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비딕, 삶과 운명을 탐사하는 두 개의 항해로』 지은이 인터뷰
1. 미국의 대표적인 고전 『모비딕』을 선생님의 시선으로 읽어 낸 이 책에서 ‘삶과 운명을 탐사하는 두 개의 항해로’란 무엇을 말하는지요?
워낙 유명한 소설이라 알고 계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모비딕』은 ‘피쿼드 호’라고 하는 포경선이 흰고래를 쫓으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이 조금 이상하게 느껴지실 수도 있겠네요. ‘흰고래를 찾으러 가는 항해로가 두 개였나?’ ‘배가 두 척이었나?’
이 ‘항해로’란 단순히 바다 위에서 목표물을 쫓는 길 그 이상의 어떤 철학적 선분이라고 생각했어요. 흰고래는 진리와 삶에 대한 거대한 질문을 품고 있는 하나의 기호로 볼 수 있거든요. 그리고 그 속에서 두 캐릭터가 고래를 대하는 각기 다른 방식의 태도를 비춰 봤을 때, ‘두 개의 항해로’라는 표현이 적절하지 않나 생각했습니다. 그 유명한 에이해브 선장은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문학사에 족적을 남길 만큼 강렬한 인상답게, 열정적이고 광기를 품고 있는 캐릭터죠. 셰익스피어 비극 작품의 주인공 같은 냄새도 얼핏 풍기고요. 서양 영화에서 많이 봤을 법한 무모하고 초인적인 사람이에요. 그래서 『모비딕』의 결말을 비극으로 이끄는 데 거의 모든 원인을 제공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극단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에이해브와는 다르게 이슈메일이라는 캐릭터가 있어요. 사실 이슈메일을 새롭게 포착해 냈다는 게 저한테 있어서는 가장 큰 수확이었어요. 비극을 비극으로만 끝내지 않으려면, 또 철학을 함에 있어서 가장 귀중하지만 쉽게 소홀히 할 수 있는 재료인 ‘일상’과 ‘현장’을 놓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질문에 가장 적절한 답안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캐릭터였거든요. 이 두 캐릭터를 대조하는 것이 이 책의 큰 줄기라서, ‘삶과 운명을 탐사하는 두 개의 항해로’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2. 19세기 미국의 상황을 담고 있는 『모비딕』이 21세기의 한국에 사는 청년인 선생님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아무래도 종교적인 코드 때문인 것 같아요. 『모비딕』은 성서적 요소를 풍부하게 담고 있는 책입니다. 저는 모태 기독교인이었고, 원래부터 종교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원래 알고 있었던 성경에 대한 지식들과 『모비딕』이 겹치는 걸 보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작가가 어떤 식으로 성서를 변용했는지 주목하게 되더라고요. 그러다 보면 왜 하필 성서를 차용했는지 파고 들어가게 되고, 19세기 미국의 종교적 상황과 모순 역시 볼 수 있게 됩니다.
최첨단 과학의 시대를 사는 21세기의 한국인이지만 저를 이루는 생각들의 근원을 추적해 올라가 보면 종교가 결코 빠질 수 없어요. 특히 미국의 영향력을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대한민국 기독교요. 미국과 한국, 이 두 나라는 물질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실감했어요. 그래서 『모비딕』은 한국인들에게도 충분히 낯설지 않은 고전으로 다가올 수 있을 것 같아요. 특히 19세기의 미국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국과는 상당히 다릅니다. 세계 최강대국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기 전, 막 팽창을 시작하려는 미국을 볼 수 있어요. 그러다 보니 서로 상반되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혼란스럽지만 기이한 조화를 이루면서 막 뒤섞여 있는 거죠. 종교에 대한 인간의 믿음과 신에 대한 생각들, 각종 신화와 전설 속의 이야기들이 당시 기술력의 최고 응집체라고 할 수 있는 거대한 포경선 위에서 펼쳐져요. 굉장히 흥미롭죠. 고대와 현대, 원시 자연과 최신 과학을 동시에 목격하는 기분이랄까요.
따라서 표면적으로는 고래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정말 많은 이야기들을 추출해 낼 수 있었어요. 이 이야기들은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이라면 생애에 걸쳐 던질 수 있는 화두들입니다. 종교와 신, 사람의 운명, 행복과 고난, 삶과 죽음,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들이요, 이렇게 『모비딕』을 통해 건져낼 수 있는 수많은 화두들을 가지고 결과적으로 저 자신을 들여다보는 자기 해부적 글쓰기를 할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이렇게 종교와 성서라는 코드를 통해 1850년에 출판된 책이 2019년의 청년에게도 생생하게 와 닿습니다. 『모비딕』을 읽으며 고전이란 그 당시의 상황을 가장 잘 비춰주는 시대성을 지님과 동시에 어느 세대와 국가를 막론하고 통할 수 있는 보편성을 가지고 있는 텍스트임을 다시금 깨달았어요.
3. 허먼 멜빌이 『모비딕』에서 변주하고 있는 성경의 인물들과 내용들이 놀랍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어떤 부분이 충격적으로 와닿으셨는지요?
저처럼 성경을 어렸을 때부터 꾸준히 읽어 온 사람이라면 서양 고전들이 재밌게 느껴지는 포인트가 분명히 있을 거예요. 바로 ‘전복성’이요. 성경에서 고정된 캐릭터, 변하지 않는 상징들로 교회 내부에서 통용되는 것들이 고전에서 완전히 뒤엎어지는 게 정말 재밌거든요. 악역과 선역이 뒤바뀌는 것은 물론이고, 신이나 신에 가까운 엄청난 권위의 예언자들이 갑자기 19세기 미국을 배경으로 한 소설에 뜬금포로 등장하는 순간의 느닷없음은 정말 재밌는 ‘성서 브리콜라주’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이게 왜 중요하냐면, 교회를 다녀보면 알겠지만 수천 년의 역사, 거기에 인류 최고의 경전이라는 무게감 앞에서는 반박은 고사하고 2차 생산조차 전혀 불가능할 것 같은 엄숙함이 있단 말이죠. 근데 그게 19세기 미국의 책 속에서 작가적 상상력으로 완전히 다르게 탄생한 것은 경이로워요. 『모비딕』은 제1장부터 끝장까지 성경적 함의를 절대 놓치지 않고 있어요. 이 책을 처음 읽어 내려갔을 때가 생각납니다. 딱 앞의 몇 장만 읽고서도 ‘이건 올해 내가 정말 써야 할 고전이다! 잘 선택했구나!’ 하는 감탄이 딱 들었었거든요. 사실 성경을 읽어 왔던 배경 때문에 『모비딕』에 더 끌리고 꽂혔던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만약 성경을 계속 읽어온 모태 신자다, 구약과 신약 경전 순서를 나열하는 데 문제가 없을 정도다, 하는 분이라면 『모비딕』을 읽어 보시라고, 특히 『모비딕』의 ‘요나서’를 리라이팅한 부분을 꼭 읽어 보시라고 강력 추천하고 싶어요. 허먼 멜빌도 분명 성경을 엄청나게 애독한 사람이었을 거예요. ‘다독’이 아니라 ‘애독’이라고 말한 이유는, 그렇게 성경이라는 텍스트에 흠뻑 젖지 않았다면 할 수 없었을 캐릭터의 교차, 기독교적 상징의 융합 등 상상할 수 없는 만남들을 전부 해내고 있거든요. 거기에 감초처럼 더해지는 성경 말씀들도 굉장합니다. 『모비딕』을 읽으며 성경을 비종교적인 텍스트로 읽는 시선을 하나 확보한 것 같아요. 교회에 다녔을 때는 상상할 수도, 시도할 수도 없는 관점이었거든요.
4. 당신이 철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항상 죽음을 옆에 끼고 사는 격렬한 포경 보트 위에서도 집 안의 화롯가 옆에 안전하게 앉아 있는 사람보다 더 큰 공포를 느끼지 않을 거라고 하는 이슈메일의 말에 깊이 공감하시는 듯합니다. 선생님께 ‘철학을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이슈메일의 말입니다. 문장이 좀 복잡한데, 거꾸로 더 쉽게 말해 보면 “철학을 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편안한 집 안에 앉아 있어도 저 바다 위에서 험하게 고래잡이 하는 사람들보다 더 공포스럽게 살 수밖에 없다”가 되겠네요. 이슈메일이 토해 낸 명문들이 책 속에 너무나 많아요. 그리고 이 문장들은 전부 ‘철학을 공부함으로써 알게 되는 삶과 운명’의 원리들을 담고 있어요. 딱딱한 철학서의 논증이 아니라, 지구상에서 가장 더럽고 치열한 3D업종에 종사하는 한 포경선원의 입을 빌려 왜 철학을 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하는 것이 『모비딕』의 묘미예요. 제게 있어서 철학을 한다는 것은 무지에서 벗어나기 위한 앎의 여정을 떠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 속에서 자신이 사랑한 육지와, 사람들과, 배경들과 헤어지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요.
왜 이별을 해야 할까요? 지금의 삶도 충분히 좋고 안락한데. 그렇지만 삶과 운명, 죽음, 생로병사 같은 중요한 질문들을 무지 속에 그냥 던져놓는다면, 어느새 ‘공포’로 변환되어 버린 삶을 무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어요. 하루에도 얼마나 많은 사고와 죽음들이 수없이 쏟아지나요? 뉴스뿐만 아니라 당장 주변만 봐도 ‘도대체 왜?’라는 의문이 떠오르는 일들이 비일비재하죠. 그런 의문들을 그저 내버려둔 채 건드릴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집 안의 안락한 곳에 앉아 있더라도 마음은 수심과 번뇌로 가득할 수밖에 없어요. 딱 현대인들의 알 수 없는 불안함을 정확히 지적한 문장 아닌가요? 저도 그랬어요. 도대체 뭐가 뭔지 알 수가 없고, 왜 살아야 하는 건지 방향키를 잃어버렸을 때, 눈앞의 사건이 해석이 되지 않을 때, 그때는 당장의 일상이 공포와 불안의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나이가 몇이든 언젠가는 이 본질 앞에 서서 자신만의 대답과 탐구의 결과물을 증명해야 될 때가 반드시 옵니다. 그래서 철학함은 삶의 의무에요. 누구든 결코 피해갈 수가 없어요.
5. 끝으로 이 책을 읽을 독자 분들에게 특별히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해주세요.
독자들이라... 살면서 독자를 상정한 글을 쓰고 책을 낼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저는 늘 비밀스럽게 글을 썼거든요. 누가 보여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보여 줄 사람도 없었지만요. 항상 노트북의 비번을 꼭꼭 잠가 뒀던 기억이 나요.
책을 내는 과정은 제가 해오던 작업과 완전히 달랐어요. 늘 누군가와 함께하는 과정의 연속이더라고요. 책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는 끊임없이 다른 이들과 소통해야 하고, 최종적으로 독자라고 하는 불특정다수를 설정하고 그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쓰는 거니까요. 도대체 누가 과연(?) 내 책을 읽을까? 알 수가 없죠. 그런데 제가 읽어 왔던 모든 책들 역시, 서로 얼굴도 뭣도 모르는 어마어마한 관계망 속에서 이루어진 하나의 만남이었음을 생각하게 되었어요. 책이 끌어당기는 인연장이란 것이 뭔지 처음으로 감지되는 느낌이었어요. 앞으로는 저 역시 독자로서 읽어 나갈 책들 하나하나가 더 깊게 와닿을 것 같아요.
결국 책을 하나 집어 든다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사건인가, 나도 모르는 곳에서 나의 글은 고래처럼 세상을 마음껏 떠돌고 있겠구나 생각하면 가슴이 뛰죠. 인연도 이런 귀한 인연이 있을 수 있을까요? 욕심이겠지만, 읽으면서 ‘어, 나도 이랬었는데’ 하는 공통분모를 독자 분들과 작게라도 형성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어요. 책을 재밌게 읽을 수 있는 힘은 글쓴이와 독자 간의 보편적인 영역이 얼마나 공유되었는가에서 나온다고 생각하거든요. 『모비딕』이라는 거대한 고래에 기대어 제 나름대로 너무나 중요하고 꼭 탐구해 보고 싶었던 질문들을 이리저리 찔러보는 과정을 이 책에 모두 담았어요. 말이 길어졌는데, 결론적으로 이 책의 독자 분들께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꼭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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