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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슬기로운복학생활

‘꼰대 탈출’ 탈출 프로젝트

by 북드라망 2019. 5. 16.

‘꼰대 탈출’ 탈출 프로젝트



꼰대 혐오


“(소근소근) 야, 옆 테이블에 앉은 애들 우리 과 18학번들이야.” 술집에서 우리는 후배들과 최대한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잘 모르는 사이이기도 했고, 딱히 친해질 이유도 없었으며 무엇보다도 후배들 술자리에 나타나는 선배는 그야말로 꼰대의 정석이기 때문이다. 인사를 하는 것도, 인사를 받는 것도 피하고 싶은 묘한 불편함. 우리는 술집에 들어가기에 앞서 거기에 아는 사람이 있는가를 먼저 살피는데, 그때 선배들보다 꺼려지는 것은 후배들이다. 선배들이야 ‘요주의 꼰대’만 조심하면 상관없지만 후배들은 그게 누가 되었건 왠지 경계하게 된다. ‘쟤들이 우리를 어떻게 볼까’를 늘 염려하고, 혹여 우리가 그들에게 꼰대의 ‘ㄲ’으로라도 비춰질까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꼰대를 혐오한다. 누군가에게 꼰대로 여겨진다는 것은 정말 참을 수 없는 일이다. 매 술자리마다 안주로 씹히는 존재이자 SNS상에서 늘 척결되어야 할 대상으로 등장하는 꼰대. 요즘에는 꼰대 테스트, 꼰대 대처법, 젊꼰(젊은 꼰대),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한 지침 같은 말들이 유행하고 《꼰대의 발견 : 꼰대 탈출 프로젝트》라는 책이 나올 정도로 너도나도 꼰대를 혐오한다. 나 역시도 꼰대가 싫다.


이날 술자리의 주요 화제도 역시 꼰대에 관한 것이었다. 우리는 왜 이렇게 꼰대를 ‘극혐’하게 되었을까? 그리고 우리가 그토록 혐오하는 꼰대는 누구인가?



꼰대의 계보


다양한 꼰대의 유형 중에서도 가장 전형적인 것은 “나 때는 말이야~.”라는 멘트를 날리는 ‘참전용사형’ 꼰대이다. 마치 반세기 전의 한강의 기적을 경험한 듯 자기가 겪은 어려움과 요즘 것들의 말랑함을 비교하는 자들. 정말 한두 세대라도 차이난다면 모르겠지만 대학교에서 선후배로 만났다는 것은 불과 몇 년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거기에 ‘예의’, ‘기본’을 강조하며 늘 실망하는 ‘프로실망러’기질까지 더해진다면 스테레오타입의 꼰대가 완성된다.


우리 과에는 누구나 “아~ 그 선배?”하고 떠올리는 만인의 꼰대가 있다. 바로 내가 학생회를 할 때 학회장이었던 부산사나이, 12학번 이OO. 그는 숭고한 옛 선후배 문화를 복원해 무질서해진 요즘의 세태를 바로잡기 위해 분투하며 임기 내내 모든 재학생들에게 자신의 ‘꼰대력’을 인증했다. 평소 축구할 때 유독 소리를 질러댔던 그는 회의 때마다 훈계와 지적을 일삼고, 단톡방 마다 예의범절을 강조하는 장문의 경고 카톡을 뿌렸다. 과 총엠티에서 학생회를 모아놓고 무전기를 집어던짐으로써(웃기지만 우리과는 원활한 행사 진행을 위해 엠티 때마다 무전기를 사용한다) 정점을 찍었던 그의 꼰대력은 내가 제대하고 복학했을 때에도 여전했다. 어느 날 동기들이 모여 있다는 전화를 받고 간 술집에 그가 떡하니 앉아있었다. 둘러보니 모두 15학번들인데 어째서 이 작자가 이렇게 취한채로 여기에 끼어있는 거지? 동기들 표정을 보니 감이 왔다. “민호야, 내는… 소올찍히 좀 실망했다?” 나는 취해서 발음도 못하는 그에게 30분 넘게 훈계를 들었고, 3시가 다되어 그를 팔짱껴 집 앞까지 데려다 주고 나서야 집에 올 수 있었다. 몸도 못 가누는 채로 계산은 자기카드로 하라는 그 버릇도 여전했다.


최근에는 전설의 꼰대가 학교주변을 어슬렁거린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얼마 전에, 태곳적에 학회장을 지낸 09학번 안OO 선배가 술집에서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18학번 후배들을 붙잡아두고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는 사건. 그 자리에 있었던 내 친구는 그날의 악몽을 잊지 못해 사지를 떤다. 그 자가 아직도 학교에 출몰하며 꼰대짓을 한다는 사실은 공포 그 자체였다. 이 외에도 우리에게는 다양한 꼰대들의 리스트가 공유되어 있고, 몇 학번의 누구는 절대로 피해라, 인사나 카톡 답변은 어떻게 해라, 하는 식의 행동 요령이 알려져 있다. 학교에 다니기만 해도 알 수 있고, 알아야만 학교를 다닐 수 있는 꼰대들의 계보.



‘꼰대 혹은 좋은 선배’의 저편...


사람들은 꼰대를 욕한다. ‘여혐’, ‘남혐’이 이슈가 되어 한참 혐오 문제가 이야기될 때에도, ‘꼰혐’만큼은 걸릴 것 없는 불가침의 영역으로 보존되어 왔다. 유병재 같은 사이다 발언을 한다는 셀럽들은 너도나도 달려들어 꼰대를 욕한다. 책이나 신문 칼럼에서는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한 ‘꼰대 탈출법’을 알려준다. 그런 것들을 보고 있으면 속이 시원하면서도 어딘가 찜찜하다. 꼰대가 싫지 않다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불쌍하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왜 이렇게 예외 없이 모두가, 심지어는 꼰대(라고 불리는 이)들조차 꼰대를 싫어하게 된 건지가 의아하다. 나만해도 그렇다. 나는 뭐 대단한 꼰대질을 당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이토록 꼰대들을 혐오하는 거지? 생각해보면 어느 시대에나 선배나 상사 같은 윗사람들은 있었을 텐데, 왜 요즘은 유독 이렇게까지 모두가 나서서 꼰대를 만인의 적으로 만들어 버리는 걸까?


나는 항상 좋은 선배이고 싶었다. 중·고등학교 그리고 군대를 거치면서도 그러한 열망은 변함이 없었다. 좋은 선배를 꿈꾸며 나는 후배나 후임들을 못 살게 구는 놈들을 손가락질하고 비난했다(물론 무서운 형들은 뒤에서만). 그리고 나 자신은 언제나 친근하고 잘 해주는 동시에 유머러스한, 그런 선배이고자 했다. 아주 바른 형이자 선임이고 싶어 했고, 스스로 어느 정도 그렇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좋은 선배’라는 나의 신념은, 꼰대들을 뒷담화하는 동시에 꼰대가 되지 않고자 쩔쩔매는, 어느 모로 보나 소극적인 태도로 귀결되어버렸다.



대학에서의 학우들은 분명 매주 같은 강의실에서 수업을 듣더라도 ‘모르는 사이’이다. 분명 서로 얼굴을 알고 경우에 따라 이름도 알지만 공식적으로는 ‘모르는 사이’이기에, 서로 인사하지 않고 말하지 않는다. 혹시 용건이 있어 이야기를 나누더라도 서로 존댓말을 하는 것이 예의이고 기본이다. 나에게는 후배들과의 관계에서 이 ‘낯설지 않은 타인’이라는 묘한 선을 침해하면 98% 꼰대로 비춰질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다. 어딘가 답답하지만 그래도 그런 매너를 유지하는 것이 좋은 선배가 되기 위해, 적어도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절대 꼰대질 하지 말자” 꼰대 욕을 한참 하고 나면 우리는 그들과 다른 정의롭고 선량한 선배들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고 나서 선배나 후배들을 만나면 그 미묘한 거리감이 여전히 답답하고 불편하다. 나 자신은 올바름을 지켜낸답시고 용을 쓰고 있지만 이런 관계는 너무 이상한 것 같다. ‘난 적어도 꼰대는 아니야’라는 소극적인 자기 정당화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혹시 내가 지키려는 그놈의 ‘올바름’이 선배나 후배라는 그 관계 자체에 대해 생각하기를 막고 있는 것이 아닐까? ‘좋은 선배’의 상이니 反꼰대주의니 하는 핑계 뒤에 숨어서 관계 맺기 자체에 대한 고민을 미뤄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꼰대를 혐오하는 것이 어찌어찌 나의 올바름을 지켜냈는지는 모른다. 그런데 백날 꼰대 혐오를 외친들 결코 나를 슬기롭게 해주지는 않을 것 같다.


글_민호(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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