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 프로젝트
-도시 속 전쟁기계-
김해완(남산강학원 Q&?)
15개의 고원 중에서 10개의 고원을 넘어도 분량상으로는 아직 반밖에 안 왔다. 『천 개의 고원』은 뒤쪽으로 가면 갈수록 러닝타임이 늘어나기 때문에 체력을 단단히 준비해야 한다. 열두 번째 고원은 그 중에서도 제일 넓고 광활한 고원이다. 유목민들의 사막, 속도와 질주와 ‘-되기’의 시공간, 「1227년 - 유목론 또는 전쟁기계」.
유목민 - 역사가 포착하지 못한 자들
도주선에서 중요한 건 ‘계속 하는 것’이라고 저번에 이야기했다. 하지만 실제로 행해보면 이것처럼 머리털 빠지는 일도 없다. 아차, 하는 사이에 우리의 욕망은 고착화된 영토와 익숙한 코드를 따라 흘러가버리고 도주선은 지층으로 회귀해버리기 일쑤다.
그런데 세상에는 이 ‘탈-’ 운동을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자신의 존재방식으로 삼고 있는 자들도 있다. 그들은 의식적으로 지층을 거부하려고 하지 않아도 행동, 사유, 놀이 모든 것을 탈영토화와 탈코드화 속에서 진행시킨다. 유목민들(Nomad)이다.
유목민들은 역사의 주역이 아니었다. 그들은 문명화를 거부한 채 대부분의 세월을 방랑으로 탕진한 집단으로 낙인찍혔다. 하지만 들뢰즈와 가타리는 그게 바로 유목민들의 세계라고 말한다. 우리들이 사는 세계는 영토와 코드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지층이다. 이곳에서의 ‘선’은 늘 점과 점을 잇는 중간다리다. 하지만 만약 끊임없이 움직이는 모래언덕이라면 점을 고정시키고 경계선을 긋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사막에서 살아가는 유목민들에게는 오히려 점이야말로 선과 선을 잇는 중계점이다. 그들은 끊임없는 방랑을 통해서 계속해서 사막을 넓혀나간다. “유목민이 사막에 의해 만들어졌듯이 사막 또한 이들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할 수 있다. 유목민은 탈영토화의 벡터이다. 유목민은 끊임없이 행로나 방향을 바꾸는 일련의 국지적인 조작을 통해 사막에 사막을, 스텝에 스텝을 첨가시켜 나간다.”(733쪽) 국가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 외부를 질주했던 사람들. 역사가 포착하지 못한 또 다른 선의 세계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유목민들의 배치를 ‘전쟁기계’라고 부른다. 우리가 이들에게서 뭔가를 배울 수 있을까? 저자들의 안내를 따라 고원을 가로질러가 보자.
마이너리티의 속도
인터넷에서 이런 짤방을 보고는 ‘헉’ 한 적이 있었다. “마이너는 자신이 왜 쪼렙(저급레벨)인줄 모르고 메이저는 자신을 마이너라 생각한다.” 일부러 웃기려고 적어놓은 말이긴 하지만 분명 가슴 한 쪽을 뜨끔하게 만드는 지점이 있었다. 한마디로 메이저니 마이너니 하는 구별은 다 쓸데없다는 것. 현실 속에서 마이너는 ‘무능하거나’ ‘메이저가 되고 싶은데 상황을 바꿀 의지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메이저는 어떤가. 죽어도 마이너가 되고 싶지 않아하며 모든 조건을 제도권에 맞춰놓고는, ‘그래도 나는 소수자 편이야’ ‘내 의식은 깨어있어’라고 위안하기 일쑤다.
내가 메이저인지 마이너인지 고민하는 건 일단 스톱하자. 우리는 <메이저>와 <마이너>의 위치를 명확하게 구획하려는 시도 자체가 벌써 ‘메이저의 배치’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천 개의 고원』에서 국가는 대통령도 의회도 헌법도 아닌 일종의 ‘장치’로 등장한다. 이 장치는 한 점(국가)에 집중된 권력을 ‘보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이를 위해 일상의 세세한 것들까지도 모두 그 점을 거쳐야지만 작동할 수 있게끔 만들어놓는다. 점과 점 사이에 갇힌 선분을 그린 후 국가는 그 속에서 인터체인지를 담당한다. 가족IC, 학벌IC, 성별IC…. 그렇다면 ‘회로파기’가 존재하는 곳에는 반드시 국가가 있다. 메이저에 대한 욕망은 결국 안정성과 보존성을 지향하여 이 홈 패인 곳에 있고 싶어 하는 욕망이며, 마이너는 늘 그 반대국부로서만 존재한다. ‘메이저’라는 존재를 더욱 뚜렷이 확립해주는 또 다른 홈 패인 공간. 국가에 대해 관심이 있든 없든 Major를 향한 (동시에 Minor에 대해 왜곡된) 욕망은 우리 시대에 보편적으로 자리하고 있는 듯하다.
진정한 “소수자”가 되는 길은 국가와 다른 홈을 파는 것이 될 수 없다. 그것은 결국 어설픈 “쪼렙”으로 전락하거나 또 하나의 국가를 복제하는 작업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유목민들은 그렇게 오랫동안 국가의 외부에서 그들을 벌벌 떨게 만들 수 있었을까?
정주민들에게 국가장치라는 배치가 있다면 유목민들에게는 전쟁기계라는 배치가 있다. 그런데 유목민들의 존재방식은 홈을 뒤엎어 버리는 것이다. 사막에서 유목민들은 경계선을 긋지 않고서도 공간을 장악하는 새로운 방법을 개발한다. 그것은 한 장소에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고 삶 자체를 아예 길 위에서 펼치는 것이다. 모든 곳이 내 집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한 점에서도 사막 전체를 장악한다. “그들은 스텝으로 달려갔다. 스텝의 저편으로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스텝 위에서 편히 살기 위해.”(731쪽, 주석) 이러니 유목민들은 어떻게 해도 국가로 환원될 수가 없다. 국가장치의 근본적인 작동원리를 거부할 뿐만 아니라 아예 다른 방식의 공간(매끄러운 공간)을 창출해내는 전쟁기계는, 메이저-마이너의 이분법을 단박에 뒤엎어버린다. ‘소수적인’ 방법으로 가장 드넓은 공간을 단숨에 차지하는 유목민의 전술.
전쟁기계도 국가장치도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특정한 배치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곳곳에는 전쟁기계와 국가장치가 혼합되어 존재한다. 그러니 전쟁기계가 선(善)이고 국가장치가 악(惡)이라는 건 너무 유치한 생각이다. 하지만 나는 어쨌든 ‘제대로 폼 나게’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쟁기계를 발동시킬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소수자들을 기피해야 할 ‘쪼렙’ 아니면 보호해야할 약자로 이해하는데 익숙해있고, 그러므로 호의든 악의든 마이너리그에 들어가는 데에는 엄청난 각오와 포기가 뒤따른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이 위험천만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메이저리그에서 통하는 무기 앞에 타협하거나 탈취해야 한다. 그런데 유목민들은 이 전제를 단박에 타파하고 있다. 인디언들이나 유목민들에게 소수의 전투능력은 언제나 최고치였다. 중국대륙을 짓밟았던 칭키스칸의 군대는 말-사람-활뿐으로 최상의 전쟁기계를 구성했고, 역사적으로 빛났던 멋진 사람들은 모두들 외부의 평가에 개의치 않고 묵묵히 자기 길을 갔다. 이들의 공통점은 바로 ‘속도’를 가졌다는 것이다.
속도는 속력이나 운동과는 다르다. 이것은 홈 패인 공간의 중력으로부터 벗어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벡터다. 물리학에서는 자유낙하운동을 하는 물체가 실제로는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지구 자체가 위에서 아래로 중력이 작동하는 시공간이기 때문이란다. “아무리 빠르게 낙하하더라도” “중력의 법칙에 따라 무한히 감소해가는 ‘느림’을 가졌다고 말해야 한다.”(713쪽) 즉, 원래부터 패인 홈인 중력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비로소 구체적인 방향과 힘(속도)을 가지게 된다는 뜻이다. 이 자유경쟁사회에서 남들보다 훨씬 빨리 앞으로 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만약 그 사람이 홈 패인 공간에서 살고 있다면, 규격화된 체스판 위에 의심 한 번 하지 않고 서 있다면 그 삶의 속도는 거의 ‘0’이라고 봐야 한다. 특정한 물체가 점과 점 사이를 이동하는 선분을 볼 때 우리는 그것은 운동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백수인 것처럼 보여도, 그가 홈 패인 공간에서 계속 달아나고 있다면 거기에는 속도가 있는 것이다.
이것 자체가 무기 아닌가? 홈 패인 공간을 가로지르며 모든 회로를 무색하게 만드는 ‘속도’는 국가장치를 무력화시키는 최고의 ‘무기’다. 무기를 처음 발견해낸 것 역시 유목민들이었다. 인간을 피해 도망치는 사냥감을 보고는, 고기 말고 저 속도를 가져올 수 없을까 생각하다가 결국 기마술을 탄생시킨 것이다. 그런데 속도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말을 단순히 도구로 사용하는 게 아니라 인간과 말 사이의 집합적 신체를 구성해내야 한다. 이게 바로 말-되기의 시초다. 이 속도-무기를 손에 넣기 위해서는 변용태(affect)의 단계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 “변용태는 화살처럼 신체를 가로지른다. 변용태는 전쟁무기인 것이다. … 긴장이란 ‘이 변용태가 내게는 너무나 강렬한’ 경우를 말하며, 섬광은 ‘변용태의 힘이 나를 휩쓸고 가는’ 경우를 말한다.”(682쪽) 한마디로 속도와 무기를 획득하는 문제는 언제나 나의 신체가 어떻게 변하느냐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유목민들이 최강의 전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존재 자체가 무기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속도’ 한가운데에서 ‘무기’로 ‘변용’되었다.
전쟁기계가 국가에게 정복당해 이미 실존하지 않는 바로 그 순간에 국가로 환원되지 않는 이 기계가 최고도의 환원 불가능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승승장구하는 국가에 도전할 수 있는 활력 또는 혁명력을 갖춘 사유 기계, 사랑 기계, 죽음 기계, 창조 기계 속으로 흩어져 들어가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들뢰즈·가타리, 『천 개의 고원』, 새물결, 2001, 682쪽
운동이냐 속도냐? 이건 겉모습으로 판단할 수 없는 문제다. 넥타이와 양복, 월급봉투, 높은 학벌은 죄가 없다. 질문해야 할 것은 우리가 그 안에서도 ‘살아있음’을 느끼는가 이 하나다. 정주민으로 태어난 우리는 주민등록증을 포기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한편으로 우리는 반-국가인이기도 하다. 왜냐. 국가의 본질이 고정하는 것이라면 생명의 본질은 움직이고 흘러가고 떨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통제되기를 거부하는 바로 이러한 감정이 전쟁기계를 형성한다.”(726쪽) 최소한 내가 살아있다고 느끼는 순간들은 국가장치에서 벗어나있는 지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전쟁기계는 지금 여기서 ‘살아있고자’ 하는 모든 지점에서 발동하며, 그 순간의 속도 속에서 도주선은 이미 그려지고 있다.
반-평화작전
아직도 전쟁기계를 발동하여 속도감 있게(?) 사는 것이 왜 ‘폼 나는 삶’인건지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거다. 사실, 전쟁기계라는 말은 그 자체로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긴다. 이것은 전쟁기계의 목적이 전쟁이라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유목민들은 방랑 중에 도시나 국가를 만났을 때 그곳을 섬멸한다. 하지만 그들의 목적은 파괴가 아니라 그곳 또한 사막(매끄러운 공간)으로 만드는 것에 있다. “사막이나 스텝을 늘리되 그것에서 인간이 살 수 없게 만들지는 말라.”(800쪽) 21세기에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군대는 국가에 전유되고 자본에 종속된 전쟁기계일 따름이다. 국가는 전쟁기계를 자신의 목적에 맞게 개조했다.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잔인한 징키스칸의 전사들은 활과 말이 전부였지만 지금의 국가는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핵폭탄을 개발하고 있다. 살인무기가 아니라 살인도구가 있다. 유목민들의 무기는 국가장치를 마주쳤을 때만 파괴력을 행사하나, 군대의 도구는 어디를 가든지 살인을 유일무이한 목적으로 설정하고 실행한다.
의문의 여지 없이 현재의 상황은 아주 절망적이다. 앞서 살펴본 대로 우리는 지금 세계적 규모의 전쟁기계가 마치 공상과학소설에서처럼 점점 강력하게 구성되어 파시즘적 죽음보다 훨씬 더 무시무시한 평화를 자신의 목표로 삼고, 극히 처참한 국지적으로 자신의 일부로 유지하거나 유발하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같은 책, 809쪽
메이저를 지향하면서 삶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나쁘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시대의 선악은 있는 것이다. 이 시대의 비극 중 하나는 명백한 부조리함이 언제나 “평화”의 이름 속에서 드러난다는 것이다. 미국은 세계평화의 수호자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얼굴 없는 적을 만들어낸다. 강정마을에 해군기지를 세우는 것은 국가안보와 바다의 평화를 위해서이고, 땅과 농가들을 황폐하게 만드는 몬산토의 GMO종자는 세계 식량문제 해결을 위해서이고, FTA에서 통과된 의약품 개방은 더욱 전문적으로 국민건강을 지키기 위해서다. 국가장치에 전유된 전쟁기계는 온 지구를 ‘사막’으로 만들며 모든 곳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그것들은 우리를 ‘무감각하게’ 만든다. 내 안에 깃든 평화가 나를 침묵하게 하고 세상 속 사건들에 ‘귀차니즘’을 표방하게 한다. 집도 돈도 학벌도 없으니 절대 메이저 측에 못 낄 것 같은데도 우린 이렇게 기묘한 방식으로 홈 패인 공간에 포획되어 있다.
우리는 바로 이 지대 위에서 전쟁기계를 작동시켜야 하지 않을까? 무기를 앞으로 던져 이 찜찜한 평화를 깨뜨려야 하지 않을까? “문제설정적(problématique) … 문제는 ‘장애물’이 아니라 장애물의 극복, 앞으로-던짐이다.”(693쪽) 들뢰즈와 가타리는 국가체제 안에서도 언제나 소수 과학, 소수 철학, 소수 기술자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말하자면 홍대 앞 인디밴드가 어느 시공간에나 있었다는 뜻이다(^^). 인디(Indie)는 문화영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인디의 특징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는 것, ‘속도’를 알고 또 그것을 표현할 줄 안다는 것에 있다. 그리고 <모두>에게 인정받기보다는 단 한 사람에게라도 그 무기가 제대로 던져졌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인디음악도 있고 인디영화도 있는데 인디-청춘이라고 없으리란 법 없지 않은가. 뭘 해야 할까? 들뢰즈와 가타리는 도주하면서 계속 자기 자신의 무기를 찾아야한다고 말한다. 유목민들이 어디로든 미끄러지는 것처럼 아마 뭐든 가능하지 않겠는가. 홈 패인 공간을 전복하는, 사방에서 밀려오는 “국지적 절대성.”
인디 프로젝트는 신념 때문이 아니라 이게 바로 살 길이라는 믿음에서 가동된다. 자본 이외의 새로운 세계로 미끄러질 수 있는 신체가 되는 것, 자본의 세례를 받고 태어난 우리가 반드시 넘어가야 할 산이다. 홈 패인 공간은 구획하고 조직하고 고정시킬 수는 있어도 ‘생성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 번이라도 속도를 느껴본 자라면 이 생명력을 이해할 것이다.
전사는 부활한다. 폭력의 무익함을 알면서도 재창조되어야 할 전쟁 기계, 능동적이고 혁명적인 반격 기계에 인접해 있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직공들 역시 부활한다. 노동을 믿지는 않지만 재창조되어야 할 노동 기계, 능동적인 저항과 기술의 해방을 이룩할 수 있는 기계에 인접해 있는 사람이 바로 이들이다. … 무기와 도구가 공유하는 도주선.
─같은 책, 774쪽
전쟁기계는 실질적인 무기다. 이 기계는 나의 근육을 지치지 않게 작동시킨다. 나를 고정된 의미에 포획시키지 않을 것, 나의 실패와 잘못과 수치를 ‘나의 것’에 머무르게 하지 말 것, 계속할 것, 하지만 매번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조합의 인디밴드를 만들어낼 것. 무감각한 표면 아래에 더욱더 극렬히 요동치는 희망과 절망이 있고, 그 떨림을 그냥 덮어버리느냐 아니면 그 사이를 정면으로 뚫고 가느냐 이 두 선택이 있을 따름이다. 빌리 조(밴드 Greenday 보컬)가 곡 「Minority」에서 “I wanna be the minority”라고 반복해서 외쳤지만, 글쎄, 이건 단순히 ‘Wanna be’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빌리, 이제 이 노래 부르기엔 너무 시간이 지났어~) 소수자는 길을 걸어가는 와중 어느 순간 ‘되어 있는’ 것이니까.
따라서 투쟁은 정말 다양한 형태를 취할 수 있다.
─같은 책, 7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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