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을 지워라!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아직도 그런 거에 신경 써요?” ‘한부모 가족’이라는 언표 때문에 힘들다는 내게 오랜만에 만난 지인이 한 말이다. 정말 나는 왜 이러고 있는 것일까. 경제적으로도 어렵지 않고 아이들도 잘 자라주고 있는데 뭐가 문제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는 저 언표가 힘든 것이 아니라 남편의 부재 그 자체가 힘든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것으로 인해 내 자아가 타격받았다고 생각되어서였다. 나에게는 삶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완벽함, 완전함’ 같은 이데아 말이다. 이것에 맞춰 내 영토를 일구며 살아왔다. 거기에 흠집을 내는 사람들이 싫었고, 그런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싶지 않았다. 집을 나간 후 깡패가 되어 찾아온 오빠를 만나지 않았던 것도, 아토피가 심한 아이를 귀찮아하고 미워했던 것도 다 그런 이유였다. 자상하고 똑똑한 남편은 내 영토를 촉촉하게 적셔주고 빛나게 해 주는 최고의 존재였다. 이런 남편이 없으니 마치 내 영토가 말라 비틀어져서 초라해진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남편이 중환자실에 식물인간처럼 누워 있을 때 빨리 보내자고 했던 사람이 누구인 줄 아는가. 바로 나다. 온전하지 못한 그를 감당할 자신도 없었고, 무엇보다도 그로 인해 내 삶이 엉망진창 되는 게 싫었다. 그러고 보면 지금 나는 건강할 때의 남편만을 기억하며 아쉬워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지독한 탐욕이다.
그동안 여러 텍스트들을 읽었지만 이런 내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게 된 것은 『천 개의 고원』을 만나면서였다. 보다시피, 나는 나를 중심으로 놓고 모든 것을 대상화하면서 재단하고 있다. 나를 빛나게 할 수 있느냐 없느냐로 말이다. 이것을 들뢰즈와 가타리는 ‘흰 벽(뺨)과 검은 구멍(눈)’이라는 ‘얼굴성’으로 설명한다. ‘얼굴’이란 타인에게 나를 전달하는 채널이다. 표정을 통해 내가 드러나는데 이는 ‘얼굴성’이 작동하고 있다는 뜻이다. 즉 내 안의 확고한 관념을 흰 벽에다 적어놓고서는 그것에 맞춰 사람들을 줄 세우고, 그런 다음 검은 구멍 안으로 빨아들일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남편, 공부, 감이당은 yes! 깡패, 아토피, 불구는 no!’라는 식으로. 결국 동일화하거나 배제하는 것, 이것이 ‘얼굴성’이 가진 실체이자 폭력이다. 그런데 ‘얼굴성’은 자의식을 작동시키기도 한다. 자의식이란 세상 사람들이 나(얼굴)를 보고 있다는 망상이다. 여기에 매몰되면 끊임없이 자신을 검열하고 인정 욕망에 시달리게 되는 것은 안 봐도 뻔하다.
이제 알 것 같다. 내가 사람들의 반응에 촉각을 세우며 감정의 동요가 심했던 것도, 일이 잘못되었을 때 자책하며 나를 몰아세웠던 것도 모두 ‘얼굴성’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생명 에너지를 엉뚱한 곳에 낭비하고 있는데도 멈추지 못하는 어리석음! 그래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자의식을 깨뜨릴 것을, 다시 말해 나를 덜어내고 얼굴을 지울 것을 강력하게 요구한다. 한마디로 ‘주체의 해체’인데 이것은 『천 개의 고원』을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사실 열다섯 개의 고원이 펼쳐내는 이야기가 모두 다른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각각의 고원은 ‘얼굴성’에 대한 변주곡임을 알게 된다. 즉 하나의 욕망만을 꿈꾸며 위계를 설정하는 수목적 삶, 무의식 안에 ‘수많은 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엄마-아빠-나로 환원해버리는 정신분석, 고정관념들로 지층화되어 있는 몸, 의사소통이 아닌 명령어가 되어 버린 일상의 대화 등은 알게 모르게 주체를 상정하는 모습들이다.
그런데 들뢰즈와 가타리는 왜 이렇게까지 파고든 것일까. 그건 얼굴을 해체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것과의 전쟁을 선포하는 것의 다름이 아니리라. 그렇다. 이제 나도 『천 개의 고원』을 무기로 삼아 얼굴을 지우는 전쟁에 참여하려 한다. 이것이야말로 나를 진정 배려하고 살리는 길이기에.
글_ 김지숙(감이당 금요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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