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를 아십니까?
1. 길은 다녀서 만들어진다!
우연에 의해 저절로 생성된 만물들, 그사이에는 차등이 없다. 그런데 어느 순간 만물 사이에 차등이 만들어졌다. 사람으로서 동물을 천시하고, 높은 신분으로서 낮은 신분을 천시한다. 나의 아름다움으로 미추를 나누고 나의 옳음으로 선악과 시비를 나눈다. 그리하여 어느덧 이분법이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장자는 진단한다. 도가 가리어져 참과 거짓의 분별이 생기고, 참말이 가리어져 옳고 그름의 차별이 생긴 것이라고, “옳고 그름을 따지면 도가 허물어진다. 도가 허물어지면 편애가 발생한다.” 도가 온전한 세상에서는 만물 사이에 어떤 차등도 없었는데, 도가 허물어져서 차별과 배제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길을 걷다 갑자기 “도를 아십니까?”라는 물음에 당황했던 경험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도란 말은 이상하게 사람을 주눅 들게 한다. 도를 한마디로 정의하는 게 쉽지 않아서이리라. 이 도와 장자의 도는 같은 것일까? 논어, 노자, 맹자 등에도 출현하는 도. 옛사람들은 도가 땅에 떨어졌다고 하는데 그들의 도는 다 한뜻인가? 도는 아주 폭넓게 정의하다면 살아가는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살아가는 방법이 무엇이냐고 할 때, 그 도가 내포하는 의미는 달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 노자, 장자, 도를 아십니까의 도는 그 실질이 다를 수밖에 없다. 단순하게 말해보자, 장자식으로 살아가는 방법 그것이 도이다. 그 도의 실질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道
可乎可 不可乎不可. 道行之而成 物謂之而然. 惡乎然? 然於然 惡乎不然? 不然於不然. 物固有所然 物固有所可. 無物不然 無物不可.
되는 것을 일러 됨이라 하고 되지 않는 것을 일러 되지 않음이라 한다. 길은 다녀서 생기고 사물도 그렇게 불러서 그렇게 된다. 어찌해서 그렇게 되는가? 그렇다고 하니까 그렇게 되는 것이다. 어찌해서 그렇지 않게 되는가? 그렇지 않다고 하니까 그렇지 않게 되는 것이다. 사물에는 본래 그럴 까닭이 있고 그럴 가능성이 있지. 그렇지 못한 것은 하나도 없고, 그럴 수 없는 것도 하나도 없다.
장자가 말한바, 도는 사물을 그렇게 되게 하고 그렇지 않게 하는 원인이자 근거이다. 만물을 하나로 여기면서, 만물이 그런 만물로 되게 하는 원리. 꼭 그 만물이게 하고 다른 만물이게 하지 않는 과정이자 흐름.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저절로 그렇게 하는 원리이면서 동시에 스스로 그렇게 하는 원리라는 것. 길이 다녀서 만들어지고 사물은 불러서 그렇게 되는 것처럼 도는 사물과 함께 시작되어 사물 스스로 그렇게 가는 길이다.
대체 도란 실제로 나타나는 작용이 있고 존재한다는 증거가 있으나 행동도 없고 형체도 없다. 전할 수는 있으나 주고받을 수는 없다. 터득할 수는 있으나 볼 수는 없다. 스스로 근본이 되어 있고 천지가 아직 생기기 전의 옛날부터 본래 존재하며 귀신이나 상제를 영험하게 하고 하늘과 땅을 낳고 있다. 태극보다 더 위에 있으면서 높은 척하지 않고 육극보다 밑에 있으면서 깊은 척하지 않는다. 천지보다 먼저 생겨났으면서도 오랜 세월이라 여기지 않고 까마득한 옛날보다 더 오래되었지만 늙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도란 이름도 없고 구체적 실체도 없는 허공이다. 뿌리도 없고 근본도 없고 끝도 없다. 시작이 없고 아래로는 경계도 없다. 끝도 시작도 없으며 무궁무진하여 무라고 부른다. 무라 부르지만 사물과 같은 이치를 가지고 있고 사물과 함께 시작되고 끝나서 만물을 떠날 수 없다. 시켜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조작된 것도 아니다. 그것 자체가 근원이고 뿌리다.
장자에게 도는 어떤 만물이나 지켜야 하는 하나의 당위, 보편타당한 법칙이 아니다. 도는 존재라면 누구나 지켜야 하고 지배받는 법칙이 아니다. 유학에서 도는 인간이면 지켜야 하는 도리, 진리, 인의예지다. 그러나 장자에게 도는 만물 각각이 저절로 생겨나서 저절로 그렇게 걸어가는 길이다. 그러므로 도란 그렇게 이루어지게 한 자연의 원리다. 이 도는 존재들이 우발적으로 부딪쳐 형성되어 그렇게 생겨난 존재의 모습대로 살아가는 과정 자체를 말한다. 도는 특별한 무엇이 아니다. 그래서 무라고도 한다. 소리도 형체도 없음, 그 무에서 만물은 생성되었다. 저절로 부딪치게 하는 것. 작용하지만 작용하지 않는 무엇이다.
좀 더 쉽게 말해보자. 도는 자연이 생성되고 사라지게 하는 원리이자 흐름 혹은 패턴이다. 예를 들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어느 순간 4계절이 생겨나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과정이 매 해 반복되게 하는 원리를 도라고 명명한 것이다. 4계절처럼 만물을 생장 쇠멸하게 하는 그 어떤 패턴 혹은 그 이치가 도이다. 없음에서 있게 하고 있음에서 없게 하는 대원칙에 따라 모든 만물은 존재하고 사라지는 것이다.
그렇지만 매해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다르듯, 차이 나게 반복하는 것이 도이다. 생장 쇠멸을 하는 만물의 큰 흐름은 같지만, 각 만물이 각양각색 다르게 생장 쇠멸한다는 것. 그러므로 도는 절대 원리로서의 의도를 가지지 않으며, 원본을 가지지 않는다. 유학에서 말하듯 도는 천 리는 아니다. 만물의 근원이라는 점에서 비슷하지만, 만물 모두가 따라야 하는 합법칙성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태극이 있기 전, 육합이 생기기 전, 천지가 있기 전에 존재했지만 그렇다고 사물을 초월해 있는 것은 아니다. 사물 각각에 내재한다. 동시에 사물에 내재하면서 사물들 사이에 존재한다. 만물을 초월해서 만물을 주재하는 법칙이 아니라. 만물에 내재하면서 만물이 그렇게 부딪치고 그렇게 되도록 만드는 힘이다.
동곽자가 장자에게 물었다. “소위 도란 어디에 있습니까?” 장자가 대답했다. “없는 곳이 없소.” 동곽자가 다시 물었다. “분명히 가르쳐 주십시오.” 장자가 대답했다. “땅강아지나 개미에게 있소.” 동곽자가 “어째서 그렇게 낮은 것에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장자는 다시 “돌피나 피에 있소.” 하고 대답했다. “어째서 그렇게 점점 낮아집니까?” 하고 동곽자가 묻자 “기와나 벽돌에도 있소.” 하고 대답했다. “어째서 그렇게 차츰 더 심하게 내려갑니까?” 하고 물으니 “똥이나 오줌에도 있소.”하고 대답했다. 동곽자는 [그만 말문이 막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장자가 말했다. “당신의 질문은 애당초 본질에 미치지를 못했소. 장터를 관장하는 벼슬아치가 감독자에게 돼지를 밟게 하여 물을 때도 내려가면 갈수록 [전체를] 잘 알 수 있는 거요. 당신도 도가 어디에 있다고 한정해서는 안 되오. 도가 사물을 초월한 거라 여겨서도 안 되오, 지극한 도란 이와 같[이 모든 것 속에 있]소. 위대한 가르침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며 周, 徧, 咸(두루, 모두라는 의미)이란 세 자는 이름은 다르지만 실제 뜻은 같소. 이처럼 [도란 널리 어디에나 다 있어서] 그 뜻은 [모두] 하나인 거요.”
─장자, 외편, 知北遊
따라서 도는 어디에나 있다. 똥, 오줌, 돌피, 기왓조각 어디에도 있다. 똥이 똥이 되게 하는 것, 그것이 도다. 또한 똥도 다 같은 똥이 아니라 어떤 조건들과 부딪침으로써 그러한 똥이 되는 것. 그러니 길은 원래 있는 게 아니고 하나인 것도 아니다. 길은 다녀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존재가 여러 조건과 만나서 살아가므로 해서 드러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도는 이 때문에 하나로 규정할 수도 없고, 말로 전할 수도 없다. 『노자』의 유명한 구절, “도를 도라고 하면 항상하는 도가 아니고, 이름을 이름이라 하면 항상하는 이름이 아니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도라고 하나의 정의를 내리는 순간 더는 도가 아니다. 도는 원리이지만 그 도는 존재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도는 애초에 없음이면서, 만물이 만물 되게 하는 원리이기도 하고, 저절로 그렇게 하는 힘 즉 자연이기도 하고, 하늘이기도 하다. 따라서 도가 만물 각각에 내재한다는 점에서 만물은 제동이면서, 만물 각각 도는 서로 다르다는 점에서 도는 하나의 절대 보편의 진리는 아니다.
도가 이럴진대, 이분법으로 분별은 불가능한 것이다. 절대보편의 원본이자 법칙이라면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지만 장자의 도는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없다. 시작되고 사라지는 변화라는 대원리만 있기에 삶의 원리, 존재의 원리는 다 다르다는 것. 그런데 인간은 자꾸 규정하고 하나의 척도로 존재들을 살게 하므로 도가 무너졌다고 말한 것이다. 이것은 자연의 원리가 아니다. 그러니 인간은 이 자연의 원리에 따른 삶의 원리를 회복해야 한다. 장자는 삶의 모습이 자연을 닮기를 바랐다. 도덕 진리에 근거한 삶이 아니라 저절로 그렇고, 스스로 그러한 자연처럼 살아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순환이라는 자연의 대원칙에 동참하면서 그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사는 것이 도였던 것이다. 결국 도는 만물이 스스로 그렇게 살아가는 방법이다.
2. 도의 지도리, 이분법 가로지르기
사물은 모두 저것 아닌 것이 없고, 동시에 모두 이것 아닌 것이 없다. 자기를 상대방이 보면 저것이 되는 줄을 모르고 자기가 자기에 대한 것만 알 뿐이다. 그러기에 이르기를 저것은 이것에서 나오고 이것은 저것 때문에 생긴다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이것과 저것이 서로를 생겨나게 한다는 방생(方生)이라는 것이지.
한쪽에서의 삶은 동시에 다른 한쪽에서는 죽음이고, 한쪽에서의 죽음은 동시에 다른 한쪽에서는 삶이다. 한쪽에서 좋음은 동시에 다른 한쪽에서는 좋지 않음이고, 한쪽에서 좋지 않음은 동시에 한쪽에서는 좋음이다. 옳음은 그름을 따르고 그름은 옳음을 따른다. 이 때문에 성인은 이런 것들을 따르지 않고 하늘을 따르는데, 이 역시 자기가 참이라고 믿는 것에 따르는 것일 뿐이다. 이것은 또 저것이고, 저것은 또 이것이다. 정말 저것과 이것의 구별이 있는 것일까? 정말 저것과 이것의 구별이 없는 것일까? 저것과 이것이 상대되지 않는 것을 도추라고 한다. 도추는 비로소 고리의 중심이 되어 무궁한 변화에 호응한다. 옳음 역시 하나의 무궁이고, 그름 역시 하나의 무궁이다. 그러므로 타고난 밝음을 따르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다고 말한다.
삶이 있기에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기에 삶이 있다. 됨이 있기에 안됨이 있고 안됨이 있기에 됨이 있다. 옳음이 있기에 그름이 있고, 그름이 있기에 옳음이 있다. 그러므로 성인은 일방적 방법에 의지하지 않고, 하늘의 빛에 비추어 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대로를 그렇다 함이다. [因是]
성인은 사람들을 현혹하는 현란한 빛을 없애려 한다. 그러기에 이것이냐 저것이냐 구별하려 하지 않고 보편적인 것에 머문다. 이것이 바로 밝음이다. (是故滑疑之耀 聖人之所圖也. 爲是不用而寓諸庸 此之謂以明.)
장자는 만물이 갈라져 나오고, 이에 따라 언어가 생겨나면서 사물을 구별하게 되고, 구별하는 과정에서 차별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만물이 하나였던 세계에서는 이분법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각각의 개별적 존재자들이 생겨나자 분별지가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유/무, 흑/백, 대/소, 미/추, 선/악, 호/오, 시/비 등등의 이분법으로 나와 타자를 분별하게 된 것. 인간이 문명의 삶으로 진입하게 된 것이다.
유형의 세계에 사는 존재들은 사물을 이렇게 구분하게 된다. 이 또한 자연이다. 따라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음/양, 대/소와 같은 흑백논리는 대립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장자는 삶은 죽음이 대응되지 않으면 성립하지 않고, 옳음은 그름이 상대하지 않으면 성립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그렇지 않은가? 타자라는 대립되는 짝이 없으면 나는 나로 변별되지 않는다. 그러니 대립되는 짝들은 서로 의존한다. 대립하면서 의존하는 관계. 이것은 저것이라는 짝이 대응하기 때문에 성립한다. 미추, 호오, 선악, 피차, 생사의 관념들은 모두 하나의 일방적 측면이 있으므로 다른 일방적 측면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저것이 없다면 이것도 없다. 추가 없다면 미란 존재하지 않는다. 대립되는 짝들은 서로를 낳으면서 서로에게 의존한다. 결국 타자가 없으면 아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들은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일례로 절대적 옳음과 절대적 그름으로 편 가르기를 하고 차별한다. 장자는 이런 식의 흑백논리는 존재 원리에 어긋난다고 본다. 하나의 기준 안에서 相生하고 相克하는 이분법은 어찌 보면 그 인연의 장에서만 일어나는 특별함일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보편타당한 진리 혹은 지식으로 여긴다. 문제는 여기에서 일어난다. 나는 어떤 타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지금 여기에서 대대하면서 의존하는 나와 타자는 하나의 특별함이다. 그 타자가 달라지면 나는 다르게 구성된다.
그렇다고 장자가 상대성의 논리에 빠진 것은 아니다. 이것도 진리, 저것도 진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옳으면 저것도 옳고, 저것이 그르면 이것도 그르다는 식의 상대주의는 어떤 처지에도 서지 않아서 공정한 듯하지만, 결국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다. 선택하지 않고 살 수는 없다. 상대주의는 중간자의 처지에 서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어떤 태도도 보여주지 않는다. 다양성을 인정한 듯하지만 시비와 미추와 호오와 선악을 경계 짓는 이분법의 한계를 극복하지는 못한다. 이분법의 기준을 뛰어넘기 그것이 장자의 방법이다. 하나의 이분법으로 모든 사물을 재단하지 않기. 이분법을 가로지는 방법이 ‘도추’로써 사물을 인식하는 것이다.
사람은 습한 데서 자면 허리 병이 생겨 반신불수로 죽지만 미꾸라지도 그렇던가? 나무 위에 있으면 떨고 무서워하지만 원숭이도 그렇던가? 이 셋 중 어느 쪽이 올바른 거처를 알고 있는 걸까? 또 사람은 소․돼지 따위의 가축을 먹고, 순록은 풀을 먹으며, 지네는 뱀을 먹기 좋아하고, 올빼미는 쥐를 먹기 좋아한다. 이 넷 중 어느 쪽이 올바른 맛을 알고 있다고 하겠는가? 암원숭이는 긴팔원숭이가 짝으로 삼고, 순록은 사슴과 교배하며, 미꾸라지는 물고기와 논다. 모장이나 여희는 사람마다 미인이라고 하지만, 물고기는 그를 보면 물 속 깊이 숨고, 새는 그를 보면 하늘 높이 날아오르며, 순록은 그를 보면 기운껏 달아난다. 이 넷 중 어느 쪽이 이 세상의 올바른 아름다움을 알고 있을까? 내가 보기에는 인의의 발단이나 시비의 길은 어수선하고 어지럽다. 어찌 내가 그 구별을 알 수 있겠나?
선악은 절대적 진리가 아니다. 구체적 시공간 위에서 진리는 파악된다. 시공간이 바뀌면, 현실의 배치가 바뀌면 진리도 바뀐다. 미꾸라지라는 생명체에게 인간은 이상한 존재이고, 인간에게 미꾸라지는 이상한 존재이다. 그렇게 다른 것이 자연이다. 그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도다. 인간이 아름다우면 미꾸라지도 아름다운 게 아니라, 인간의 아름다움과 미꾸라지의 아름다움은 다르다. 따라서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아름다움이라는 어떤 규정으로 인간에 대해서도, 미꾸라지에 대해서도 말할 수 없다. 즉 인간의 입장에서 미꾸라지의 거처를 폄하하지 말 것이며, 미꾸라지 입장에서도 인간의 거처를 폄하해선 안 된다. 미꾸라지의 거처를 인간처럼 바꿔서는 안 되며, 인간의 거처를 미꾸라지의 거처처럼 꾸며서는 안 된다. 인간은 그렇게 생겨나서 그렇게 사는 것이고, 미꾸라지는 그렇게 생겨나서 그렇게 사는 것이다. 이것이 도추다.
도추는 도라는 지도리라는 뜻이다. 지도리는 문을 열고 닫게 해주는 경첩을 말한다. 경첩은 문을 닫기 위함인가 아니면 열기 위함인가? 닫기도 하고 열기도 하는 것. 대립적인 어느 한 편에 서지 않는다. 오히려 이 대립적인 것을 포괄한다. 따라서 도추는 이것과 저것이라는 절대적 시비를 넘어서는 것이다. 이 도의 입장에 서면 절대적인 척도, 표준화, 등급화를 넘어설 수 있다. 존재들이 변하면 진리도 변한다. 영원한 진리는 없다. 미추의 관념조차 시공간을 가로질러 절대적으로 영원할 수는 없다. 시공간이 바뀌면 미추 관념은 달라진다. 과거의 미로 오늘을 재단할 수 없고, 오늘의 미로 과거를 재단할 수 없다. 절대적 미라는 관념 자체를 떠나야 한다. 오늘의 선이 내일에는 악이 될 수 있다. 내가 만나는 타자가 누구냐에 따라 변화해야 하는 것. 그것이 도추(道樞) 곧 도의 지도리이다.
사물이 본래 하나임을 알지 못하고 죽도록 한쪽에만 집착하는 것을 일러 아침에 셋이라 한다. 아침에 셋이 무슨 뜻인가? 원숭이 치는 사람이 원숭이들에게 도토리를 주면서 아침에 셋 저녁에 넷을 주겠다고 한다. 원숭이들이 모두 성을 냈다. 그러자 그 사람은 그러면 아침에 넷 저녁에 셋을 주겠다고 했다. 원숭이들이 모두 기뻐했다. 명목이나 실질에 아무런 차이가 없는데도 원숭이들은 성을 내다가 기뻐했다.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인은 옳고 그름의 양극을 조화시킨다. 그리고 모든 것을 고르게 하는 하늘의 고름에 머문다. 이를 일러 두 길을 걸음(兩行)이라고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朝三暮四, 朝四暮三의 뜻이 장자에서는 다르게 쓰인다. 성인의 교활함, 원숭이의 어리석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쪽도 살리고 저쪽도 살리는 균형을 이루는 하늘(天均)의 경지로 평가된다. 천균이나 양행(兩行)은 모두 도추와 같은 경지다. 하늘의 입장에서 균형을 이룬 것이다. 균형은 표준화나 규격화와는 다르다. 존재자들의 입장을 다 살려주는 철학적 태도이자 방법이다. 『열자』에 기록된 이 고사는 저공이 원숭이를 사랑하지만, 집안 형편이 안 좋아 원숭이들에게 원하는 만큼의 도토리를 줄 수 없었다. 저공의 집안사람들도 굶주리고 있었던 것이다. 원숭이들의 도토리를 줄여야 집안사람들도 산다. 그래서 저공이 사람도 살리고 원숭이도 살리는 방법으로 원숭이에게 일곱 개의 도토리를 주기로 결정한다.
그리하여 저공은 아침에 셋, 저녁에 네 개의 도토리를 주기로 했다. 그랬더니 원숭이들은 성을 낸다. 도토리를 줄이지 말라. 그러나 저공은 일곱 개 이상의 도토리를 줄 수는 없었다. 사람도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저공은 원숭이들의 입장에 서면서 사람도 해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고심한다. 마침내 저공은 누구의 입장에도 서지 않으면서 양쪽을 다 만족하게 하는 방법을 찾아낸다. 아침에 셋 저녁에 넷을, 아침에 넷 저녁에 셋으로 바꿈으로써 양쪽이 모두 사는 길로 나아간 것이다. 서로의 고통을 분담하고 공존하려면 누구 하나만 일방적으로 희생할 수 없다. 저공은 똑같은 개수이지만 원숭이들에게 아침에 배를 불려주는 길을 선택한다. 이것이 원숭이의 입장이다. 실질은 같았지만 조삼모사는 화를 불러왔고, 조사모삼은 기쁨을 가져왔다. 미세한 차이지만, 감정을 움직인다. 원숭이들은 아침에 배가 부른 것이 활동에 적합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입장을 헤아리고 집안 식구들도 살리는 길, 그것이 양행이다. 장자는 이것이 비겁함이나 교활함이 아니라고 한다. 이것이야말로 원숭이의 무의식까지 넘나드는 대칭성 사고가 아니겠는가?
이분법을 가로지르면 만물에 대한 윤리적 태도를 획득하게 된다. 이분법을 벗어나면 변화무쌍이 곧 존재의 한계이거나 허무라 생각하는 실존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된다. 모든 만물은 생성 중이고 변화 중이므로 모든 만물은 하나요 같다는 것. 그래서 존재자들과 부대끼는 세계가 더는 고통이 아니라 나를 바꾸고 다른 존재를 바꾸어 새로운 존재를 생성케 하는 현장임을 깨닫는 것이다. 이 세상은 나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생명력은 만물들과의 공존 속에서 이어진다. 만물들도 나와 연관되어 있다. 연루되어 있는 타자들과의 공존, 즉 서로의 자연성을 해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서로의 생생지도를 지켜주는 것, 이것이 존재의 윤리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힘이 바로 도추(道樞)이다.
글_길진숙(남산 강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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