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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좋다

[불교가좋다] 만족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by 북드라망 2018. 10. 16.

만족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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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1 : 충동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지는 게 좋을까요?  

저는 평소 충동이나 욕구를 잘 따르는 편입니다. 얼마 전 다녀온 긴 여행 속에서 그런 저 자신의 모습을 더 잘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충동을 바로바로 따르다 보니 재미있는 사건이 생기기도 하는 반면 스스로를 위험에 처하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경험을 계기로 충동에 쉽게 휩쓸리는 모습에 대한 경각심이 생겼습니다. 니체는 충동은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을 충족시키기 마련이라고 했는데, 충동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지는 것이 좋을까요?

 

정화스님 : 충동이건 동기유발이건 간에 도파민이라는 하나의 신경조절물질에서 일어납니다. (도파민이) 100 정도 나왔다고 하면 ‘하고 싶다’정도의 동기유발이고, 200이 일어나면 그 일을 충동적으로 하게 됩니다. 보통 일을 할 때처럼 ‘내가 할 만한 일이다’라는 생각을 하며 하는 게 아니라 충동적으로 일을 하게 될 때는 ‘내 머릿속 도파민의 분비량이 평소보다 높아졌구나!’하고 빨리 알아차려야 합니다.

도파민은 동기도 되고 충동도 됩니다. 같은 것이지만 양이 많아질 때 충동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판단해서, ‘내 경계는 여기인데 이렇게 왔으니 충동적이다’라는 생각이 들 때는 자기 생각을 빨리 들여다보고 (도파민) 양이 좀 줄때까지 신체가 편안하게 있을 수 있도록, 그 시간이 지나가도록 쫓아가지 않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안에서는 신경조절물질의 양이 조절이 안 돼요.

도파민이 나오면 그냥 하고 싶어집니다. 아까 말한 대로 위험한 것도 하게 됩니다. ‘그러면 다쳐!’라고 말해도 무시하고 하게 됩니다. 생각으로 이렇게 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신체에 조절물질이 과잉돼서 일어난 일입니다. 마음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마음이 될 뿐인 겁니다. 그때는 조용히 허리 펴고 앉아서 그것이 지나가도록 신체를 조율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조금만 흘러가도록 두면 양이 떨어지면서 ‘하고 싶다’ 정도의 일이 됩니다. 양이 많아지면 지나쳐 위험할 수 있습니다. 계속 그것을 추구하면 중독이 되는 거고, 그렇지 않고 순간순간의 양이 많아지면 충동적으로 하게 됩니다.


> 질문 2 :​ 만족하는 삶을 사는 방법을 알고 싶습니다.  

만족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만족하는 것도 선택하는 것일​ 텐데, 그렇게 선택하는 방법을 알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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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스님 : 선택이 아니고, 내가 선택한 것이 내 삶의 전부라고 빨리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내가 순간순간 선택한 것밖에 자기 삶이 없습니다. 내가 여기 앉아 있는 동시에 어디에 갈 수가 없습니다. 즉, 이거 자체가 선택된 행동이거든요. 매 순간순간 여러 가지 우연과 필연이 겹쳐서 선택된 것인데. 선택된 것밖에 자기 삶이 없어요. 어떤 것이 선택됐기 때문에 만족스러운 내 삶이 되고, 어떤 것이 선택되지 않았기 때문에 만족스럽지 않은 내 삶이 아니라, 매 순간순간 선택된 것 밖에 없어요. 그래서, 이것 이외에 다른 존재나 활동으로서 내가 없다는 것을 빨리 생각을 해야 해요. 그리고 이것을 내가 어떻게 볼 것인가는 감정의 학습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것밖에 없는 내 삶인데 거기에 대해서 '야, 너는 인생을 왜 이렇게 살아?'라고 학습할 수 있는 거예요. 반대로 이것밖에 없는데 '이렇게 좋은 인생이야'라고 학습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선택은 매 순간 일어나고 그 선택 속에는 항상 감정이 개입되게 되는데. 그 순간순간 어떻게 개입시킬 것인가가 굉장히 중요해요.


연습을 해야 해요. 무슨 이게 만족이야, 이런 건 소용이 없어요. 내가 해석을 만족으로 하면 그때 내 선택은 만족스러운 거예요. 99억을 가졌는데 100억이 없어, 라고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고, 990만원 밖에 없는데 이렇게 많이 있어, 라고 선택할 수 있는 것이고. 다른 사람이 어떻게 선택하는가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선택된 것을 어떤 감정으로 접근하는가가 자기 인생이에요. 그것밖에 없어요. 자기의 선택은 매 순간 선택하면, 선택됐잖아요? 그러면 흩어져요, 안에서 바로. 1000분의 1초 사이에 모였던 것이 흩어져 버려요. 그리고, 다시 또 모여요. 지금 제가 이야기하면 한 이야기가 쭉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잖아요. 근데 실제 내부에서는 1000분의 1초 사이에 이 이야기가 전부 다 흩어졌다 모였다 흩어졌다 모이기를 반복해요. 그래서 불만족의 감정도 잘 들여다보고, 이 흩어지는 기간 사이에 만족스러운 감정을 잠깐씩 집어넣는 훈련을 하면 그 길들이 바뀌는 거예요.

 

  

> 질문 3 : 저는 요즘 니체의 글을 읽고 있는데 너무 어려워요. 무슨 뜻인지 모르겠고.

 

정화스님 : 니체와 우리는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지금 우리는 그 사람들의 글을 읽는다기보다는 모르는 단어를 알아가는 중이라고 생각해야 해요. 철학서나 과학서나 처음에는 전혀 뭔 말인지 모르는 책들입니다.


니체는 그 시대에 새로운 철학 언어를 만든 것이에요. 그 시대 사람들은 물론 일반 사람들은 못 알아듣는 말을 한 거예요. 철학이나 과학들이 우리 언어 밖의 것을 설정해 놓고 그 언어를 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 언어에 익숙해지지 않는 한, 즉 한 페이지 당 몇십 % 이상의 단어를 이해하지 않는 한 그 글 내용을 알 수 없는 것이에요. 그래서 지금은 그 단어를 늘려가는 것이 공부하는 것이지, 그걸 읽고 다 알 수는 없습니다. 철학이란 새로운 개념의 언어를 만들어서 사회 일반을 자기 식대로 해석해놓은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지금 우리가 ‘아, 책이 어렵다’라는 말을 하는 건 공부를 하고 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도 안 어렵다고 한다면 공부가 안 되는 것입니다. 공자님이 ‘학이시습지’ 라고 말한 것 알지요. 學(학)은 배우는 것. 시습(習)은 습관이 되는 거예요. 배우기는 했는데 우린 습관이 안 된 거예요. 그래서 고전은 다른 언어를 배워서 자기 신체화를 시키는 과정인 거예요. 그러니 당연히 어려운 거예요.



> 질문 4 : 공부를 계속 해야 할지 고민입니다.​  

이곳에 공부하러 다닌 지 오래됐습니다. 처음에는 즐거운 마음으로 다녔는데, 알아보는 사람도 많아지고 ‘글에 발전이 없다’라는 코멘트를 듣기도 합니다. 그런 코멘트를 받는 것은 괜찮지만, 차라리 다른 공부를 해보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이곳을 계속 다녀야 할지 고민됩니다. 제가 지적 허영심이나 교회에 은총을 받으러 오듯 오는 것은 아닌지 싶습니다.

 

정화스님 : 그 사람은 나에 대해 모르고 하는 얘기입니다. 그런 얘기를 듣는다면, ‘저 사람은 괜히 쓸데없이 다른 사람 일에 끼어든다’라고 속으로 생각하세요. 내가 하는 일이 즐거우면 됩니다. 그 사람은 나를 모릅니다. 자기가 만들어놓은 색깔로 좋은 것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그 속에 공유된 부분이 서로 다릅니다. 뇌는 기본적으로 속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언어를 만들 때 공유된 부분이 전체인 것처럼 언어를 배웠습니다. 그 언어에 들어있는 개인적 차별성이란, 내부적으로는 차별적으로 이야기하지만 실제 외부적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언어가 가지고 있는 한계만큼만 속자라는 말과 같습니다. 하지만 나한테 느껴질 때는, 그 얘기가 마치 바른 말을 해주는 것처럼 착각이 일어납니다. 따라서 거기에 속을 필요가 없습니다. ‘나를 속이는 말이구나’ 라고 슬쩍 돌리는 연습을 하면 됩니다.


정리_잘읽자 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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