께 곰의 두개골과 대퇴골이 발견되었다. 네안데르탈인들은 돌을 짜맞춰서 상자 모양으로 만들어 그 안에 곰의 두개골이나 발뼈 같은 것을 가지런히 수납해 놓았다. 거대한 곰 두개골 입에는 대퇴골 하나가 물려진 채였는데, 두개골 뒤쪽 움푹 파인 곳에 꽂혀 있었으며 그 밑에 발 뼈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고 한다. 종교적인 의례가 치러졌음이 분명한데 곰에 대해서였던 것이다.(나카자와 신이치,『곰에서 왕으로』) 또 지금도 아이누족은 ‘이오만테(곰의 넋 보내기)’ 의식을 행한다. 곰의 두개골을 예쁘게 화장해서 영혼의 세계로 돌려보내는 의식인데, 잔뜩 치장한 곰의 영혼은 자신들이 인간에게 받은 존경을 자랑하게 된다는 것이다. 곰은 대단히 오래전부터 인간에게 중요한 존재였다. 숲 최고의 포식자인 만큼 숲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꿰뚫고 주재할 힘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태고인들 그리고 이 시대의 아이누인들까지 곰의 시선으로 자연의 섭리를 이해해야지만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호혜 속의 나


변신과 저주의 문제도 다시 생각해볼 만하다. 곰가죽을 써야 했던 퇴역병사, 까마귀가 되고 사슴이 된 자들은 어떻게 해서 원래 모습을 되찾는가? 그들은 반드시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여기에는 자신의 맨손으로 가시옷을 짓는 여동생(심지어 오빠와 아무런 추억도 없는, 어릴 때 헤어진)과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저주에 걸린 사람을 도와주게 된 누군가의 손길이 작용한다. 저주에 걸리는 것도 내 뜻과는 무관한데, 저주를 푸는 일은 더 복잡하다. 저주는 저주를 거는 사람이나 저주에 걸린 사람이 아니라 ‘뜻밖의 사람’에 의해 풀리기 때문이다. 「개구리 왕자」에 나오는 공주를 떠올려 보자, 공주는 황금 공을 주어준 개구리랑 결혼할 마음이 눈꼽만큼도 없었다. 공주는 자꾸 달려드는 개구리가 귀찮아 발로 뻥 찼는데 그만 개구리의 마법을 풀어주게 된다.

    



동화의 ‘저주’는 우리가 근본적으로 타인에게 의탁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일깨운다. 그것을 물론 저주이다. 왜냐하면 나를 도와줄 수 있을만한 타인이 따로 없기 때문이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저 비둘기가 저주에 걸린 왕자인지, 운 나쁜 악마인지, 혹은 그냥 비둘기인지 구별할 수 없기 때문에 저주에 걸린 쪽도 저주 앞에 놓인 쪽도 난감하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기 때문에 매순간 위험하다.  

    

그래서 방법은 하나다. 내 운명을 구해줄 자가 타인이라는 점을 선명하게 의식하기. 더 나아가 그 타인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분별을 말기! 일단 저주를 풀기 위해서는 자기 앞에 닥친 타인의 곤란을 계산 없이 도와주어야 한다. 동화 속에서 불행에 처한 주인공들 앞에 갑자기 구원의 손길이 나타나는 일은 왜 그렇게 많은 걸까? 숲의 법칙이 서로를 도우라고 하기 때문이다. 우선은 타인을 구해야, 그 다음에 내 살길이 열린다고 하는 법칙!     

    

「숲 속의 노파」도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여기서는 굶어 죽게 된 소녀가 비둘기의 도움을 받아 안전한 침대와 따뜻한 먹거리를 구하게 된다. 그런 어느 날이 지속되야지만 비둘기는 슬며시 자기를 좀 도와달라고 말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소녀는 ‘숲 속 노파의 집에 가서 새장을 빼앗고 그 안에서 별로 대단치 않아 보이는 반지를 꺼내 가지고 와야 한다’는 비둘기의 미션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묻지 않고 비둘기를 돕는다. 상대가 처한 곤경을 자기 식으로 재단하지 않고, 무조건 그 입장에 서서 그가 원하는 바를 대신 해주는 것이다. 서로 완전히 다른 처지에 있으면서, 그 다른 처지를 이러니저러니 내 식으로 평가하지 않고 무조건 돕는 것. 그런 노력과 함께 비둘기는 저주를 풀고 왕자로 되돌아온다.  

    

숲을 공유하는 인간과 곰, 인간과 비둘기는 각자 처한 문제 상황이 다를 수밖에 없다. 때로는 인간과 곰이 서로를 먹는다. 동화는 그런 비정한 포식관계 안에서 숲 전체의 먹이고 살림을 생각하라고 말한다. 내가 먹음으로써 그가 죽고, 내가 죽음으로써 그가 산다. 나를 다른 자리에 두는 것이 동화의 변신이고 동화의 저주이다. 하지만 그 저주를 풀 때 즉 내가 바로 그런 숲의 일원임을 강력하게 의식할 때, 나는 더욱 더 강하고 생명력 넘치는 존재가 된다. 나의 개성, 나의 직업, 나의 꿈. 이 모두가 ‘다른 삶’에 절대적으로 의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가면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를 생각해야 한다.  


글_오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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