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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연암을만나다

[연암을만나다] 사사롭지 않게 삶을 수행하기

by 북드라망 2020. 8. 6.

사사롭지 않게 삶을 수행하기



나이 56세(1792년), 연암은 안의현의 고을 수령(안의현감)으로 일하게 된다. 연암의 관직 생활은 그가 수령으로 있을 때 쓴 온갖 편지와 아들 박종채가 쓴 과정록 『나의 아버지 박지원』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사람들을 처벌하는 대신, 그 마음을 헤아려줌으로써 사람들 스스로가 자신의 행동을 고치도록 해주고, 일 하나를 할 때에도 백성들에게 가장 좋은 방식을 고민하며 조금의 사사로움도 얹지 않았다. 그래서 연암의 ‘공무 수행’은 일체의 번잡함 없이 투명하고 깔끔하다.




그에 관한 일화는 차고 넘친다! 안의현감으로 부임하기 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무신년(1788) 6월, 연암은 ‘선공감 감역’이라는 벼슬을 하고 있었고 임기를 6일정도 남겨놓고 있었다. 조선에서는 매해 6월과 12월에 관리들의 근무성적을 보고 승진(혹은 면직)을 시켰는데, 연암은 임기가 6일 남았기 때문에 정확히는 이번 달 승진 평가 대상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며칠 정도는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다며, 이조(관리 성적을 조사하는 관아)에서는 그 달에 연암을 승진시켜주려고 했다. 그러나 연암은 단칼에 거절한다. “내가 평소에 한번도 구차한 짓을 한 적이 없다”고!


그리고는 다음 해가 되어서야 승진했다. 하루가, 한 시간이 모자랐어도 연암은 그렇게 했을 것이다. 마음에 조금의 아쉬움, 아까움도 남기지 않고 말이다. 그의 관직 생활 일화를 보면 감탄과 감동의 연속이다. 아 어찌 이렇게 지혜롭고, 훌륭하고, 사심이 없을까! 그런 연암이 현감재직 약 3년차에 절친한 친구 김이도(자는 계근, 호는 송원)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다.


하루는 저의 아들더러 이르기를 “너는 예서를 읽었느냐? 한 조각 고기가 비뚤게 잘린 것을 먹는다고 입과 배에 무엇이 해로우며, 잠시 쉴 때 한쪽으로 기댄다고 엉덩이와 다리에 무엇이 나쁘겠느냐마는, 성인聖人은 임신했을 때에 대해 간곡히 훈계하시기를 ‘자른 것이 바르지 못하면 먹지 말고, 자리가 바르지 못하면 앉지 말라’고 하셨으니, 이는 뱃속에 있을 때부터 양생하는 데 바르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했지요. 이로써 미루어 보면 (중략) 지금의 이른바 양반이란 옛날의 이른바 대부와 사士요, 지금 이른바 ‘좋은 태수(지방관)’란 옛날의 이른바 도신盜臣이니, 그가 먹고 입는 것에 명색이 부정하지 않은 것이 있을 수 있겠소이까? 백이와 오릉중자로 하여금 태수로서 처신하게 한다면 (중략) 반드시 밖으로 뛰쳐나가 먹은 것을 토해 내고 말 것이외다.


(박지원, 『연암집』(중), 「김계근에게 답함」, 돌베개, p203)


연암은 이제 막 벼슬길에 나선 친구 김이도에게 아무리 좋은 관리가 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도둑이 아니겠느냐고 말한다. “좋은 태수”가 되려는 건, 결국 “장차 먹을 것”이 많기 때문이 아니냐고. ‘좋은 태수’라고 할 때, 혹시 그 ‘좋은’이 세금을 많이 걷을 수 있다(=돈이 많이 들어온다)는 뜻은 아니냐고. 그러니까 연암은 자기가 고을 수령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정말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이도에게도 한 번 상기 시키려했던 것이다.


지방관은 백성들의 노고로 먹고 산다. 그들이 먹는 밥은 백성들이 짓는 농사에서 나오고, 그들이 받는 녹봉은 백성들이 바친 세금에서 나온다. 연암의 질문은 진지하다. 내가 먹는 밥 한술, 옷 한 벌, 훔치지 않은, 부정하지 않은 것이 있을 수 있을까? 물론 그것을 먹고 입는다고 “입과 배에 무엇이 해로”울까. 하지만 백이와 오릉중자 같은 성인에게 수령 일을 맡긴다면 그들은 반드시 “먹은 것을 토해 내고 말 것”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연암의 인식이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입지 않는, 결벽 비슷한 것으로 나아간 것은 아니었다. 이 인식은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조금의 사사로움도 얹지 않는 관리 되기와 같은, 철저한 자기윤리의 기반이 된다. 내가 먹고 입는 것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를 안다면 감히 어떻게 조금이라도 더 가지려할 수 있을까. 그것이 나를 살아갈 수 있게 한다는 것을 안다면 여기에, 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마음을 쓰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니 사사로운 마음이 든다면 조금만 더 생각을 해보자, 혹은 알려고 해보자. 무엇이 나를 살게 해주는지, 또 내가 산다는 것에 “명색이 부정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글_이윤하 (남산강학원 청년스페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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