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가 운다, 아기는 운다, 아기는 원래 운다
- 무심한 듯 시크하게
“탕, 탕, 탕”
아빠는 딸에게 막 이유식과 분유를 먹이고 전쟁터가 된 부엌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또 ‘탕, 탕, 탕’, 아빠는 이게 무슨 소린지 안다. 우리 딸이 체중계를 두드리는 소리다. 굉장하다. 누워서 꼼짝도 못하던 그녀가 뒤집더니, 상체를 들더니, 양다리를 허우적거리더니, 긴다. 아빠가 한쪽 손을 잡고서 억지로 박수를 쳐주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손을 번쩍 들어서 눈 앞에 있는 모든 물건(아빠 포함)을 두드리려 든다. 이 두 가지, 기는 것과 두드리가 합쳐져 오늘의 저 굉장한 소음을 만들어낸 것이다. 아기는 정말 느릿느릿 빨리도 큰다.
잽싸게 설거지를 마친 아빠는 체중계 두드리기에 열중하는 딸을 들어 옮긴다. 체중계를 두드리는 소리는 이웃에게 피해를 줄 정도로 크다. 또 그걸 두드리다가 책장 모서리 같은 곳을 쳐서 손을 다칠 위험도 있다. 옮기는 수밖에 없다. 딸의 기분이 괜찮을 때는 기꺼이 아빠에게 몸을 맡기지만, 심기가 조금 불편할 때는 ‘들려 옮겨지는 것’이 대단한 굴욕이라도 되는 양 떼를 쓰며 우는데, 그럴 땐 대신 두드릴 걸 마련해 주어야 한다. 대개는 아빠의 손바닥을 내어준다. 그러면 딸은 금세 아빠 손바닥 두드리기에 열중한다.
여하간 요즘은 기는 실력이 나날이 일취월장 하다 보니 이런저런 방법으로 울타리를 쳐놓지 않으면 안 된다. 평상시에 세워놓는 울타리는 그저 가림막 수준이어서 쉽게 무력화 된다. 그러나 아빠가 일을 하려고 마음먹고 튼튼한 울타리를 칠 때가 있다. 손으로 밀어도, 머리로 들이받아도 무너지지 않는 그 울타리 앞에서 우리 딸은 운다. 갑갑한 모양이다. 아빠는 그때의 울음도 신기하다. 그녀의 신생아 시절, 울음의 이유는 배고픔, 졸림, 기저귀 젖음, 더움, 추움, 주사맞아서 아픔 같은 그야말로 즉물적인 것들뿐이었다. 우리 딸이 이렇게 커졌는가. 이제는 행동의 제약에서 오는 갑갑함 같은 걸 느끼고 울다니! 딸이 신생아였을 때 아빠는 주사를 맞고 금세 울음을 그치는 모습이 정말 신기했었다. 그러니까 아픔이 사라지면 바로 울음을 그쳤던 것이다. 분하다거나, 슬프다거나 뭐 그런 이유로 울지 않는다는 점, 아무 자의식 없이 철저히 몸의 감각에 충실한 그 모습이 너무나 신기했었다. 그러나 이제 그런 시절은 다시 오지 않을 과거가 되었다. 우리 딸은 슬슬 ‘의지’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있는 하다.
서점엘 나가 보면, 또는 인터넷 서점에서 보면 정말 많은 육아책들이 있다. 그걸 다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본 여러 육아서적들에서 공통으로 주문하는 사항이 있다. 그것은 바로, ‘아기의 울음에 민감하게 반응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기가 울음에는 대개 이유가 있고, 양육자가 거기에 민감하고 즉각적으로 반응해야만 아기도 인지하기 때문이다. 뭐를? 울면 불편이나 욕구가 해소된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까 ‘울음’은 아기의 언어인 셈이다. ‘돌봄’이 원활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인지한 아기가 정서적으로 더 안정적으로 성장한다고 한다.
아기가 우는 것이 다 똑같은 것 같지만, 실제로 아기와 하루 종일 있어보면 울음이 조금씩 다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배고플 때, 졸릴 때, 아플 때, 짜증날 때(!)까지 저마다 특징적인 차이들이 있다. 우리 딸의 경우엔 배고플 때 우는 울음이 가장 크고, 크고, 크다. 200일을 전후로 이 울음들이 조금씩 분화되고 있는 것 같은데 이를테면 울음의 한 범주라고도 볼 수 있는 ‘칭얼거림’이 꽤 잦아졌고, 자다가 깼을 때 엄마와 아빠 모두가 시야에 없을 때는 그야말로 불쌍하게 통곡을 한다. 무서운 듯 하다. 이건 기지도 못하던 때에는 들어본 적이 없는 울음이다. 물론 울음이 다양해지는 것과 동시에 표정이나 웃음, 소리도 다양하게 분화 중이다. 아마도 이 분화의 와중에 평생 우리 딸의 마음속에 자리를 잡고 있을 근본 정서가 만들어지고 있지 않을까 싶다. 말하자면 ‘인스톨’ 과정 같은 것이리라.
그렇게 생각하고 아기를 보면, 자연스럽게 나, 그러니까 아빠의 아기 시절을 상상하게 된다. 저 시기에 나는 어떤 아기였을까? 부모님께 들어온 단편적인 여러 정보들과 오늘의 나를 숙고해 결론을 내어보니 좀 더 나은 인간이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기분이 들어서인지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그리하여 아빠는 딸의 울음에 민감하게 반응해가며 열심히 돌본다. 물론 ‘열심’과 열심의 결과는 별개의 것이다. 그뿐인가. 가끔은 힘들기도 해서 ‘열심’마저 구석에 돌돌말아 쳐박아두기도 한다. 이를테면 아기는 더 놀고 싶은데 도저히 체력이 방전되서 더 놀아줄 수 없을 때, 아빠는 아기를 바운서에 묶어놓고 옆에서 잔다. 신기한건 아빠가 자고 일어나 보면 아기도 자고 있다. 불쌍하게 말이다. 그뿐인가, 기저귀에 이미 파란줄이 뜬 게 보임에도(쉬를 하면 노란줄이 파란색으로 바뀐다) ‘에이 한 번쯤 더 싸면 갈아주자’ 하며 못본 척 하기도 한다. 이 외에도 다양한 예들이 있다. 더 늘어놓을 수도 있지만 비밀이다.
그러니까 당장 내 몸이 힘들어서 아기를 한 번씩 내버려두는 것인데, 대개의 경우는 딸이 울지 않고 견딜 만한 선에서 그러는 것 같다. 그러나 아빠가 실수로 딸이 허락한 방치의 범위를 넘어설 때면, 딸은 사정없이 자기 주장을 펼친다. 울음으로. 그럴 때는 당장의 불편을 해소해주면 된다. 문제는 당장 그렇게 해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닐 때다. 대표적으로 ‘잠’이다. 우리 집에서 ‘재우기’는 주로 엄마가 담당하고 있는데, 엄마가 출근하고 아빠와 딸 둘만 집에 남아 있을 때면 간혹 난감할 때가 있다. 엄마가 안아주면 곧잘 잠드는 그녀가 아빠가 안고 있으면 놀려고 든다. 물론 제 정신이 아니기 때문에 잠깐 놀다가 또 운다. 처음에 나는 딸의 ‘울음’이 정말 난감했었다. 빨리 뭐든 해줘야겠다는 마음에 허둥거리다보면 ‘허둥거림’ 그 자체의 포로가 되어서 허둥거림 속에서 허우적 거리다가 허둥거림 속에 빠져 죽는 그런 기분이었달까? 무엇보다 아기 울음 소리가 그렇게 큰 줄 몰랐다.
200일쯤 지나고 보니 이제는 꽤 괜찮다. 나름의 노하우가 쌓이기도 했고, 울음 자체에 조금 무심해지기도 했으니까. 노하우는, 이런 것이다. 졸린 아기가 안 자고 버티며 칭얼거릴 땐, 일단 웃겨준다. 온갖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실컷 웃겨준 다음에 안아주면 된다. 그러고 나서 바운서에 내려놓으면 잠들진 않더라도 최소한 막무가내로 울지는 않는다. 물론 이건 아기마다 다른 것이어서 다른 집 아가들에겐 어떨지 모르겠다. 그런 노하우는 사실 중요한 게 아니고 진짜는 ‘무심’에 있다. 물론 이건 아기의 울음에 둔감해지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한 손에는 ‘무심’을 들고 있지만, 다른 한 손에는 ‘민감’을 단단히 쥐고 있어야 한다.
허둥거림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지 않으려면 아기는 당연히 우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이 당연한 진리를 당연하다는 듯 까먹곤 하는데, 그러면 아기가 울 때마다 체력이 10%씩 깎여 나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언제가 그 주제로 쓰겠지만, 육아의 기본은 ‘체력’이며, 세부적으로는 순간적으로 강한 힘을 내는 그런 유의 체력이 아니라 적더라도 오랫동안 버티는 유의 체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아기가 크게 울 때마다 체력을 소모하면 나도 손해고 결국엔 아기가 가장 힘들다, 그리고 무섭고, 불안하다. 체력이 떨어진 부모는 쉽게 화나고, 쉽게 짜증을 내며, 아기를 공격적으로 대하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체력을 소모할 일이 많은 육아다. 아기의 울음 때문에 일어나는 체력 손실을 최소화 하기 위해 나는 울음에 최대한 무심해지려고 노력했고, 지금도 여전히 노력 중이다. 빨리 아기의 불편을 해소해주려고 하기는 하지만, 그러는 동시에 마음을 다잡는 것이다. ‘아기는 원래 운다. 당연히 운다’ 하며 말이다. 그러면 ‘얘가 도대체 왜 이래’, 더 나아가 ‘얘가 도대체 나한테 왜 이래’, ‘얘가 어디가 아픈가’, ‘어디가 아픈데 내가 모르고 놔두는 거면 어떡하지’ 같은 원망과 걱정들 속에서 길을 잃지 않을 수 있다. 허둥거리지 않고, 무심한 듯 시크하게 울음을 마주한다. 물론 와중에 여유롭게 농담도 던진다. ‘이노옴~ 이럴거야 우아앙!’. 그럴 때면 울음을 뚝 그치고 웃기도 하지만, 눈을 피하며 여전히 불쾌하다는 의사를 피력하기도 한다. 그러면 뭐, 또 다른 불편은 없는지 하나씩 봐 나가면 될 일이다. 그러니까 아기의 생활엔 이런저런 울음이 잔뜩 들어있는 게 정상이라는 이야기다. 아빠도 벌써 이렇게 컸다. 안녕, 허둥지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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