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先)과 선(線)을 지켜라!
살면서 대략 난감한 순간이 한둘이 아니겠지만, 개중 하나를 꼽는다면 상대방의 (분명히 그럴 것이라고 추정되는) 호의를 당최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경우다.
작년이던가 올해던가. 아무튼 새해를 맞아 단톡방 알림이 분주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나를 포함해서 중고등학교 동창 7명으로 만들어진 단톡방이다. 내 전체 친구수에서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하는 그룹이다. 이들을 좋아하긴 하지만 난 단톡방이 싫다. 그래서 실은 메시지를 잘 안 볼 때가 많다. 특히 단톡방 알림으로 읽지 않은 메시지의 숫자가 올라가면 더더욱 멀리한다. 하지만 어떤 날은 대화에 슬쩍 끼는 때(아이폰에 미리보기로 떠서 톡방에서는 읽음 표시가 안 되는)가 있는데,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신실한 신앙을 가진 한 친구가 대개 비슷한 정도의 신앙을 가진 친구들과 전혀 그렇지 않은 나에게 새해 덕담을 하고는 기도를 해줄 테니 원하는 것들을 하나씩 대보라고 하였다. 고맙다며 하나둘 서로 소망하는 바를 올리는데, 나로 말하자면 신앙은 없어도 양심은 조금 있는지라 침묵했다(그리고 지금은 미리보기로 보는 상황이다). 단톡방의 친구들이 지치지도 않고 길 잃은 어린 양인 나를 주님 품으로 인도하려고 할 때마다 한사코 마다하던 내가, ‘그래도 새해니까 요거 하나 들어주시겠어요?’ 하는 것도 웃기지 않은가.
난 됐다고 말이라도 할 걸 그랬나. 굳이 그 맘 좋은 친구가 “00(나)는 부모가 되게 해달라고 하는 것이 어떨까?”라는 것이다. 아오! 7명이나 되고, 그 중엔 애엄마도 있고 하니 1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하기는 하나, 결혼 생활을 한 이래로 만나서 이런 이야기가 나오게 되면 이들에게 나에게는 출산의 의지가 없음을 정말 여러 차례 분명히 밝혔다. 물론 결혼을 한 사람이니까 나의 방심과 남편의 실수로 아이가 생길 수도 있겠지 정도는 했다만 내가 굳이 의지를 가지고, 굳이 내가 낳아서 어떤 아이의 부모가 되고 싶지는 않다고 말하지 않았느냐고, 이 답답아! 하고 당장 톡판으로 튀어 들어가고도 싶었으나… 때가 때인지라 이 훈훈한 분위기를 깰 필요는 뭔가 하고 끝까지 톡은 보지 않은 것으로 하였다.
윗사람에게 싫었던 것으로 아랫사람을 부리지 말며, 아랫사람에게서 싫었던 것으로 윗사람을 섬기지 말며, 앞사람에게서 싫었던 것으로 뒤에 오는 사람에게 앞서 가며 그런 짓을 하지 말며, 뒷사람에게 싫었던 것으로 앞에 가는 사람을 따라가지 말며, 오른쪽 사람에게서 싫었던 것으로 왼쪽 사람과 사귀지 말며, 왼쪽 사람에게서 싫었던 것으로 오른쪽 사람과 사귀지 말라.(우응순, 『친절한 강의 대학』, 북드라망, 2017, 169쪽)
이것은 이른바 ‘혈구지도’(絜矩之道)라는 것으로서(에헴) 우응순 선생님(웅샘) 말씀에 따르면 사서 중 『대학』에서만 만날 수 있고, 『대학』을 전 10장까지 착실히 읽었을 때에야 선물처럼 만날 수 있는 구절이면서 웅샘께서 『대학』에서 가장 좋아하는 구절로 꼽은 것이기도 하다. ‘혈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친절한 강의 대학』에서 직접 확인해 주시길!^^ 좌우간 나 역시 이 구절에서 꽤나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는데, 사람과 사람 사이는 이 정도 선이면 충분하다고 말해 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뭔가를 해주려고 하기보다는 하지 말아야 할 것, 아니 내가 당해 보니 싫었던 것을 하지 말라고 말이다. 그런 게 무슨 친구고 가족이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하고 싶었던 것, 해보니 좋았던 것을 상대에게 해주는 것은 내가 싫었던 것을 남에게 하지 않은 후에 해야 할 일이 아닐까. 선(先)과 선(線)을 지키는 것, 그것이 내가 『대학』에서 찾은 혈구지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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