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에 브레이크가 되어 나를 살게 한 사람들
평소에는 비록 실수도 많고 부족한 점도 많지만 굽히지 않고 솔직하고 정정당당하게 묻고 배우는 제자였습니다. 그렇기에 자로는 비록 건달 출신의 비천하고 미천한 인물이었음에도, ‘사람은 이런 배움이나 이런 계기를 통해서 얼마든지 다른 인물이 될 수 있다’라는 사실을 실증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자로 삶의 처음과 끝은 공문이 한 사람을 얼마나 큰 스펙트럼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가, 하는 그런 의미를 환기시키는 실제 사례이기도 한 것입니다. (……) 또 바로 그런 이유로, 스승에게조차도 자기가 배운 것과 다를 때면 끝까지 마음에서 설복될 때까지 뜻을 굽히지 않을 수 있는 불굴의 정신을 가진 그런 사람이 자로라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자로는 어떻게 그런 활동이 가능했을까요. 자로의 개인적 기질도 기질이지만, 거기에는 역시 스승 공자라는 넘볼 수 없는 울타리 아니 브레이크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
저는 얼마 전부터 조금 다른 것도 생각해 보게 됩니다. 방금 브레이크라는 말을 했습니다만, 자동차를 타고 갈 때 우리가 점점 속도를 올릴 수 있는 건 어떤 이유일까요. 자동차를 시속 150킬로 200킬로까지, 무슨 자동차 대회에서는 300킬로도 더 나간다는데, 어떻게 그 어마어마한 속도를 겁도 없이 밟을 수 있을까요? 자동차의 성능이 굉장히 좋아졌기 때문에? 천만의 말씀이죠. 왜일까요, 여러분?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거침없이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되고 뭐든 내가 할 수 있다, 내가 하는 일을 내가 마음껏 펼칠 수 있다, 라고 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건, 최소한 내가 시궁창에 빠지려고 하면 우리 스승이 그걸 절대로 그냥 보고 계시지 않는다. 내가 개차반 같은 일을, 사람은 실수도 할 수 있고 못할 수도 있는데, 내가 정말로 못난 짓을 하면, 그럴 땐 스승이 나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 라고 하는 그 믿음을 주는, 공자라고 하는 브레이크가 『논어』 속에서 자로라고 하는 캐릭터를 가능하게 해주는 거란 말이죠. 그래서 거꾸로 공자라는 사람의 그릇이 얼마나 큰지를 역설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나의 문화 안에서 이렇게 스펙트럼이 넓은 여러 제자들의 다양한 개성들을 모아낼 수 있다니. 이걸 다 모아낼 수 있는 이 스승은 대체 어떤 사람인가’라고 하는 걸, 우리는 역으로 보게 되는 겁니다.
[문성환, 『닌하오 공자 짜이찌엔 논어』, 북드라망, 2017, 174~176쪽]
공자가 제자 ‘자로’의 ‘브레이크’가 되어 주었다는 구절을 보았을 때 머릿속에 맨 먼저 떠오른 것은 “혁명은 기관차가 아니라 비상브레이크”라던 벤야민의 말이었다(“마르크스는 혁명이 세계사의 기관차라고 말했다. 그러나 어쩌면 사정은 그와는 아주 다를지 모른다. 아마 혁명은 이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사람들이 잡아당기는 비상 브레이크일 것이다.”_「‘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관련 노트들」, 356쪽). 그리고 이어서 ‘브레이크’는 자로처럼 돌진하는 스타일의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무엇을 하든 내달리듯 하게 하는 요즘을 사는 이들에게 필요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뒤이어 내 삶에 어떤 식으로든 ‘브레이크’가 되어 준 사람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그런데 (아마도) 개인적 성향상, 내가 그이를 믿고 거침없이 내달릴 수 있는 기대처나 의지처로서의 브레이크가 아니라 애먼 일에 정신없이 내달리는 나를 멈추게 한 브레이크가 되어 준 사람들이 훨씬 많이 떠올랐다. 때로는 어떤 이념으로, 때로는 자신을 학대하는 망상으로, 때로는 타인을 무시하기까지 하는 자신감으로, 주위 사람들은 물론이고 나 자신마저 힘들게 하는 길을 전속력으로 달릴 때 뛰어들어 나를 멈추게 하고 걸어서 가도 좋고 쉬었다 가도 좋고 심지어 가지 않아도 좋다고, 때로는 쓴소리로 때로는 위무의 말로 때로는 말없이 눈빛으로만 브레이크를 걸어준 사람들. 물론 아주 드물게 자로에게 공자가 그랬던 것처럼 그이가 있기에 내달려 볼 용기를 가질 수 있게 했던 이도 있었다. 어쨌든 그때그때 각각의 방식으로 기꺼이 브레이크가 되어 준 이들 덕분에 나는 그 숱한 뻘짓의 질주 속에서도 아직 살아(!) 있다.
그러고 보니, 꼭 ‘호의’ 또는 ‘애정’으로 브레이크가 되어 준 사람들만 있었던 건 아니다. 나에 대한 적의로 혹은 오해에서 비롯된 악의로 또 혹은 아무 의식이나 감정 없이 우연히,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나 내가 꼭 하고 싶었던 일을 하지 못하게 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 당시에는 그들을 내 삶의 ‘장애물’로, 극복해야 할 어떤 것으로 생각했으나, 돌이켜보면 그들도 내 삶에 고마운 ‘브레이크’들이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역시 나는 어딘가에 들이박히거나 추락하여 거꾸러져 있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모든 타자는 나의 브레이크다. 어떤 사람도 내 마음, 내 계획대로 움직이는 사람은 없다(사실 당연한 일이다). 내 속에서 나온 자식이 내 마음같이 움직이지 않고, 나에게 모든 걸 준(주고 싶은) 부모님도 내 마음만큼 해주실 수는 없다. 피보다 진한 우정을 나누었다고 생각한 친구도 나를 덜컹거리게 할 때가 있고, 세상에 그이와 나 둘만 있는 것처럼 만든 사랑도 나를 힘겹게 할 때가 있다.
그렇다면, 나와 관계 맺고 있는 모든 이들이 나의 삶에 시시때때로 브레이크가 된다면, 결국… 타자와의 관계 맺기가 내 삶의 혁명이고, 그들이 내 삶의 스승이라는 게 아닐까… 자로와 공자의 얘기에서 출발한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여기에 이르렀다.
** 애당초 『닌하오 공자 짜이찌엔 논어』를 보았을 때 눈에 먼저 들어왔던 것은 처음에 인용된 단락보다 몇 페이지 앞쪽에 나오는, ‘제비도 알지만 자로 정도여야 실천할 수 있는’이라는 소제목 아래 다루어진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 아는 것이다”(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라는 『논어』의 유명한 구절과 함께 공자의 제자 ‘자로’가 어떤 사람인지 이야기하는 부분이었다. “해진 솜옷을 입고도 천연 가죽옷을 입은 사람들 옆에서 부끄러워하지 않을 자로 정도 되어야만, 자신의 알지 못함[不知]을 알지 못함이라 말할 수” 있지(『닌하오 공자 짜이찌엔 논어』, 165쪽) 않을까. 늘 부족하여 구박당하기 일쑤이면서도 언제나 묻고 배우기를 그만두지 않았고, 그렇기에 왈인(건달)에서 군자가 될 수 있었던 사람. 이 책에 소개된 자로에게 나는 투박한 끈기가 주는 어떤 뭉클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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