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헤스, 『칠일 밤』
- "열반에 이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만약에 '열반에 이르기 위해 산다' 또는 '자유가 삶의 목적이다'라고 하면 어떨까? 어떻게 해야 '열반'에 이를 수 있는지, 궁극의 '자유'를 얻을 수 있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저렇게 해서는 안 되리라는 확신이 있다. '~를 위해'라는 형식이나 '목적'에의 지향과 '열반', '자유'가 서로 모순이기 때문이다. '~위해' 살면 열반에 이를 수 없고, 자유가 '목적'이 되면 자유로울 수가 없다.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쉬운 길, 가장 쉽기 때문에 바로 생각이 나는 그 길은 그렇게 막혀버린다. 여기에서 '길'에 대해 생각할 수 밖에 없는데, 이때의 '길'은 어딘가에 이르기 위한 길이 아닌 셈이다. 시작도 끝도 없는 길이랄까? 그래서 그 '길'은 파여 있거나, 돌을 놓아 만든 길이 아닐 것이다. 차라리 '길'이 곧 전체다,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다만 이것이 몸에 붙지를 않아서 나는 길을 잃을까 두렵고, 그래서 어딘가에 도달할 길을 찾고, 그림자가 난 방향을 보고 가는 길을 짐작한다. 그러는 사이에 분별하게 되고, 의지하게 되고, 즐거워하고, 애착하고, 노여워하다가, 운다. '자연스럽다'면 자연스러운 이 반응들이 가끔 굴레로 느껴져 답답할 때가 있다. '열반'까지는 바라지 않으니 부디 두려움이 줄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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