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카프카, 유령들이 출몰하는 나라
1. 오래된 쪽지의 저주
「낡은 쪽지」는 카프카가 1917년에 쓰고, 1919년 작품집 『시골의사』에 발표한 단편 작품입니다. 원래 제목은 ‘중국에서 온 오래된 쪽지(Ein altes Blatt; An Old Manuscript)’예요. 오래 전에 씌어졌던 것, 먼 곳으로부터 온 것. 카프카는 수신자와 발신자 사이에 놓인 아득한 거리를 이야기해보려 했습니다.
오래된 쪽지는 왜 이제야 도착하는 걸까요? 이제 와서 뭘 어쩌라구? 쪽지 안의 사연은 이렇습니다. 먼 곳의 발신자는 황제의 궁궐 앞 광장에서 구두를 수선하는 사람입니다. 쪽지 속의 그는 갑자기 쳐들어온 유목민을 아연질색하며 바라보고 있습니다. 유목민들이 수도의 모든 것들을 뜯어 먹고 있었죠. 그들이 딱히 무력을 쓴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그들이 손을 뻗치면, 사람들은 옆으로 물러서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맡기고 있었습니다. 그저 돌아다닐 뿐인 유목민. 그리고 그들의 발 아래에서 진행되는 자연스럽고 무자비한 파괴!
유목민들의 진짜 능력은 무엇일까요? 그들을 그들답게 한 것은 단 하나, ‘언어’가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언어를 알지 못”했고, 심지어 그들 자신의 “고유의 언어”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념? 가치? 어림도 없는 소리죠. 그들은 ‘나’와 ‘너’를 가르는, ‘우리’를 우리답게 하는 원칙따윈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함께’할 수 있는 최소한의 약속도 원하지 않는 존재들이었죠. 유목민들은 까마귀 소리를 내고, 눈을 뒤집어 까고, 입에 거품을 물면서, 심지어 기호 언어마저 거부했습니다. 그럼으로써 황제의 도시를 쓸어버렸습니다.
의미가 소통되지 않는 세계, 서로에게 기댈 것이 하나도 없는 세계, 기수가 자신의 말과 나란히 앉아 살코기를 나누어 뜯는 세계. 카프카의 구두 수선공은 먼 곳에서 바로 그런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던 것입니다. 이제야 도착한 쪽지는 유목민을 데리고 온 것이죠. 수선공은 쪽지를 통해 이렇게 예언합니다. ‘유목민이 여기에 있다. 너의 턱이 탈구될 것이다. 너의 손목이 뒤틀릴 것이다.’ 아! 차라리 저주라고 해야겠군요. 이제 말은 부서지고(턱의 탈구), 글은 찢어질 것이며(손목의 뒤틀림), 마침내 삶은 파괴될 것입니다.
그들이 서로 의사소통을 하는 모습은 마치 까마귀들과 흡사하다. 언제나 이런 까마귀들의 외침 소리가 들려온다. 우리들의 생활 방식, 우리들의 시설물들은 그들에게는 중요하지 않을뿐더러 이해되지도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모든 기호 언어에 대해서도 거부적이다. 너의 턱이 탈구가 되거나 손목이 뒤틀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물론 너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며,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 유목민들은 전부를 빼앗아 삼켜버린다.(「낡은 쪽지」)
2. 유령의 선물
오래된 쪽지에는 자신을 동정해달라는 애원도, 읽을 이를 걱정하는 염려도 없었습니다. 카프카는 뒤늦게 도착한 이 쪽지를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한 걸까요? 사실 카프카는 온갖 쪽지의 달인, 오래된 편지의 대가였지요. 특히 연인 펠리체에게 편지를 보낼 때 그러했습니다. 프라하에 있던 카프카는 베를린의 펠리체에게 날마다 몇 통씩 편지를 보냈고, 그것도 부족하다 싶었는지 중간 중간 전보를 치기까지 했습니다. 어느 날은 그 또한 아쉬워서 편지-전보-엽서의 연타를 날리기도 했지요. 그리고 카프카는 ‘편지를 언제 보냈느냐? 확실히 보냈느냐? 하루에 두 번이 어렵다면 반드시 한 번은 써 달라!’며 끊임없이 상대방에게 글쓰기를 요구했습니다. 그런데도 막상 펠리체가 편지를 보내오면, 며칠씩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읽지 않았습니다. 쉼 없이 쓰여져야 하지만, 결코 제 때에 도착할 수는 없는 것, 바로 편지! 카프카는 집요하게 문자(letter)의 연착을 확인했으며, 그 도착을 적극적으로 미루었습니다.
어쩌면 펠리체는 정말 게으른 연인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혹은 ‘나를 문학에 바쳤습니다’라고 쓰는 카프카를 감당할 길 없어서 답장할 엄두를 못 냈을지도 모르죠. 아 물론, 당시 프라하의 우편제도가 엉망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모든 이유가 가능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오래된 편지’ 때문에 스트레스 받던 그 시기에 카프카가 최고로 많은 작품을 썼다는 점입니다. 발신은 되었으나 수신은 되지 못한 문자들의 세계에 풍덩 빠져 있었을 때 「선고」,「변신」,「화부」를 썼던 것이죠. 그건 오래된 편지가 만든 문학적 사건이었습니다.
“글로 쓴 키스들은 그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유령들이 도중에 다 마셔버립니다.”
나중에 카프카는 밀레나에게 ‘오래된 편지’의 비밀을 알려줍니다. 카프카와 밀레나도 엄청난 양의 연애 편지를 주고 받았지만 결국 헤어지게 되지요. 그때에도 오래된 편지의 활약이 있었습니다. 어쨌든 카프카는 편지가 가고 있고, 오고 있는 저 기이한 공간에 유령들이 산다고 했습니다. 유령들이 글이 갖고 있던 애초의 의미를 먹어치운다는 거죠. 심지어 키스까지도! 유령이라면 편지의 의미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을 테지요. 유령! 언어 없는 존재! 그들은 오직 읽기의 가능성과 쓰기의 가능성을 먹거나 뱉으며 제멋대로 돌아다닐 겁니다.
제 삶의 모든 불행은 어찌보면 편지로부터, 아니면 편지를 쓸 수 있는 가능성으로부터 왔습니다. 사람들은 저를 거의 한 번도 속인 적이 없지만, 편지들은 항상 저를 속여 왔지요. 그것도 다른 사람들이 쓴 편지들이 아니라, 제 자신이 쓴 편지들이 말입니다. … 편지를 쉽게 쓸 수 있다는 가능성이 영혼들의 끔찍한 혼란을 초래했던 것 같습니다. 그건 유령들과의 교신이니까 말입니다. 그것도 편지를 받는 사람의 유령하고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유령과의 교신이기도 하지요. … 편지를 쓴다는 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는 유령들 앞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일입니다. 글로 쓴 키스들은 그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유령들이 도중에 다 마셔버립니다. 거기서 그렇게 풍성한 자양분을 얻기 때문에 그들이 그렇게 엄청나게 번성하는 거지요. 인류는 그것을 감지하고 거기에 대항해 싸웁니다.(밀레나에게 보낸 편지, 1922.3월 말)
편지 유령이 출몰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사태를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파멸하게 되지요. 만나자고 했다가, 그 약속을 취소했다가, 미안하니까 다시 만나자고 하는 편지가 제 순서대로 도착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이런 편지 사고가 잦아지면? 연인들은 길 위에서 오해하게 되겠지요. 불안과 공포 속에서 그들은 사랑을 의심하게 될 겁니다.
펠리체, 진실을 말하자면 어제 아무런 보람도 없이 흥분된 마음으로 그대의 편지를 기다리면서 (아무런 보람도 없이 기다린 게 몇 번째인 줄 아나요, 펠리체?) 오늘 편지가 오더라도 열어보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편지는 일요일에 벌써 도착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지난번 편지에 대한 답장은 물론 내게는 다급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일요일 내내 기다렸지요. 더군다나 편지가 오늘 오리라는 보장도 없었습니다. 왜 하필이면 오늘인가요? 오늘 받은 편지를 열어보지 않은 채 잠시 주머니 속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편지는 그럼에도 나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편지 내용을 보더라도 이것은 정말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행복하게 만듭니다. 이 편지는 그대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내일이나 모레 오거나 아니면 아예 오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편지 스스로는 긴박함을 모르니까요.(펠리체에게 보내는 편지, 1914.4.7.)
그런데 카프카는 유령들이 만드는 이 엄청난 위험을 전혀 다르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유령 덕분에 글은 발신과 수신 사이에서 엄청난 가능성에 노출된다고 말이지요. 의미가 백방으로 날아다닐 가능성, 말이 어떤 방식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가능성, 애인이 배신자가 될 가능성, 심지어 내가 갑충이 될 가능성까지! 그 가능성은 너무나 풍요로워서 사랑과 증오, 갈망과 허망, 기쁨과 슬픔이 동시에 자라나게 할 것입니다. 갑충이 된 외판원 그레고르 잠자를 보고 있으면 웃기기도 하다가 안타깝기도 한 것은 그 때문이겠지요.
펠리체에게 첫 편지를 보낸 그날, 카프카의 연애 편지가 오래될 여행을 시작한 그때 착수한 작품이 바로 「선고」입니다. 주인공 게오르크가 저 멀리 러시아에 사는 친구에게 쓴 편지를 들고 다니다가 집 밖을 뛰쳐나가 강물에 몸을 던진다는 이야기지요. 그는 편지를 부치지 않았을 뿐인데, 약혼녀, 친구, 아버지, 마침내 그 자신마저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 일련의 사태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황폐한 러시아 땅에 유폐되어 있는 자가 친구인지 아닌지가 헷갈린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편지를 들고 다니던 게오르크는 진실과 거짓 사이의 경계가 한없이 멀어져 버린 곳에 당도합니다. 삶에서 참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상태까지 갑니다. 게오르크가 강물 위로 몸을 던졌을 때, 죽은 것은 단지 약혼녀와 아버지에게 ‘게오르크’라고 불리던 존재였을 뿐입니다. 그는 게오르크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존재의 가능성을 향해 몸을 훌쩍 날렸던 것이죠.
지금 우리 손 안에 그 언젠가 카프카가 썼던 편지와 소설이 도착해 있습니다. 카프카는 자신이 쓴 대부분의 작품을 불태워 달라고 유언했으니, 남겨진 그의 글은 수신자와 발신자를 또 한번 배반하는 셈입니다. 카프카가 보내온 오래된 글들을 읽을 때 우리는 알게 되지요. 이미 유령들이 나의 말과 글을 뜯어먹고 있다는 것을요. 카프카의 세계, 그곳은 유령들이 출몰하는 나라입니다.
글_오선민(고전비평공간 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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