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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인류학

'동화인류학'이란 무엇인가? 동화, 인류 최고(最古)의 웃음

by 북드라망 2020. 12. 21.

'동화인류학'이란 무엇인가?

동화, 인류 최고(最古)의 웃음 



동화에는 법칙이 있다 


동화인류학. 나는 내 공부의 학명을 이렇게 정의한다. 동화로 인류를 연구하기! ‘인류’라고 하면 거창한 것 같지만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상에 출현한 이래 늘 먹고 살 것을 고민했던 바로 그 존재를 말한다. 동화와 같은 구전문학을 다루는 민속학에 ‘동화인류학’이라는 분과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혹은 인류학과에서 「백설공주」나 「흥부와 놀부」를 다루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어린 시절에도 읽고, 엄마가 된 지금도 읽고 있는 이 옛이야기에서 나날의 일상을 관통하는 고래(古來)의 법칙과 만물에 대한 지극한 감수성을 발견한다. 오늘은 여러분께 어떻게 ‘동화인류학’이라는 주제와 만나게 되었는지 그 질문의 여정을 말씀드리고 싶다.  

 



아이들이 자라기 시작하면서 낮이나 잠자기 전에 동화책을 읽어주게 되었다. 옛날에도 물론 좋아했지만 새롭게 만나게 된 여러 공주님들과 왕자님들이 참, 한결같으셔서 좋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그림 형제의 동화책을 많이 읽게 되었다. 워낙 유명한 까닭이다(그런데 왜 이렇게 유명할까?) 그런데 읽고 또 읽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동화에는 어떤 법칙이 작동한다! 

 

예를 들어 보자. 먼저 공간 설정부터 살펴보면 사건이 늘 숲속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백설공주도 숲으로 들어가고 빨간 모자도 숲으로 들어간다. 물론 그림 형제가 동화를 채취한 프랑크푸르트 근처의 마을 하나우에서부터 카젤, 괴텡겐, 브레멘까지 이르는 그 동네가 숲이 울창해서였을 수도 있다. 그런데 동화가 꼭 이런 구체적 지역성을 강조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 숲이란 곳은 마법사와 악마, 난쟁이와 사냥꾼이 득시글거리는 현실 공간 바깥처럼 그려지기 때문이다.   

    

시간은 또 어떤가. 이야기는 ‘갑자기’ 시작한다. 물론 끝은 늘 해피앤딩이다. 그런데 이런 시점과 종점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길을 잃고, 마법에 걸리고, 괴물과 싸우는 등 그 자체는 출발점과 도착점과 아무런 인과를 이루지 않는다. 다시 말해 사건들은 시간 순서로 전개되지도 않고, 기승전결과 같은 인과를 따르지도 않는다. 빨래했다가, 과자를 구웠다가, 노래를 불렀다가, 하는 식으로 각자 상관없는 사건들이 무차별적으로 이어 붙어 있다가, 갑자기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라는 뜬금없는 말과 함께 중단될 뿐이다. 잘 생각해보자. 백설공주가 정말 왕자를 만나기 위해 계모에게서 쫓겨나고, 난쟁이 집에서 가사 노동에 땀 흘리고, 독-사과를 먹으며 죽을 위기를 넘겨야 했을까? 무엇보다 동화는 현재라고 하는 시점을 넘어서 있다. 그림 동화가 가장 많이 다루는 사건은 죽음과 관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동화는 현실 시간 바깥을 다룬다. 

    

나온 김에 인물들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 동화의 주인공들은 대개 별 볼일 없는 존재들이다. 아예 아주 작거나(『엄지공주』) 부모가 없어 갑자기 고아가 되거나, 부모가 있지만 막내인 탓에 얻어먹을 것이 별로 없거나. 공주도 공주 신분으로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가 없다. 뿐만 아니다 인간 아닌 존재들도 참으로 사소하고 보잘 것 없다. 지푸라기와 숯 같은 사물, 노간주나무나 완두콩과 같은 식물, 개와 닭, 나귀와 고양이, 물고기 같은 동물들 말이다. 인간만 등장하는 동화는 없다. 악마와 마녀, 특히 그림동화는 사도 바울과 하느님까지도 등장시킨다. 동화는 온 세상, 만물을 이야기 속 주인공으로 캐스팅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작은 것들과 별볼일 없는 것들이 ‘함께’ 길을 걸어간다는 점이다. 동화는 근대 소설처럼, 마담 보바리라든가, 안나 까레리나처럼 인물 개개인의 개성을 강조하는 대신에 이 미미한 것들의 연합을 그리기를 더 좋아한다. 이 연합이 어떤 모습이겠는가? 성별 차이는 차라리 사소한 차이가 된다. 브레멘 음악대를 생각해보자. 늙은 개와 나귀와 닭이 함께 도둑을 물리쳐야 한다. 이들의 종적 차이는 함께 살기에 상식을 초월한 지혜를 만들어낸다. 

    

나는 이런 동화의 여러 법칙들을 종합했을 때 단 하나의 단어가 떠오른다. 바로 연결이다. 동화에서는 가장 높은 (고귀한) 곳과 가장 낮은(비천한) 곳이 맞붙어 버리고(「백설공주」,「재투성이 아센푸텔」등의 공주이야기), 살아 있음이 죽어 있음과 맞붙는다(「헨젤과 그레텔」,「트루데 부인」등). 인간이 새의 세계와 접속하고(「일곱마리 까마귀」,「오누이」), 개구리가 공의 세계와 연결된다(「개구리 왕자」). 동화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영역들을 계속 이으면서 사건을 확장해가고, 그럼으로써 주인공들에게 매번 다른 삶을 준다. 그리고 이 삶들은 모두 우리의 현실적 통념이 작동하는 ‘지금, 여기’의 바깥을 다룬다. 결론짓자면 동화는 인간의 상식 너머로, 계속 자기 삶의 영역을 확장하는 기술을 다루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동화는 선악의 저편을 다룬다. 정말이지 사회의 도덕률에 아무 관심이 없어 보인다. 물론 그림 동화에서 계모와 마녀 등 악인들은 벌을 받는다. 힘없고 약한 셋째 아들이 늘 백성을 도와 왕이 된다. 표면적으로 동화는 분명 착한 일을 하면서 남을 도우라고 한다. 그런데 딱 한 걸음만 더 들어가 보면 상황은 완전히 다르게 펼쳐진다. 동화는 실제로는 착한 일에 아무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 어떤 괴물도 악마도 회개하지 않는다. 그 어떤 탐욕도, 실수도, 거짓도 반성되지 않는다. 심지어 터무니없는 욕심으로 결국 애써 얻은 금은보화를 다 잃게 되는 어부의 아내조차 자기 허영에 후회를 모른다(동화의 금기 중에 이런 것이 있다. ‘뒤 돌아 보지 마라!’ 하쿠도 센에게 경고하지 않던가. 다시 치히로의 세계로 되돌아간다면 절대로 뒤돌아보지 말라고(『센과 치히로의 모험』)). 그림동화가 채록되던 것이 19세기 초엽인데, 그 당시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가끔 하느님도 출현하지만 완전히 조연이시다.  

    

까마귀로 변한 오빠를 돕는 착한 여동생도 있지 않느냐고? 물론 그녀가 속으로는 우애를 위해 손가락이 피투성이가 되는 것을 감내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화는 이 여동생이 왜 부모님을 버리고 오빠를 선택하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다르게 설명을 해보겠다. 동화는 효와 우애라는 두 가지 가치 중에서 왜 우애에 방점이 찍히는지에 관해서 관심이 없는 것이다. 백설공주가 착해서 상을 받는다고 할 수 있을까? 그녀의 덕은 무엇인가? 집안일을 잘하는 것뿐이다. 재투성이 아가씨는 정말 계모와 이복 언니를 위해 집안일을 도맡아 했을까? 그저 먹고 살려니 할 수밖에 없었을 뿐이다. 냉정하게 읽자면 동화는 인간적 삶의 선한 가치들에 관해 따지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동화가 선악에 관심이 없다는 것은 이야기가 소위 주체에 관심이 없다는 점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동화란 오랫동안 구전된 민간의 이야기이다. 따라서 창작자가 따로 없어서 이야기 안에서 누가 말하는지가 불분명하다, ‘누가’ 뭘 말했는가 따위는 정말 안 중요하다. 그래서 근대 소설의 화자처럼 자기가 누구인지를 밝히지 않으면서 객관적으로 사건을 전달하는 것 같으면서도, 끝에서 가끔씩 빼꼼 얼굴을 내밀고는 자기도 이 이야기가 정말 재미있다는 둥 개인적인 감상을 말하고 대책 없이 이야기 바깥으로 사라진다. 「영리한 엘제」의 엘제는 자기가 누구냐고 동네방네 묻고 다닌다. “내가 나인가?” 그녀는 이렇게 혼자 되물으면서 온 숲을 돌아다닌다. 이렇듯 나의 욕구, 나의 재능, 나의 기억 이런 것에 집착하는 주인공은 없다. 나라고 하는 정체성을 고집하지 않기에, 주인공들은 조실부모하고 팔다리가 찢기면서도 남 탓하지 않고 그저 살 길을 찾는다. 나쁜 놈이 반성하지 않는 것도 ‘자기’라고 하는 죄의식을 담을 그릇이 없어서다. 때문에 처지가 반듯하건 구겨져 있건, 제 재주가 있건 없건 간에 동화 속 존재들의 과거에 끄달리지도 않고 미래 때문에 초조해하지도 않으면서 유쾌하다. 그래서 모든 이야기가 웃음으로 마무리된다. 

    


이야기는 알고자 한다 

 



그림 동화의 법칙은 그림 동화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위의 법칙은 구연되는 조건에 따라 조금씩 변용되지만 광범위한 지역의 옛이야기들을 관통한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에서는 숲 대신에 언덕이 나오고 용 대신에 호랑이가 나오지만, 산에서 벌어지는 일이 마을의 습속을 넘어서 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시간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옛이야기도 저승이라든가 하늘 위로 올라가는 모험을 즐겨 다룬다. 주인공들의 경우도 그렇다. 그림동화에 「지푸라기와 숯과 완두콩」같은 자연계 어벤져스가 있다면, 여기에는 「팥죽 할머니와 호랑이」이야기가 있다. 호랑이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할머니를 구하기 위해 가래떡과 화로와 부지깽이가 출현하거든. 이처럼 전 세계 동화들에서 나타나는 테마나 구조의 유사성에 관한 연구는 아마 대단히 많을 것이다. 

    

게다가 이 법칙들은 화석화된 게임의 룰이 아니다. 요즘도 이런 규칙은 소설이나 게임, 또는 영화를 만드는 기본 원리로 작동한다. 오쓰카 에이지(大塚英志)라고 하는 일본의 서브컬처 문화 연구가가 현대의 게임이나 만화 등을 분석해서 이야기의 구성 문법을 정리한 것이 있다(오쓰카 에이지,『스토리 메이커』,『캐릭터 메이커』,『이야기 체조』등). 오쓰카 에이지에 따르면 대중이 강력하게 원하는 이야기의 문법은 신화 속 영웅의 일대기와 같다고 한다. 오쓰카 에이지가 참고하고 있는 것은 인류의 여러 신화를 몇 가지 원형으로 정리했던 제임스 프레이저(James George Frazer; 1854~1941)의 『황금가지』(The Golden Bough: A Study in Comparative Religion, 1890)와 인류의 민담을 영웅의 고귀한 출생, 불행한 추락, 조력자와 방해자의 등장, 모험의 완수, 왕의 귀환과 같은 몇 가지 형태로 정리한 블라디미르 프로프(Владимир Пропп; 1895~1970)의 『민담형태론』(Морфология сказки; 1928)이다.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포터』와 같은 환상적인 이야기들을 지탱하는 것은 여전히 낯선 공간에서 자기가 아닌 존재들과 협업하여 문제를 해결한다는 구조이다. 이들 이야기가 인기가 있는 것은 분명 우리가 옛날 동화에서처럼 ‘현실 바깥’을 보고 느끼고 싶은 욕망을 참지 못하는 까닭이다. 물론 이들 현대의 판타지가 때로는 강력한 가족주의나 국가주의와 결탁할 때도 있지만 사람들을 이 이야기로 계속 초대하는 힘은 그런 상식적인 도덕관만은 아닐 것이다. 오쓰카 에이지는 무라카미 하루키와 미야자키 하야오의 서사를 분석하기도 했는데(『이야기론으로 읽는 무라키마 하루키와 미야자키 하야오』), 오늘날 대중이 욕망하는 이야기들도 결국은 동화의 법칙들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이야기들은 다음과 같은 진리를 포기하지 못한다.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반드시 집을 떠나, 남 때문에 죽을 만큼 고생을 한 뒤, 겨우겨우 살아갈 방도 하나를 깨달은 뒤 돌아오는 운명뿐이라고. 

    

동화에서 추출할 수 있는 법칙들이 동서고금의 온 이야기들을 관통하다니. 도대체 동화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사실 ‘동화’라는 말은 그림 형제가 19세기 초엽에 북독일 지역의 민담들을 채취하고 글로 옮겨 편찬하면서 붙인 이름이다. 그림 형제는 ‘메르헨’이라고 했는데, 아이들과 가정을 위한 이야기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하지만 형제가 수집한 민담은 정말이지 몇 백 년도 넘게 그 지방에서 이 집, 저 골목, 또한 그 들판에서 끊임없이 향유되던 옛이야기였다. 따라서 이들 옛이야기의 기원은 한없이 올라간다. 어디까지? 바로 최초로 출현한 호모 사피엔스까지! 

    

인류학자와 고생물학자 등의 연구에 따르면 호모 사피엔스 이전에 지구상에 존재했던 호모 헬메이 같은 직계조상이나 네안데르탈인과 같은 친척 등은 특별한 발성기술 같은 것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이들에게서도 영적 특이성은 발견된다. 네안데르탈인들은 무덤을 만들어 매장을 했으므로 사후에 대해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또 대뇌의 용량이 호모 사피엔스보다 훨씬 더 컸는데, 그들의 뇌는 언어적 인식의 부분, 사회적 인식의 부분, 동식물에 대한 박물학적 부분으로 특화되어 발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뇌 속에서 서로 다른 인식 영역을 연결시켜 자유자재로 움직이게 하는 뉴런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호모 사피엔스의 가장 큰 특징은 인지유동성이다(스티븐 미슨,『노래하는 네안데르탈인』(뿌리와 이파리) 참고). 호모 사피엔스와 함께 특정한 목적에 할당된 인지 영역들을 넘나들며 각각의 정보를 통합하는 능력이 출현했다. 덕분에 사람은 사람이고 개구리는 개구리다, 라고 구별해서 생각했던 네안데르탈인들과 달리 ‘개구리의 모습을 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가능해졌다. 동화는 이처럼 상이한 이미지들과 상황을 연결시키는 호모 사피엔스의 원초적 연상습관이 증폭되는 이야기의 장인 것이다. 

    

문제는 ‘법칙’이다. 호모 사피엔스의 유동적 지성은 왜 인간과 동물, 생물과 무생물, 하늘 너머와 땅 속 등으로 사방 뻗어나가지 않고 특정한 이야기의 논리 법칙을 도출하는 데 힘을 쏟았던 것인가? 여러 이야기가 특정한 사고 패턴을 반복적으로 쓴다는 것은 그 논리로 이해해야 하는 대상이 있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가 ‘red’를 ‘빨강’으로 번역하려면 ‘red’가 속한 언어의 규칙과 ‘빨강’이 속한 언어의 규칙을 동시에 알아야만 한다. 각 문화는 붉음의 농담과 채도를 다 다르게 이해한다. 개별 문화가 붉음을 어떻게 해석하는가는 그 문화 전체가 색체를 어떤 식으로 분류하고 활용하는지를 전반적으로 고찰할 때에만 파악될 수 있다. 위도가 높은 아메리카 북서해안, 콰키우틀 족의 ‘red’와 적도 가까이에 있는 태평양의 마우이 족의 ‘red’는 다르다. 설령 노을을 보고 똑같이 빨갛다고 하더라도, 그 붉음에 대한 감각 인상이 같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설산과 대비되는 붉음과 대양과 대비되는 붉음이 어떻게 같을랴. 사물과 사건을 출현시키는 논리를 이해해야 그 대상을 내 의식 안으로 옮겨볼 수 있다. 그런 논리화가 없다면 대상에 대한 이해란 불가능하다. 동화에서 반복적으로 발견되는 논리가 있다는 것은 인류가 이해하고자 하는 어떤 공통의 대상이 있음을 의미한다. 동화를 추동한 것은 앎에의 의지였다. 



대칭성을 회복시키는 야생의 사고 


그럼 인간은 동화를 통해 무엇을 알아 보려고 했을까? 인류 최초의 서사시 『길가메쉬 서사시』를 한번 살펴보자. 길가메쉬 서사시는 기원전 3000년 무렵 수메르인들의 옛이야기였다. 단군 신화처럼 이 땅을 낳고 기른, 위대한 최초의 조상에 대한 찬미가이다. 이 이야기에서도 기본적으로는 동화의 문법을 확인할 수 있다. 주인공 길가메쉬는 반인반신으로서 인간계와 신계를 연결한다. 그는 왕국의 모든 사람을 끔찍한 생활고로 몰아넣었지만 모험을 통해 모두를 복되게 하는 영웅이 된다. 넓이를 가늠할 수 없는 삼나무 숲에도 갔다가, 깊이를 알 수 없는 저승 바다에도 갔다가. 길가메쉬는 계속해서 극단적으로 다른 시공간들을 주파한다. 

    

길가메쉬가 온 세상을 바삐 돌아다니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그에게는 두 가지 욕망이 있다. 첫 번째 것은 생명의 나라에 이르고 싶다! 두 번째는 죽음을 극복하고 싶다! 길가메쉬 전설은 기록된 인류 최초의 서사시에 불과하다. 아마 신석기 시대를 통과하고 있던 많은 인간 집단들 사이에는 이보다 더 다채로운 모험담이 유행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관심도 길가메쉬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으리라. 물론 지금 우리 시대도 마찬가지다. 인류의 원초적 관심은 잘 살고 잘 죽는 것에 있다. 자, 그렇다면 이야기를 관통하는 법칙들은 잘 살고 잘 죽는 길을 모색하는 생각 패턴을 이루는 셈이다. 동화는 ‘연결’을 강조하고 있으니, 잘 살고 잘 죽는 최고의 방법이 바로 ‘연결’이 된다. 연결이라니? 무엇과? 어떻게? 

    



동화를 재미있게 읽던 무렵 나는 백제의 고도(古都)로 짧은 여행을 하게 되었다. 공주의 공산성에도 올라가 보고, 송산리 고분군의 무령왕릉 터에도 가 보았다. 그러다가 공주가 내려다보이는 강어귀에서 고마나루(곰 나루) 전설에 관해 듣게 되었다. 옛날에, 아마 신석기 시대가 아닌가 싶은데, 지금 공주 땅에는 곰이 많이 살았나 보다. 어느 날 암곰 하나가 금강 건너편에 사는 인간 남자를 몹시 사랑하게 되었다. 어찌어찌 사나이를 유혹하여 자기 동굴에 데리고 온 암곰은 남자에게 아이 셋 나을 때까지만 같이 살자고 한다(이 이야기에서 선녀와 나무꾼의 역할 바꾸기가 일어나고 있다). 아이 둘 낳고 알콩달콩 잘 살고 있을 무렵 남자가 어머니 뵈러 잠깐 다녀와야겠다고 하자, 암곰은 자식도 있으니 금방 돌아올 줄 알고 남편을 보내주었다. 하지만 결국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이후로 오래오래 암곰은 아기 곰들을 데리고 강나루에서 하염없이 남편을 기다렸다.   

    

이 이야기는 무엇을 이해하려 하는가? 암곰과 인간의 관계다. 그런데 정말 재미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인간이 아니라 암곰 아닌가? 암곰과 인간의 관계가 궁금한 것은 인간일 텐데도 말이다. 이 이야기가 노리는 효과는 금방 이해할 수 있다. 고마나루 전설을 만들었던 인간은 인근에 자주 출몰하는 곰들에게 ‘실은 내가 네 남편이다, 동네 사람들은 다 네 시댁 식구들이다’ 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러니 거칠게 헤치지 말라고. 이야기의 파장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이 이야기 덕분에 인간도 곰을 함부로 잡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곰은 나의 아내이고, 저 어린 곰들은 나의 새끼이니까. 인간과 곰은 결혼을 통해 서로를 깊이 이해하는 사이가 되었다. 이렇게 고마나루 전설은 짐승과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공생의 윤리를 고민했다. 

    

얼마나 곰이 많이 출현했고 그 긴장관계가 살벌했으면 이런 이야기까지 만든 것일까? 그런데 한편으로 이 이야기에서는 자연과 맞짱 뜨고 있는, 어마무시한 말의 힘도 느껴진다. 옛사람들은 그저 말일 뿐인 이야기를 통해 곰이라고 하는 자연의 압도적 폭력성을 길들이려고 했다. 그들은 말의 그물 안으로 야수를 데리고 들어옴으로써 곰의 욕망을 이해 가능한 것으로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곰과 인간 사이에 가로놓인 종(種)의 장벽마저 뛰어넘었다. 

    

더 놀라운 점은 마지막 결론이다. 곰-아내와 인간-남편은 짧은 행복을 뒤로 하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다. 고마나루 전설은 곰과 인간의 경계를 무너뜨리지는 않는다. 전설은 곰이 인간을 먹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간도 곰을 잡아서 목숨을 연명해야 한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이야기는 이 엄중한 생명 간의 투쟁을 인정했다. 서로가 각기 다른 욕망을 지닌 존재임을 존중했다. 고마나루 전설은 자연과 인간 사이의 비대칭을 이야기를 통해 대칭적 관계로 바꾸어 낸다. 전설 안에서 인간은 곰보다 우월하지도 않고 열등하지도 않다. 남녀의 역할이 다르듯, 자연 안에서 각자 차지하는 위치가 다를 뿐이다. 전설은 강조했던 것이다. 너(곰)의 자리가 확보되어야 나(인간)의 자리도 마련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때로 서로를 죽이거나 살리지만, 각자 잘 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해야 한다는 것을. 

    

고마나루 전설은 아름다운 동화다. 곰과 인간의 차이를 금강이라고 하는 도도한 강물을 통해 응축해서 표현한다. 공주를 가로지르는 이 현실의 강은 존재하는 것들의 차이를 보존해주는 훌륭한 상징이 된다. 고마나루 전설과 함께 금강이 얼마나 넉넉하고 아름다워 보이던지. 공주는 곰주다. 웅진(熊津; 곰 나루터)이라는 옛 이름을 가진 도시다. 지금도 공주는 도처에 귀여운 곰 조형물이 있어 인정 많은 도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목숨을 위협하던 적을 도시의 수호 영물로 만드는 힘, 이것이 동화의 능력이다.     

   

『길가메쉬 서사시』도 연결의 문제를 고민한다. 영웅이 등장하는 탓에 스케일 크게도 그것은 생과 사의 연결이 된다. 길가메쉬는 삼나무 숲을 정복하고, 오만하게도 생식을 거부한다. 덕분에 벌을 받아 영혼의 벗이자 생의 무기인 흙의 인간 엔키두를 잃어버리고 삶의 허무를 맛보게 된다. 길가메쉬는 무릎을 꿇고 흐느낀다. ‘숲을 정복했건만 나도 죽음은 못 피하는구나……’ 하면서 말이다. 죽음의 입구에 도착한 길가메쉬는 깨달음 하나를 얻는다. 우투나피쉬팀이라는 영생자(永生者)를 만났기 때문이다. 왜 하필 그 사람일까? 우투나피쉬팀은 대홍수 때 방주를 지어 많은 동식물을 살렸다. 그는 대홍수라는 큰 죽음에 맞서 온 생명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던진 최후의 인간이었다. 길가메쉬는 인간과 죽음 사이의 비대칭적 관계는, 죽음이 갖는 저 무거운 허무를 생기로운 삶의 활기를 통해 균형을 맞춤으로써 해소된다는 것을 알고 왕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여기서 길가메쉬가 전사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점도 놓칠 수 없다. 인류는 스스로를 죽음이라고 하는 근원적 무지에 맞서기 위해 이야기로 무장한 전사로 이해했다. 또 다른 이야기꾼 하나가 떠오른다. 바로 천일야화를 노래한 셰에라자드다. 고대 페르시아 지방의 민담집이기도 한 『천일야화』는 매일 밤 왕국의 처녀를 잡아먹는 술탄에 맞서기 위해 그에게 밤마다 옛이야기를 해주면서 죽음의 거센 파도를 막는 셰에라자드의 모험담이다. 그녀는 정말로 이야기로 죽음과 대결한다. 그렇게 천일 동안 왕에게 이야기를 하면서 왕자를 낳고 백성을 살리는 기적을 이룬다. 

   

천일동안 이어진 이야기집의 제목에 왜 천일 하고도 하루가 더 붙은 것일까? 죽음과의 대결에 성공한 생명은 들어보지 못했다. 따라서 이 전투는 이야기하는 쪽에서 반드시 패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천일야화’라는 제목을 붙인 고대 사람들은 인간은 죽어도 이야기라는 것은 끝이 없다는 점을 그 ‘하루’를 덧붙임으로써 강조했다. 이처럼 이야기는 죽음과 대결하는 최초의 무기였다. 아마 최후의 무기도 되지 않을까? 



작은 존재의 큰 웃음


동서고금의 모든 이야기에는 어느 정도 비슷한 패턴이 있고, 그것들이 모두 공생의 윤리를 사고한다면 꼭 『그림 동화』가 아니어도 되지 않을까? 차라리 고대의 서사시나 그리스 로마 신화 등을 읽어도 될 텐데, 나는 왜 지금 그림 동화를 읽는가?  

    

하하하. 물론 인류고금의 온갖 이야기들을 찾아서 읽을 계획이 다 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동화에 주목하는 이유는 신들이 나와서 초능력을 발휘하는 그리스 로마 신화나, 영웅이 나와서 세계를 휘어잡으려고 하는 서사시, 여우와 두루미가 나와서 원칙이나 도덕을 강조하는 우화보다 동화가 웃기기 때문이다. 왜 웃기는가? 그것은 동화의 형식이 만드는 웃음이다. 동화는 끝을 모르는 채 사건을 이어 가면서 앞에서 벌어진 일의 의미 따위는 가차 없이 차 버리고 딴 사건에 돌입하기를 좋아한다. 백설공주는 자신을 완벽하게 보호해주던 난쟁이의 집도 갑갑하다며 ‘마녀의 사과라도 좋아!’ 하고는 바깥으로 탈출한다. 금은보화를 다 얻은 소년은 ‘그렇다면 이제 세상 구경을 좀 해봐야지’ 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길을 나선다. 동화 속 존재들의 걸음걸음은 의무의 중력에 시달리지도 않고, 목적의 자력에 끌려 다니지도 않아 경쾌하다.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결국은 은근히 웃음 짓게 하는데, 그것은 중요해 보이는 모든 일로부터 우리를 떨어뜨려 놓기 때문이다.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보겠다. 동화는 신화나 서사시처럼 시작과 끝이 완전한 모습으로 갖추어 있지 않다. 또 우화처럼 단발적인 교훈에 집중하느라 단순한 사건을 제공하는 것에 그치지도 않는다. 동화의 가장 큰 특징은 어쩌다 시작해서 급히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마무리된다는 점인데, 이야기 안으로 들어가 보면 실은 얼마든지 사건들이 확장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동화 속에는 각자의 공주와 왕자를 구하기 위해 미션을 치러야 하는 상황이 많이 나온다. 대표적인 것으로 「세 개의 황금 머리카락을 가진 악마」이야기가 있다. 태어날 때 양막을 뒤집어쓰고 나온 불구 아이가 공주와 결혼하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소년은 왕의 속임수에 빠져 강물에 빠져 죽을 뻔하기도 하고, 지옥에 가서 악마의 머리카락을 가져와야 되기도 한다. 그 와중에 광장의 샘은 왜 말랐는지, 황금 사과가 열리는 나무가 왜 열매 맺기를 멈추었는지, 뱃사공은 왜 강을 떠날 수 없는지 같은 온갖 문제들을 해결해야 하는 미션을 받는다. 이 동화를 따라가다보면 공주를 만나는 일보다 소년이 치러야 할 미션의 종류를 자랑하려고 지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든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자. 이 많은 미션들이 서로 무슨 관계가 있는가? 황금 사과를 열리게 할 수 있다고 해서 뱃사공을 구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각각의 미션은 사실 서로 아무런 상관이 없다. 우리의 옛 이야기 『바리데기』도 떠오른다. 바리데기는 아버지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드넓은 밭을 가느라 삼 년, 검은 빨래는 희게, 흰 빨래는 검게 하느라 삼 년을 보내야 했다. 밭을 잘 간다고 해서 빨래를 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밭가는 습관을 빨리 버려야 빨래를 더 잘하게 될지도 모른다. 수준별 단계별 학습에 익숙한 우리와는 전혀 다른 성숙의 논리라고나 할까. 자신이 얼마나 많은, 매번이 다른, 그런 삶을 살 수 있는지를 증명해야만 한다는 듯 동화 속 주인공들은 길모퉁이 도는 일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더 많은 문턱을, 매번 다른 방식으로 넘는 주인공만이 유명한 동화의 주인공으로 널리 이름을 날리게 된다. 백설공주도, 바리데기도 그래서 살아남는다.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진리? 그런 무거운 것을 들고 돌아다니다가는 멋지고 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없거든! 

    

형식이 확장적이라는 점 말고도 동화 속 주인공들은 실제로 많이 웃는다. 할머니의 아궁이 옆에서 겨우 살아난 지푸라기와 숯과 완두콩은 개울가에 이르러 큰 봉변을 당하게 된다. 건너갈 길을 찾다가 지푸라기가 다리처럼 개울의 양쪽으로 길게 누웠는데, 성질 급한 숯이 으쓱 발을 내딛다가 그만 지푸라기가 타고 숯도 물에 떨어지고 만다. 그런데 조심스럽게 개울가에 남아 있던 완두콩이 큰 소리로 웃는 것이다. 세상에, 동고동락(同苦同樂)한 친구들이 빠져 죽는 것을 보고 웃는 배신자 완두콩이라니. 아니, 얘는 왜 이렇게 크게 웃는 것일까? 어머나, 어쩌면 이 작은 완두콩은 삶을 통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현대 중국의 작가 위화가 쓴 『인생』이라는 소설이 있다. 푸구이라고 하는 신산한 삶의 주인공은, 노름빚으로 집 말아먹고 아버지 똥통에 미끄러져서 돌아가시게 한 것을 시작으로 전쟁 통에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간신히 살아 와서는 심한 헌혈로 아들이 죽고 가난으로 아내가 죽고 출산으로 딸이 죽고 운송사고로 사위가 죽고 굶다가 많이 먹은 콩으로 손자가 죽는 등 줄줄이 이어지는 죽음을 겪는다. 푸구이는 평생 근근이 먹고 살며,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잃는 고비를 넘는다. 그런데도 끝에는 자신의 삶을 노래한다. 작가 위화는 여기에 대해 다른 설명은 남기고 있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알 수 있다. 너무나 힘든 이 삶이 푸구이에게 인생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가르침을 주었다는 것을. 푸구이는 좋은 일, 나쁜 일을 판단하기에 급급하지 않았다. 도덕적인 판단을 내려놓고 일체의 사건들을 이해했기에 고통스런 과거를 음미하면서도 여유를 갖고 인생을 찬미할 수 있었다. 

    

동화는 푸구이의 경우처럼 완두콩이 어떻게 운명애를 깨우치는지를 자세히 묘사하지 않는다. 그저 콩 한 알이 크게 웃었다고만 한다. 그래서 더욱 놀랍다. 완두콩 하나가 생사의 모순과 필연을 통찰하는 장면을 단 한 줄로 압축할 수 있다니! 나는 지켜야 할 그 어떤 최후의 도덕률도 없기에, 만물의 운명이 갖는 온갖 모순을 두려워하지 않기에, 동화가 좋다. 동화는 인간이 돌아다닐 수 있는 세계가 한없이 넓다는 것을, 그 안에서 잘 살아보기 위한 삶의 길이 참으로 다채롭다는 것을 깊이깊이 이해한다. 그래서 읽을 때마다 입가에 미소가 끊이지 않는다. 

    


엄마는 인류학자 


한 아이의 엄마, 내 자식 잘 키우기 위해 온갖 정력과 지력을 다 쏟는 멋진 육아의 화신. 나도 그런 꿈을 꾼다. 그런데 모성의 심벌이 되고 싶어서 매일같이 읽는 동화는 좀 다른 메시지를 준다. 엄마가 아니라 숲이 아이를 기른다고. 숲은 만물의 관계 즉 윤리가 창발되는 장소라고. 잘 자란다는 것은, 다시 말해 잘 산다는 것은 그 숲의 이치를 깨닫는 데에 달려 있다고. 동화는 훌륭한 엄마(그게 무엇이든지 간에)가 되고 싶은 이 욕망을 펼치기 위해서라도 내 새끼 말고 집 바깥을 주시하라고 한다. 

   

개구리 왕자와 인간 공주는 어떻게 행복할 수 있었을까? 동화는 코로나와 같은 인수공통 감염병이 창궐하기 훨씬 전부터 사람과 양서류의 교합과 공존을 고민했다. 동화는 선한 자는 상 받고, 악한 자는 벌 받는 단순한 도덕법칙의 저장고가 아니다. 정말 이 점은 거듭 강조하고 싶다. 동화는 성적 차이, 연령의 차이 같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구별 기준을 초월해서 사고한다. 동화의 최고 화두는 종적 차이를 넘어선 만물의 교통, 만사의 연결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화는 가장 멀고 낯선 세계 즉 죽음과의 관계를 고민하는 일에 그렇게나 힘을 썼던 것이다.  

    

나는 왜 둥순이와 둥자에게 동화를 읽히려고 했던 것일까? 내 무의식이 스마트 기기가 연결시켜주는 온갖 웹페이지들보다 더 넓고 깊은 곳으로 아이를 내보내야 한다고 명령했기 때문은 아닐까? 나는 수술실에서 아이를 낳고 산후조리원에서 육아법을 익히며 엄마로서 첫발을 내딛었지만, 정말 배워야 할 것은 옛이야기 속에 있음을 강력하게 느꼈던 것이다.   


글_오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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