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우먼, 도덕을 묻다
엄마로, 아내로, 며느리로, 직장인으로 어느 하나 소홀해지고 싶지 않아 나는 정말 열심히 살았다. 그러다 보니 나에게는 ‘현모양처, 슈퍼우먼, 무수리’란 별명이 자동으로 붙었다.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내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학창시절 내내 곁눈질 한 번 하지 않고 공부만 했다. 몸이 아파도 지각이나 결석 한번을 안 했다. 직장에서도 예스맨으로 불리며, 야근을 밥 먹듯이 해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결혼 생활도 마찬가지였다. 막내며느리지만 시부모님과 같이 살며 식사는 물론 간식까지 준비해놓고 출근을 했다. 걱정하시기에 저녁에는 외출도 삼가고, 휴가나 여행도 한동안 가지 않았다. 시부모님 두 분 모두 돌아가시기 전까지 일 년 넘게 집에서 병간호도 했다. 이런 삶이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조금만 더 참으면서 착하게 살면 행복할 줄 알았다. 야속한 마음이 들 때도 있었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에게 실망스러웠고 죄스러웠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제는 보살펴드려야 할 시부모님도 안 계시고, 아이들도 더는 내 손길이 필요 없게 됐는데, 나는 오히려 화가 나고 우울했다. 주위에서는 힘든 일이 모두 끝났다고 부러워하는 데 정작 나는 무기력해졌다. 이런 내 모습이 나조차도 점점 불편해졌다.
이 우울함과 불편함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최근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을 만나면서 ‘도덕의 가치’라는 문제를 새롭게 만나게 되었다. 흔히 착하다고 말하는, 즉 엄마로서, 아내로서, 며느리로서 충실하게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내게는 너무나 당연한 도덕이었다. 그런데 니체는 우리가 진리라고 믿고 행동하는 것들이 절대 당연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제까지 “주어진 것으로, 기정사실로, 아무런 문제 제기도 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긴 도덕의 “가치 자체가 일단 의문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니체가 아니었다면 나는 한 번도, 아니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질문이다. 내가 믿었던 도덕에 대해 나는 그것이 정말 맞는 것인지 추호의 의심도 없이 충실히 따르며 살았다. 그런데 니체는 이 당연함에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의 도덕은 당신을 주인으로 이끄는가, 노예로 이끄는가?” 솔직히 나는 당황스러웠다. 이 질문에 선뜻 답을 할 수가 없다. 누가 강요하지 않았는데도 양심의 가책까지 느끼며, 희생과 헌신을 최고의 가치로 둔 내 삶에 의문이 들었다. 나는 왜 그렇게 살았을까?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생각해보면 슈퍼우먼의 내 삶은 사회가 만들어놓은 도덕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을 넘어, 도덕 그 자체를 내면화하면서 나에게 일종의 권력을 느끼게 했다. 모범생이었던 나는 그동안 주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살아왔다. 주위의 칭찬이나 대접은 당연한 것이었고, 대부분 일의 결정권은 나에게 주어졌다. 한마디로 내 말에는 힘이 있었다. 이런 칭찬과 권력은 기존의 도덕과 나를 더욱 일치시키게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정한 기준대로 살지 않는 사람을 무능력하거나 나쁜 사람으로 평가하게 됐다. 또 종종 주변 사람에게 내 기준을 요구하면서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나를 무시하는 것 같아 화가 나기도 했다. 그러기에 희생하고 헌신해야 할 대상들이 사라져버린 지금, 모든 걸 내려놓아야 한다는 허망함이 나를 이토록 우울하고 무기력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외부적 조건을 빌어 나의 도덕을 강화하고, 그 조건이 사라지자 내 삶은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니체가 그토록 비판하는 ‘노예의 도덕’일 것이다. 다시는 이전의 노예 상태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자신의 힘으로 세워나가는 도덕의 가치, 다시 말해 나를 주인으로 이끄는 도덕을 갖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믿고 있는 도덕의 가치들에 대해 따져보고 물어봐야 한다. 그것이 정말 내 삶을 고양하고 행복하게 하는지. 「도덕의 계보학」이 그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글_윤순식(감이당 토요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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