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퀑탱 메이야수, 『형이상학과 과학 밖 소설』- 과학 밖 세계, 과학 밖 서사

by 북드라망 2017. 10. 10.

과학 밖 세계, 과학 밖 서사

퀑탱 메이야수, 『형이상학과 과학 밖 소설』



우리는 흔히 ‘공상과학소설’이라고 부르는 장르를 잘 알고 있다. 그것은 공상적인 모험담에다 과학 지식을 버무려서 그럴듯하게 이야기를 풀어낸 소설을 이른다. 우리는 보통 그것을 영어 약칭인 SF(Science Fiction)라고 부른다. 이제는 SF가 소설에만 한정되지 않고 여러 분야로 다양하게 퍼져 나가 있다. SF 소설, SF 영화, SF 드라마, 그리고 심지어 SF 연극도 있다. 게임의 영역은 그 자체가 SF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나도 SF 형식에 담긴 작품들에 푹 빠져서 그런 장르만 찾아보기도 했다. 예를 들면 『배틀스타 갤럭티카(Battlestar Galactica)』, 『센스 8(Sense 8)』 같은 드라마는 한동안 내 저녁시간을 송두리째 빼앗은 명작들이다. SF의 형식을 지니고 있지만, 그 안에는 현대적인 정치, 사회가 온전히 드러나 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SF라는 장르에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10년 전 세미나라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자연과학 세미나’에 들어가게 되었다. 내가 들어갔을 당시 세미나는 『파인만의 물리학 강의』를 막 시작한 참이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로렌츠 좌표변환, 마이컬슨과 몰리의 실험 등등 초반 뭔가를 조금 진행하는 듯하다가, 세미나의 주축들이 빠져나가는 바람에 파인만 책은 중지되고 만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수준에 맞게 교양 물리학의 대명사, 브라이언 그린의 『엘러건트 유니버스』로 바꾸어 3~4번에 걸쳐 읽었다. 역시 교양 과학책에는 읽는 이의 마음을 뿌듯하게 만드는 뭔가가 있다. 그래서 그건 독이기도 하다. 마치 교양 철학서들이 그러하듯이, 그것은 나의 과학적 사고방식에 전혀 진보를 가져오지 않은 채 뭔가 알고 있다는 느낌만 선사하였다. 그 뒤로 플라톤주의자인 로저 펜로즈의 『황제의 새 마음』 같은 책들과 기계론에 대한 책 몇 권을 읽고 세미나는 지지부진해졌다.  


그래도 나는 이 세미나를 통해서 과학이 아주 흥미로운 것이라는 점만은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물리학 안에 어떤 탐구들과 논쟁들이 존재하는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특히 양자역학의 세계는 뭐가 뭔지는 몰라도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거시세계와 달리, 미시세계에서는 좁은 간격, 짧은 시간 내에 에너지의 ‘대란’이 끝도 없이 벌어진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했다. 공간의 크기가 작아질수록, 그리고 측정 소요시간이 짧을수록 운동량과 에너지의 값은 더 큰 폭으로 오락가락하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진공 중에 느닷없이 탄생한 전자와 양전자는 곧바로 합쳐지면서 소멸되기를 반복한다. 바로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원리’라는 것이다. 파인만은 이것을 두고 이런 농담을 했다고 한다. “창조되었다가 사라지고, 또 창조되었다가 사라지고...., 이 얼마나 낭비적인가?”[각주:1] 아마도 기존의 과학적 인식으로는 도저히 용납되지 않는 현상이라는 것을 농담 삼아 이야기한 것이리라. 


그러나 나는 이런 장면들에 대해 흥미로워 하면서도, 이런 볼멘소리를 했다. 그래도 그것들은 뭔가 과학적으로 실험하고, 측정되어 조금이라도 법칙화할 수 있는 대상들이겠지? 그러므로 그것은 ‘과학’이라는 틀 내에서 밝혀지고, 서술될 수 있는 것이겠지? 그러니까, 아무리 오락가락, 중구난방이라고 말하는 양자역학이라고 해도, 과학자들의 그 과학 안에 들어온 이상, 법칙화가 가능한 대상이라는 것이겠지? 아, 그렇다면, 과학을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란 말인가! 모든 것은 과학에 의해서만 밝혀지고 서술될 뿐인 건가. 그렇다면 철학이니, 사회학이니 하는 것도 모조리 과학으로 가는 길에 있다는 뜻일까. 모든 것이 과학의 시녀란 말인가. 


이런 질문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 철학자가 있다. 퀑탱 메이야수(Quentin Meillassoux). 그는 이 주제를 다루기 위해서 한 강연을 하는데, 주제는 “형이상학과 과학 밖 소설”이다. 그가 보기에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과학소설(science-fiction:SF)과 과학 밖 소설(extro-science fiction;프랑스어로는 fiction hors-science:FHS)이라는 두 가지 소설 체계의 차이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말한다. 


메이야수(좌)와 바디우



“과학 밖 소설”이라고 써 놓고 보면 퍽이나 낯선 용어가 된다. 과학의 안과 밖이 있다는 것이니까 말이다. 이런 구도라면 아마도 “과학소설‘은 ”과학 안 소설“이어야 할 것이다. 사실이 그렇다. 우리가 아는 과학소설은 현재의 과학적 인식이 좀 더 발전될 것으로 예상하여, 그 발전된 수준에서 펼쳐진 소설적인 미래를 상상한다. 과학이 발전하여 우리가 쉽게 우주로 순간 이동하는 것이 가능할 거라고 예상하면, 우주여행이 일상인 과학소설이 가능해진다. 물론 매우 충격적인 상황들이, 예컨대 아침에 우주로 출근해서 화성일을 보고, 오후에 지구로 퇴근하는 일상이 펼쳐질 수도 있다. 심지어 도저히 지금으로선 상상하지도 못할 일, 예컨대 나의 자아가 여러 가지로 쪼개져서 하나는 지구에서, 하나는 화성에서 일을 하고, 그 자아들이 서로 대화를 하는 장면도 펼쳐질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가능성이 얼마나 충격적이건 간에 과학의 범위 내에 머물러 있을 가능성이다. 그러니까 아무리 상상이 기상천외하더라도 그것은 앞으로 과학이 발전한다면 이루어 낼지도 모르는 현상들이다. 다시 말하면 아직은 밝혀지지 않았더라도 앞으로 과학자들이 연구를 통해 밝혀낸다면 이루어질 수도 있는 가능성인 것이다.


메이야수는 이것을 철학사의 문제적 인간, 흄(David Hume, 1711 ~ 1776)의 문제를 가지고 좀 더 정치하게 접근하여 설명해 준다. 흄은 어떤 사태든 그것에 반대되는 일이 언제나 일어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내일은 해가 뜨지 않을 것이다라는 명제는 내일도 해가 뜰 것이다라는 명제와 마찬가지로 긍정될 수 있는 명제이면서 또한 모순 없는 명제라는 것이다.[각주:2]


우리는 왜 항상 내일은 해가 뜬다고 추론할까? 흄은 이에 대답하기를, 모든 인과관계에 대한 지식은 추론에 의해서 선험적으로(a priori)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특정한 대상들이 서로 지속적으로 결합된다는 것을 발견할 때 얻어지는 경험으로부터 생긴다고 말한다.[각주:3] 좀 쉽게 말하면 “아침이라는 사태”와 “해가 뜬다는 사태”가 오래도록 결합되어 나타났기 때문에 우리는 내일 아침에도 해가 뜬다고 추론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오랫동안 아침이 되면 해가 떠왔기 때문에 내일도 그렇게 해가 뜰 거라고 당연히 추론하게 된다.


결국 흄은 이런 추론의 토대에 이성적인 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고 단지 과거의 경험적 항구성에 대한 “습관”만이 우리에게 미래를 추론하게 한다고 주장하는 꼴이었다. 반복 현상이 습관적으로 그렇게 추론하는 심리를 만들었다는 것. 이것은 우리의 확신이 심리적인 것일 뿐이라고 폭로한 것이었다. 


"내일도 해가 뜬다."



그러나 이를 두고 칼 포퍼(Karl Popper, 1902~1994)라는 과학 철학자가 자신이 이 난해한 흄의 문제를 해결했다고 나섰다. 이른바 그는“반증가능성”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반박한다. 물론 현재는 검증할 수 없기 때문에 확신할 수 없지만, 향후 실험에 의해서 검증이 이루어지면 과학적 사실이 된다는 것. 즉 과학 이론은 경험적인 증거들에 의해 검증되는 것이 아니라, 반증 가능한 가설과 실험들을 통해 구성되는 것이다. 좋은 이론일수록 반증 가능한 실험을 많이 구성하고, 또한 이 실험을 많이 견딜수록 이론의 힘이 강력해지게 된다. 결국 모든 것은 실험과학의 범위 안에서 해결된다!


하지만 메이야수는 포퍼가 흄의 문제를 오해했다고 말한다. 그는 반증들을 검증해줄 미래의 실험들이 현재의 실험들이 내놓는 경험들과 다르지 않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다시 말하면 현재의 가설이 미래의 실험들에 의해 뒤집힐 수는 있지만, 만일 “정확히 동일한 상황 속에서(!)” 실험을 한다면, 언제나 동일한 경험이 일어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정확히 동일한 상황에서 실험했는데도, 그때마다 다른 결과가 추출된다면? 실험을 할 때마다 n개의 결과가 나온다면? 정말로 똑같은 상황에서 실험을 했는데도 각기 다른 결과가 나와서 반증 가능한 실험으로서 요건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결국 실험이 인과관계를 증명해줄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면? 흄은 바로 그런 순간을 상정하여 문제를 제기한 것이었다. 그러나 포퍼는 이 문제를 극한으로 끌고 가지 않고, 동일한 상황에서는 동일한 실험결과만을 가져온다고 무의식적으로 확신한 상태에서 빈번하게 불규칙한 상황이 나올 가능성을 상정하지 않은채, 서둘러 해결했다고 선언한 꼴이었다. 


나는 금방 흄의 문제를 극한으로 끌고 간다는 표현을 썼다. 흄의 문제를 극한으로 끌고 간다는 뜻이 무엇일까. 이것은 칸트(Immanuel Kant, 1724 ~ 1804)를 통해서 정확하게 드러난다. 


흄은 좀 엉뚱한 질문을 던진다. 당구대 위에 당구공이 두 개가 있다. 내가 어떤 당구공을 직선으로 쳐서 어떤 다른 당구공을 향해 직선으로 움직이도록 했다고 치자. 나는 당연히 내가 친 당구공이 다른 당구공으로 직선으로 굴러갈 것을 믿어 의심치 않을 것이다. 물론 내가 기술적으로 모자라서 삐끗하여 살짝 벗어날 수는 있겠으나, 그쪽 방향으로 굴러가는 것을 부정하진 못할 것이다. 그러나 흄은 이런 믿음이 와해되는 경우가 꼭 없을 수만은 없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그때 나는 백 가지 다른 사건들이 그 원인으로부터 따라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것인가? [내가 한쪽으로 움직이도록 쳤는데도] 두 공이 모두 완전히 정지해 버릴 수는 없는 것인가? 첫 번째 공이 직선을 그리며 되돌아오거나, 혹은 두 번째 공으로부터어떤 선을 그리면서 또는 어느 방향으로 튕겨져 오를 수는 없는 것인가?”[각주:4]


그러나 칸트는 이 문제를 이렇게 응답한다.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그것은 ‘과학이 없는 의식(consciousness without science)’에서 바라볼 상황이므로 ‘이성 작용이 붕괴한 상황(the very ruin of reasoning)’일 것 아닌가. 그러니까, 흄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상황(당구공이 자기 멋대로 움직이는 상황, 매번 다르게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은 우리가 과학이 불가능해진 세계에 대한 의식을 갖는 상황일 것이다.[각주:5] 따라서 혹시 그런 대상들(과학적 인과관계가 완전히 와해되어 움직이는 대상)을 지각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성이 작용할 수는 없다. 


칸트는 포퍼가 저지른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 즉, 과학 밖의 문제를 과학의 문제로 혼돈하여 다루지 않는다. 칸트의 “법칙이 결여한 실재(the law-less real)”는 사실상 무시무시하고 비탄을 일으키는 광경일 것이다. 그런 광경을 목격할 수 있는 자기의식의 형태(the form of a self-consciousness)로 나 자신을 존속시킬 수도 없을 것이다. 내 고유한 기억조차 솟아나는 즉시 사라져버릴 것이기 때문에.[각주:6] 바로 이런 이유로 칸트는 흄을 반박한다. 아직 내 의식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러니까 세계에 대한 표상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흄의 가설에 대한 반박이 될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그런 광경은 내가 의식조차 할 수 없으므로, 그리고 그런 것이 의식되기라도 할라치면 내 존재가 사라질 것이므로, 만일 내가 내 의식을 갖고 있고, 그 의식으로 세계를 표상하고 있다면, 그런 광경-과학 밖의 세계-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칸트의 관점에서 흄이 상상하는 세계는 넌센스다.


내가 세미나를 하면서 이렇게 저렇게 소박하게 갖고 있던 의문을 메이야수는 흄과 포퍼와 칸트를 가지고 아주 정밀하게 논박하여 들어갔다. 급기야 칸트를 논박하면서 메이야수 자신의 세계, 즉 칸트가 있을 수 없다고 여겼던 과학 밖 세계를 세 가지 유형으로 제시한다. 


첫 번째는 과학의 세계는 그대로이지만, 드문드문 불규칙적으로 그런 광경이 발생하는 세계이다. 아마 이런 분위기를 잘 보여주는 것이 미국 드라마 『X 파일』일 것이다. 이 세계는 과학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는다. 두 번째는 불규칙성이 매우 강해져서 과학을 폐지하기에 충분히 강하지만, 의식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 세계이다. 논리적이진 않지만 그런 광경을 지각하고 생각하게는 하지만, 기존 과학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세계. 진정한 과학 밖의 세계이다. 세 번째는 진정 칸트적인 세계. 그러니까 사실상 하나의 세계라고 할 수 없는 세계. 아마 이 세계가 되면 우리가 서로 이 문제를 가지고 논의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그런 광경을 일관된 서사로 이야기할 수 있는 자기 의식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므로. 따라서 과학 밖의 세계로서 소설화가 가능한 세계는 바로 두 번째 유형의 세계, 메이야수가 약칭으로 “FHS-2 세계”라고 부르는 세계이다. 

  과학이 와해되어 더 이상 과학이 세계를 지배하지 않는 세계. 그렇지만 과학이 어느 한 구석에서는 작동하기도 하는 세계. 그래서 과학과 비-과학이 함께 거주하고 있는 기이한 세계. 메이야수가 “과학 밖 소설”이라고 부르는 장르는 바로 그런 세계를 보여주는 소설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이 세계는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보여주는 세계와도 다르다. 루이스 캐럴 식의 마법의 세계도 결국 ‘역설과 패러디’라는 또 다른 제어 체계에 의해 예측 가능한 세계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FHS-2의 세계는 『서유기』식의 고전 마법의 세계와도 다르다. 그것은 이미 마법의 문법과 현장법사의 목표에 따라 모두 예측 가능한 세계로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두 과학 안의 소설들(즉, 인과관계가 드러난 소설)이다. 그것들은 그 세계가 보유한 연속성을 기준으로 펼쳐진 체계 내 이야기일 뿐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불합리한 사건들을 재발견된 인과적 논리 속으로 결국 다시 집어넣는 이야기들이다. 


아마도 이 지점에서 메이야수와 들뢰즈는 구분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과학으로부터 완벽히 벗어난 실재를 상상한 메이야수와 여전히 과학의 입장에서 새로운 관찰에 의한 ‘새로운 과학’을 옹호하는 들뢰즈.[각주:7] 과연 메이야수가 상정하는 세계는 어떤 감각을 만들어낼까. 과학 밖을 향하여 세계를 변동시킴으로써 전통적인 세계를 해체하고, 거주 자체가 불가능해져 버린 세계. 그래서 더 이상 하나의 서사로는 이야기될 수 없는 세계. 그리고 그것을 반성하며 실험조차 하기 힘든 세계. 그러나 내겐 이 세계가 매 순간 붕괴를 경험하는 세계이며, 아마도 현행적으로 함께 구성되어 있는 세계여야 하지 않을까 직감한다. 마치 니체의 영원회귀가 지금 우리와 함께 작동하는 것럼 말이다.  


글_약선생(a.k.a 강민혁)

  1. 브라이언 그린 지음, 『앨러건트 유니버스』, 박병철 옮김, 도서출판 승산, 2002, 197쪽. [본문으로]
  2. 데이비드 흄 지음, 『인간의 이해력에 관한 탐구』, 김혜숙 옮김, 지식을만드는지식, 2012, 42쪽. [본문으로]
  3. 데이비드 흄 지음, 『인간의 이해력에 관한 탐구』, 김혜숙 옮김, 지식을만드는지식, 2012, 45쪽. [본문으로]
  4. 데이비드 흄 지음, 『인간의 이해력에 관한 탐구』, 김혜숙 옮김, 지식을만드는지식, 2012, 49쪽. [본문으로]
  5. 퀑탱 메이야수 지음, 『형이상학과 과학 밖 소설』, 엄태연 옮김, ㈜이학사, 2017, 45쪽. ; Quentin Meillassoux, 『Science Fiction and Extro-Science Fiction』, Translated by Alyosha Edlebi, Univocal Publiching, 2015, p. 27 [본문으로]
  6. 퀑탱 메이야수 지음, 『형이상학과 과학 밖 소설』, 엄태연 옮김, ㈜이학사, 2017, 50쪽. ; Quentin Meillassoux, 『Science Fiction and Extro-Science Fiction』, Translated by Alyosha Edlebi, Univocal Publiching, 2015, p. 30 [본문으로]
  7. 들뢰즈는 과학과 철학, 그리고 예술이 각각 대상에 접근하는 방식이 다르고, 또한 다른 역할을 가진다고 생각한다. “과학과 철학의 첫 번째 차이는 카오스에 대한 각각의 태도에서 나타난다...(중략)... 과학은 무한, 무한한 속도를 포기하고, 잠재태를 현실화할 수 있는 하나의 지시관계를 얻어낸다. 철학은 무한을 그대로 간직함으로써, 개념을 통해 잠재태에 일관성을 부여한다. 과학은 무한을 포기함으로써, 기능들을 통해 잠재태에 그 잠재태를 현실화하는 지시작용을 부여한다.”(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지음 『철학이란 무엇인가』, 이정임·윤정임 옮김, 현대미학사, 1995, 170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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