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로 생각을 다스리다
한의학을 공부할 때 재미있는 것 중의 하나는 오장육부가 생리적 기능 뿐 아니라 정지(情志)의 기능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간/담은 분노를, 심/소장은 기쁨을, 비/위는 생각을, 폐/대장은 근심을, 신/방광은 두려움을 담당한다. 그래서 어떤 장부의 기운이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부족하거나 지나치게 많으면 그 장부가 담장하는 감정도 균형을 잃는다. 가령 간/담의 기운이 부족하면 분노를 하고 힘을 내어 말해야 할 상황인데도 움츠려들게 되고 반대로 간/담의 기운이 지나치면 과도하게 화를 내고 사고도 저지를 수 있다. 반대도 가능하다. 화를 지나치게 내거나 혹은 자주 위축되다 보면 간/담이 상할 수 있다. 이로 볼 때 우리 몸의 상태와 감정, 사유는 별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러한 정조가 오행(五行)과 척척 맞물려 있다는 점도 재미있다. 간/담의 분노는 목(木), 심/소장의 기쁨은 화(火), 비/위의 생각은 토(土), 폐/대장의 근심은 금(金), 신/방광의 두려움은 수(水)에 배속된다.
어떤 부인이 생각을 지나치게 하여 병이 나서 2년간이나 잠을 자지 못하였다. 대인(戴人)이 보고나서 말하기를 “양손의 맥이 다 완(緩)하니 이것은 비(脾)가 사기(邪氣)를 받은 것으로 비는 생각하는 것을 주관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의 남편과 의논하여 부인을 격동시켜 성을 내게 하기로 하고, 대인은 많은 재물을 받고 며칠간 술을 마시다가 한 가지 처방도 써주지 않고 돌아갔다. 그러자 그 부인은 몹시 성이 나서 땀을 흘리다가 그날 밤에는 곤하게 잠들었는데 그렇게 8~9일 동안 깨어나지 않고 잤다. 그 후부터 밥맛이 나고 맥도 제대로 뛰었다. 이것은 담(膽)이 허(虛)하여 비(脾)가 지나치게 생각하는 것을 억제하지 못했기 때문에 잠을 자지 못했던 것인데 지금 성을 내도록 격동시켜 담이 다시 비를 억제하였기 때문에 잠을 자게 된 것이다.
- 「내경편」 ‘몽’ 331쪽
2년간이나 잠을 제대로 못자는 이 부인. 얼마나 괴로웠을까? 잠을 못자는 것은 노역보다 더한 일이다. 의사는 생각을 많이 한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맥으로 볼 때 비장이 상한 것으로 나타나서이다. 비장은 생각을 주관한다.
한의학에선 비장을 간의지관(諫議之官)이라 부른다. 군주가 함부로 생각하지 않고 감정을 쓰지 않도록 군주에게 간언하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군주는 누구인가? 바로 심장이다. 심장을 군주지관(君主之官)이라고도 한다. 모든 정신적인 사유와 감정을 심장이 총괄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비장은 군주(심장)의 이러한 생각과 감정이 독선과 아집으로 뭉치지 않도록 간언해서 견제하고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자신의 사유와 감정을 바라보고 관찰해서 독단으로 굳어지지 않도록 숙고하고 감정에 휘둘리지 않도록 감정을 이성적으로 해석하는 능력. 이게 비장의 생각(思)이다. 심장의 혈이 온 몸 구석구석까지 흘러가듯 비장의 견제를 받은 심장의 사유와 감정은 뭉치지 않고 온 몸을 적셔줄 터이다. 서양에서도 생각을 중시하는 생각을 한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숙고를 ‘로고스’라 부르면서 로고스로 우리의 무지를 깰 수 있다고 보았고 니체는 이러한 생각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찾아온다’면서 생각이야말로 인간의 ‘품위’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비장에 문제가 생기면 생각에 견제와 조절을 할 수 없어진다. 그냥 아무 생각이나 꼬리에 꼬리를 물며 밑도 끝도 없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잠들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잠들지 못하다 보니 생각이 끊임없이 일어났을 수도 있다. 달걀이 먼저인지 닭이 먼저인지 모를 일이지만 처음과 끝을 알 수 없게 돌고 도는 이 악순환의 고리를 어떻게 끊을 것인가?
의사는 비장의 문제를 담의 문제로 보았다. 비장은 담과 긴밀한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그렇듯 장부도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장부와 맺는 관계, 그 자체가 장부이다. 한의학에서 비장은 담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비장은 오행으로 볼 때 토(土)이고 담은 목(木)에 속한다. 토와 목은 어떤 관계일까?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나무는 언 땅을 뚫고 땅위로 싹을 내민다. 그 춥고 언 땅을 뚫을 정도이니 매섭고 힘찬 기운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의 감정으로 치면 분노에 해당한다. 땅의 입장에서는 나무로부터 시련을 당하는 셈이다. 하지만 땅은 이런 시련을 당함으로써 자신의 기운을 좀 덜어내어 땅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다. 땅의 기운이 지나칠 때는 더욱 그렇다. 이렇게 나무가 땅에게 하는 것처럼 오행끼리 서로를 억제하는 것을 ‘극(剋)한다’고 한다. 나무와 땅은 목극토(木剋土)의 관계다. 나무가 땅을 제압하는 격이다.
의사는 이러한 오행의 상극원리를 이용하여 약이나 침을 쓰지 않고 감정으로 치료했다. 비장의 생각이 과도하니 이를 덜어내는 것, 즉 억제를 당하는 것이 치료다. 토를 억제할 수 있는 것은 목인데 목에 배속된 장부는 간과 담이며 이들은 분노를 주관한다. 그래서 부인의 남편과 짜고 부인이 화가 나도록 연출하고 연기한 것이다. 부인이 8~9일 동안이나 깨어나지 않고 잤다하니 감정으로 생각을 치료한 효과가 이렇게 클 줄이야!
오행의 상극원리를 알면 이처럼 감정만으로 간단하게 치료할 수 있는 경우도 한의학에는 있다. 하지만 오행을 몰라도 우리는 일상에서 이런 식의 치료를 스스로 하고 있지 않을까? 뭔가 답답하고 망상만 하게 될 때 크게 소리를 지르거나 한바탕 누구와 말다툼만 해도 시원해지며 기혈이 순환되는 경우 말이다. 오행의 원리도 이러한 일상의 수많은 경험들을 종합하여 만들어낸 건 아닐까?
글_박정복(감이당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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