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터 매니저 되기
水風井 ䷯
井, 改邑不改井, 无喪无得, 往來井井. 汔至亦未繘井, 羸其甁, 凶.
初六, 井泥不食. 舊井无禽.
九二, 井谷射鮒, 甕敝漏.
九三, 井渫不食, 爲我心惻, 可用汲. 王明並受其福.
六四, 井甃无咎.
九五, 井洌寒泉食.
上六, 井收勿幕, 有孚元吉.
주역의 정(井)괘는 물 아래 나무가 있는 모습으로, 두레박으로 우물물을 길어 올리는 형상이다. 예전의 우물터는 마을의 중심에 거처를 정해 맑은 물을 항상 공급하고, 누구나 그 물을 마시게 해주었다. 정(井)괘는 그런 우물의 덕을 얘기하고 있다. 그러니까 우물물은 마을 주민들을 길러내는 생명수였다.
문이정도 ‘공부로 우물의 덕을 긷는 공간’이 되고자 수풍정(水風井)괘를 비전 괘로 삼아 이름을 지었다. 그런데 최근에 문이정을 오래 지속할 수 있을까하는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일이 있었다. 공부로 덕을 긷기는커녕, 내 마음이 번뇌로 꽉 찬 진흙투성이였다. 지금 정(井)괘에서 내 상황을 찾아보자면 초효의 ‘정니불식(井泥不食)’이다. 이번 기회에 번뇌를 좋은 도구로 삼아 문이정의 비전을 새롭게 다져보려고 한다.
지난 3월 공간을 오픈하면서 몇 가지 규율을 정했다. 그 중에 하나가 공간 유지를 위해 세미나비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공간운영을 위한 회비를 내고, 세미나 참석을 하는 원칙을 알고 있음에도 은근슬쩍 회비를 내지 않는 이가 있었다. 그 회원이 문이정이 감이당과 어떤 차별성도 없는 것 같고, 문이정만의 색깔이 없는 것 같아서 불만이라고 뒷담을 했다는 소리를 듣자, 당혹스러움과 함께 엄청 화가 났다.
이런 마음을 먼저 감이당 도반들에게 털어놨다. 공동체 운영에 도움이 되는 이야기들이 우수수 쏟아져 나왔다. 종합해보면 연구공간의 원칙과 약속은 철저해야하고 물러섬이 없어야한다 것. 그리고 내가 감당 못할 감정의 잉여를 끌고 다니면 공부에 이득이 없다는 것. 생각해보니 문이정의 회비원칙을 어긴 것은 엄연히 규율 문제였다. 공적 약속을 어긴 것이니 그 사실을 담백하게 전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내 번뇌가 증폭된 원인은 투명하게 회비문제를 바로잡지 못한 채로, 이런저런 사사로운 감정을 끌어와 서로 다른 문제를 뒤섞은 것이다. 문이정의 색깔을 만들라는 얘기는 오히려 귀담아 들어야 할 이야기인데,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해 일으킨 번뇌였다. 샘물은 고요하지만 맑고 투명함을 유지하는 비결은 쉼 없이 솟아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길이 막히면 물은 금방 더러워진다. 사람이 모이는 공간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공간이 스스로 자정능력을 갖추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정(井)괘의 초육효는 진흙탕물이라 먹을 수가 없다.(井泥不食) 그래서 사람들은 우물을 버리고 모두 떠났다. 시간이 더 흐르자 아뿔싸! 옛 우물에는 새 한 마리조차 날아오지 않게 됐다.(舊井無禽) 이제 어떤 생명도 기를 수 없는 상태가 됐다. 왜 초육의 우물은 이 지경이 된 걸까? 먼지와 진흙이 두텁게 쌓이면 물줄기를 꽉 막아 생명수를 배양할 수 없다. 그렇다면 문이정을 흐리게 하는 진흙은 뭘까? 연구공간의 원칙이 투명하지 못하고 공간을 흩트리는 감정의 잉여가 섞여버린다면 샘물은 솟아오를 수가 없다. 우물은 누구나 오가는 개방된 공간이라, 함께 만들어가고 관리해야 하는 공간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공간이 청정해지려면 무엇보다 공간윤리와 사적 감정이 선명하게 분리돼서 번뇌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설사 공간규율 문제로 좌충우돌하되 원칙이 분명하다면 번뇌가 더 증폭되지는 않을 것이다.
모두가 먹는 공동 우물물은 사소한 먼지 한 톨이라도 들어가지 않도록 치우고 설거지하는 마음들이 모여 길이길이 우물물을 마실 수 있었다. 여기에 공간운영의 지혜가 있다. 문이정을 오래 유지할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의 정체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보니 회원 수에 집착했던 내 마음이었다. 깨끗한 우물을 두고 떠나는 사람이 있을까. 그러고 보니 공동 우물물을 먹었던 옛 사람들의 마음을 더듬어보니 우물터의 매니저와 이용자가 따로 구분될 수 없음을 알았다. 문이정의 ‘물맛’은 문이정 물을 마시러 오는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 그러므로 문이정을 찾는 이가 없을까 두려워하기보다 물처럼 지혜롭고 투명한 공간규율에 대해 자주 얘기 나누고, 회원 간 감정의 잉여를 덜어내는 훈련을 몸에 익힐 일이 먼저다. 마르지도 넘치지도 않아 오고 가는 사람들이 해갈할 수 있는 우물물처럼 ‘공부’로 ‘우물의 덕’을 기르는 공간은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글_이성남(감이당 금요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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