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루쉰과 가족, 가족을 둘러싼 분투』 지은이 인터뷰

『루쉰과 가족, 가족을 둘러싼 분투』

지은이 인터뷰



1. 책에서 주로 근대적 핵가족의 성립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근대적 핵가족이 이전의 가족과 다른 가장 큰 특징이라면 무엇이 있을까요?

  

전근대사회의 가족[家]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가족과는 많이 다르죠. 그것은 혈연을 기반으로 하되 직계뿐 아니라 더 넓은 방계를 다 포함하는 가문(家門)과 같은 것입니다. 소설 『토지』의 최참판댁,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의 고사홍 대감댁 같은. 그런데 『토지』에서 보면 할머니도 아버지도 여읜 주인공 서희를 대신해서 집안의 주인행세를 하며 재산을 가로채는 조준구라는 인물이 있는데, 바로 주인공 서희의 내재종숙(內再從叔)이에요. 7촌 아저씨인 거죠. 전통가족은 아무리 촌수가 멀어도 핏줄(족보)로 이어지는 한 하나의 가족경계에 포함시킬 수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에서 보여지듯 ‘식솔’이라 표현되는 노비들도 가문의 주요 구성원이에요. 따라서 이런 전근대가족은 정서적 관계라기보다는 사회적 관계에 가까워요. 생산공동체이자 사회적 안전망! 흔히 ‘환과고독’(鰥寡孤獨)이라 불리는, 홀아비, 과부, 고아, 독거노인들까지 돌보는 관계망이죠.


이에 비해 근대가족은 보통 서로 간의 성적 독점을 약속한 부부(바람 피는 거, 금지!!)와 이 부부의 미혼 자녀 한두 명으로 구성된 일부일처제 핵가족을 의미합니다. 이 핵가족은 남편은 돈(만)을 벌고, 아내는 살림(만)을 하는 성별 역할분담 속에서, 그리고 부부 공동의 자식에 대한 투자(너희는 공부만 열심히 하면 돼!) 속에서 작동합니다. 그렇게 해서 가족자산과 가족정체성이 대물림되는 되는 걸 우리는 흔히 ‘스위트 홈’이라고 부르죠. 하지만 실제 역사 속에서 근대가족은 성립되자마자 위기에 부딪혔어요. 첫번째 요인은 페미니즘의 등장이죠. 여성들이 사적 영역에만 머물려 하지 않았거든요. 공적 영역에 진출했고 그 속에서도 결코 남자/남편의 보조적 역할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최근 상영된 넷플릭스의 「결혼이야기」도 그걸 다루고 있죠. 남편이 성공할수록 자신이 보잘 것 없어진다고 생각하는 여주인공은 이혼을 감행합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급증하고 있는 ‘졸혼’이나 ‘황혼이혼’도 그런 현상 중 하나겠죠.


두번째 요인은 산업구조의 재편입니다. 탈산업사회, 비(非)고용사회에서 남편의 ‘가족임금’은 결코 보장되지 않죠. 핵가족의 물적 토대가 흔들리는 겁니다. 더불어 정서적 위기, 돌봄노동의 위기가 도래하죠. 불륜의 일상화, 이혼율 급증, 아동 혹은 노인의 유기 혹은 학대….근대가족은 재편 중입니다. 




2. 가족에 대한 루쉰의 생각을 여러 측면에서 다루고 계신데요. 루쉰에게 가족이란 어떤 의미였을까요?

  

루쉰은 거대한 중국제국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던 19세기 말에 태어난 인물이에요. 그런데 루쉰은 그 제국의 몰락을 가문의 몰락으로 먼저 경험해요. 특히 사오싱 명문가의 장손이었기 때문에 전통적인 가족관계의 모순을 더욱 드라마틱하게 겪었을지도 모릅니다. 


우선 할아버지가 입시 부정에 연루되어 투옥됩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몸져누워요. 그래서 루쉰은 아주 일찍부터 가장의 역할을 해야 했어요. 어머니가 집안의 값나가는 물품을 내어주면 루쉰은 그걸 가지고 전당포에 가서 돈으로 바꿔 의사를 불러요. 근데 이 의사는 또 루쉰에게 희한한 약재들을, 예를 들면 처음 교미한 귀뚜라미 한 쌍이라거나 3년 서리 맞은 사탕수수 같은 것을 구해오라고 해요. 그래도 효를 근본으로 삼는 전근대의 에토스 속에서 루쉰은 열심히 도리를 다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속절없이 돌아가시죠. 그런데 집안 어른들은 루쉰을 도와주기는커녕 재산을 빼가려고 하거나 루쉰이 도둑질을 했다는 헛소문을 퍼뜨립니다. 한마디로 루쉰은 가족에 질립니다. 그렇게 루쉰은 집안을 버리고 고향을 등지고 세상 속으로 도주를 감행합니다. 


그래서 루쉰은 중국을 지탱해 왔던 인의도덕, 특히 효가 사람을 살리는 에토스가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규범이라는 것을 일찌감치 간파해요. 이게 루쉰의 첫번째 소설이자 중국 최초의 근대소설, 『광인일기』의 주제입니다. 그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 “아이를 구하라~”인데, 어떻게 보면 루쉰 평생의 과제가 바로 그거 아니었을까요? 충과 효의 이름으로 자식을 죽이고 절열(節烈)의 이름으로 여성을 죽이는 전통적인 인의도덕과의 투쟁. 그런 습속에 물들지 않은 새로운 청년의 출현!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쉰 자신은 어머니가 정해 준 여성, 글도 모르고 전족(纏足)도 한 여성과 전통혼례를 치룹니다. 어머니와의 의리 때문에 그리고 자기가 파혼을 선언할 때 상대 여성이 받게 될 타격을 고려하여 감행한 것이지요. 그 순간 청년 루쉰은 죽은 게 아닐까요? 한참 후에 루쉰에게도 사랑이 찾아옵니다. 무려 열일곱이나 어린 제자였어요. 루쉰은 고민하고 결국은 “나도 사랑할 수 있다”는 결단을 내립니다. 


루쉰에게 가족이란 무엇이었을까요? 전통가족의 모순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경험했지만 그렇다고 낭만적 핵가족에 대한 판타지에 결코 빠지지 않았던 그에게 (그러기에 루쉰은 어릴 때부터 ‘생활인’이었습니다) ‘가족’은 끊임없는 질문의 대상, 사유의 대상, 분투의 대상이 아니었을까요? 



3. ‘가족을 넘어 네트워크로’ 나아갈 것을 주문하고 계신데요.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더라도 ‘다른’ 관계를 만들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다른 네트워크는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요? 


이미 근대 핵가족은 빠르게 몰락하고 있습니다. 그걸 아쉬워하거나 그걸 붙들려고 하는 건 낙후된 태도죠. 그리고 이미 일부일처제 핵가족을 넘어서서 의식의 차원에서나 형태적 측면에서 다양한 가족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동성커플, 사실혼, 반려동물과의 삶, 딩크족, 우애가족, 가족 내 이혼, 3세대동거, 모계동거, 폴리아모리(비독점 다자관계)…. 말 그대로 n개의 가족이 생겨나고 있죠. 이런 걸 저는 네트워크라고 부른 것이지요. 




그리고 네트워크는 대안이거나 정답이 아니라 활동이고 실험입니다. 경제적 이유로 집을 함께 쓰는 셰어하우스, 밥이라도 함께 먹자는 소셜 다이닝, 마을공동체의 공동밥상, 노인부양이나 아동양육을 함께 하는 돌봄네트워크, 그 어떤 것도 우리의 삶에 긴요한 문제들이고 그 어떤 것도 당장 시작할 수 있는 실험입니다.  


특히 지금은 외벌이로도 맞벌이로도 제대로 살기 어렵습니다. 적게 벌어도 잘 살기 위해서는 더 많은 의존의 기술을 익혀야 합니다. 향후 삶의 질은 (내가) 얼마를 버느냐가 아니라 주변 사람과 얼마나 상호의존하는 관계를 만드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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