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목소리로 노래 부르듯 철학하기
읽을 수 없던 책, 『안티 오이디푸스』가 돌아왔다. 내게는 꽤 심란한 복귀였다. 3년 전에도 기회가 있었지만 이해하지 못한 책이었기 때문이다. 욕망 기계니 기관 없는 신체니 하는 개념들과 설명 없이 서술되는 방식이 너무 낯설었다. 그러나 지금의 한계에 도전하고 나만의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책을 공부하라는 선생님의 조언에 따라 이 책을 다시 읽어보기로 했다.
하지만 여전히 책은 어려웠고 이 책으로 무슨 이야기를 할지, 문제의식도 잡히지 않았다. 이것은 나의 고질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나는 친구들처럼 불편하거나 괴로운 문제들, 나만의 문제의식을 발견하지 못했다. 왜 안 되는 걸까? 결국 나는 예정된 합평시간까지 헤매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친구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뭔가가 희미하게 느껴졌다.
나는 문제의식이 없는 게 아니라 힘들거나 불편할 때에도 “그렇다”고 말하는 걸 피하고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며칠 후 10살 무렵의 엄마가 떠올랐다. 엄마는 당당하고 정직한 성품에 마음이 고운 분이다. 그런 엄마가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아버지의 고향으로 내려와 철없고 이기적인 아버지 때문에 고생하시는 것이 어린 눈에도 마음 아팠다. 엄마가 외로워 보일 때도 활기차 보일 때도 엄마가 안쓰럽고 걱정스러웠다. 나라도 엄마에게 힘이 되는 좋은 딸이 되고 싶었다. 그 무렵부터 나는 뭔가를 요구하지도, 엄마가 걱정하실 만한 일도 말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엄마 마음의 무게를 더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30여년이 지났건만 나는 여전히 어린 시절을 살고 있었다. 더 이상 아이도 아니고 누가 강요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때처럼 늘 별일 없다고 말하면서 내가 원하는 것보다 의무에 충실했다. 어떤 사건이 와도 나만 겪는 일이 아니라며 지나보내고 내 의견을 말해야 할 때도 상대방을 생각하느라 주저하기 일쑤였다. 그렇게 내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잊고 산 것이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모든 존재를 욕망 기계들의 복합체로 이해한다. 몸과 마음 할 것 없이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모든 것이 욕망 기계이며, 몸 안의 무수한 세포와 조직이 그러하듯 욕망 기계는 다른 기계와의 연결을 통해 무언가를 주고받으며 자기 식의 운동을 한다. 욕망 기계는 말한다. “우리는 의미가 아니라 오직 활동을 통해 살아남았다!” 그러나 우리에겐 늘 의미가 중요하다. 누군가, 어떤 조건이 되길 바라고 그것을 위해 본래의 자신을 포기하기도 한다. 기꺼이 각자의 욕망 기계들을 억압하면서. 의미를 위해 사는 서글픈 인간이 된 것이다.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들뢰즈와 과타리는 “정신분석은 삶의 노래여야 하리라. 그렇지 않다면 아무 가치도 없다. 실천적으로, 정신분석은 우리에게 삶을 노래하는 법을 가르쳐 주어야 하리라.”고 말한다. 여기서 정신분석은 철학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철학이란 무엇보다 자기 목소리로 우리와 세상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자기만의 음색과 멜로디로 부르는 노래가 다른 이들의 마음에 가닿고 다시 그들을 노래하게 하듯이, 철학은 고독한 웅변이 아니라 사람들을 연결시키고 함께 부르는 노래이기도 하다. 스스로를 억압하며 목소리도 없이 살던 내게 노래하는 법을 배우라 말하는 듯했다.
그렇다. 내 목소리를 찾아야 하는 이유는 나를 묶고 있는 의미들로부터 독립해 스스로를 해방시키고 나 자신으로 살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노래가 사람들을 이어주듯 스승과 친구들을 찾아 노래를 배우고 함께 부르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이 책을 기쁨으로 썼다고 했다. 나 역시 이들의 책을 통해 마음 속의 무거운 지층들을 털어내며 기쁨으로 읽고 있다. 나의 욕망 기계들이 노래를 부르듯 도처에서 기능할 때까지 철학하기를 멈추지 않겠다. 포기하지 않는다. 욕망 기계들처럼.
글_이세경(감이당 토요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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